176화. 노가다는 나의 무기 (3)
딩동!
언제 들어도 반가운 소리. 자다가 들으면 졸음이 번쩍 구만리 장천까지 달아나다가 멀티버스로 튕겨 나가게 만드는 소리. 맑고 고운 알림음이 달팽이관을 땅 때렸다.
정신이 띵 하고 깨어났다.
‘……허, 허헛?’
라키엘은 헛숨을 삼키며 눈앞에 새록새록 떠오르는 메시지를 살폈다.
[당신은 집요한 실험정신과 근면한 집념을 발휘하여 역사에 없던 새로운 타입의 탕약인 체내 구리 대사 보조제, ‘구리멸망탕(copper-滅亡湯)’ 레시피를 개발하였습니다.]
[새로운 레시피의 결과물로 ‘구리멸망탕-양산화 Ver.1 시제품’이 성공적으로 조제되었습니다.]
[이 도전적인 시도가 당신에게 커다란 경험이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경험이 당신의 탕약 조제 스킬에 건설적인 성장을 선사합니다.]
[탕약 조제 스킬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스킬명 : 탕약 조제]
[단계 : Lv. 12 (중급)]
[당신이 조제하는 탕약은 기존의 탕약보다 약효가 21% 증가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① : 성분 분석 -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에 한하여, 탕약 성분이 인체에 미칠 약효, 부작용, 독성 등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 - 탕약 조제를 실행하기 이전에, 준비한 약재의 배합과 비율에 따라 어떠한 효능의 탕약이 만들어질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미리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1,900]
[현재 보유 중인 HP : 1,800]
“…….”
미쳤다.
이건 진짜로 미쳤다.
동시에 확신이 빡 하고 들었다.
‘성공이다.’
메시지가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방금 만들어낸 탕약이 체내 구리 대사를 보조해주는 약품이란다. 즉, 원하는 목적에 맞는 효능을 지녔다는 뜻이다.
물론 그럼에도 라키엘은 쉽사리 들뜨지 않았다. 그는 환호하는 대신, 더욱 긴장하며 눈앞의 탕약을 노려보았다. 옵션의 발동은 순식간이었다.
딩동!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을 감지하였습니다.]
[탕약 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물론!’
[탕약 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합니다.]
[스캔 중]
[3…… 2…… 1…….]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딩동!
“…….”
꿀꺽, 긴장감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라키엘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두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됐다.’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침내, 원하던 배합이 제대로 만들어졌다.
‘내가 제일 핵심으로 생각했던 약재인 대황이 마침내 제 역할을 해서…… 체내의 구리 배출을 촉진시키고 있어. 황련도 마찬가지야. 자체적으로 품고 있는 풍부한 아연 성분을 바탕으로 장내의 구리 흡수를 효과적으로 억제하게 됐어.’
비유하자면, 이번 탕약에 들어가는 약재 중에서 대황은 공격수였다. 체내에 쌓인 구리의 배출을 촉진시키며 딜링을 하는 역할이었다. 반면 황련은? 풍부한 아연 함유량을 바탕으로, 신체의 구리 성분 흡수를 방해하는 수비수 역할을 톡톡히 해내게 됐다.
탕약을 고안하며 바랐던 역할 그대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탕약에 함께 들어간 황금, 단삼, 아출, 계혈등과 그 밖의 극소량의 약재들이 골고루 조화를 이루게 됐다. 덕분에 간에서의 담즙 분비를 촉진시키고, 간의 섬유화에 저항하는 항섬유화 능력을 발휘하게 됐다.
또한, 약간의 신경 안정 역할을 통해 윌슨병이 초래하는 신경학적 문제에 대한 대응 능력도 갖추게 되었다. 심지어 장기 복용에 따른 체내의 독소 누적 등의 부작용도 최대한 줄이는 데에 성공했다!
‘해냈다. 해냈어.’
언젠가 학회에서 접했던 연구 결과가 떠올랐다. 대황과 황련, 황금, 단삼 등을 활용한 연구에서 윌슨병 환자의 98.11%가 대조군에 비해 간 기능이 개선되었거나 안정을 유지했다는 발표였다.
‘그걸 기억해두길 잘했지.’
덕분에 이번 시도를 해낼 수 있었다. 물론 검정색 K맛 가시로 수차례나 허벅다리를 찔러대야 했지만.
“…….”
굳이 우울한 자해(?)의 기억은 떠올리지 말자. 하여간 검정색 가시의 ‘8282 모드’가 더 오래가면 참 좋을 텐데.
‘어쨌건. 아직은 들뜨지 말자. 그러기엔 일러. 웃어도 땅 보고 웃자.’
함부로 건방져지면 안 된다. 자칫 들떴다간 될 일도 망한다. 그러니 환자의 경과가 실제로 호전되기 전까지는 절대 긴장을 풀지 말자.
라키엘은 인생의 진리를 새삼 되새기며 구리멸망탕을 소중히 안고서 병실로 갔다. 마침 윌슨병 환자, 파비오 씨는 깨어 있는 듯했다. 한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선생님, 제 어머니를 돌보아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부끄럽군요, 파비오 씨.”
병실 문을 열려는데 들려오는 목소리.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환자인 파비오 씨와 신입 의사 발렌티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히려 제가 파비오 씨에게 사죄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 제가 파비오 씨와 어머님을 너무 모질게 대했습니다. 정말로 철없던 제 행동을 뒤늦게나마 반성하며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그래도 그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틀린 부분은 없었습니다. 조금 서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희를 다른 병원이 그랬던 것처럼 무작정 강압적으로 내쫓지도 않았고 말입니다.”
“그,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부끄러워지네요.”
“하하. 아닙니다. 그날 선생님이 제 억지를 그렇게라도 받아주고 계셨기 때문에 황태자 전하께서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거 참.
듣고 있자니 민망해져서 안 되겠다. 그러니 이쯤에서 전격적인 입장.
“똑똑?”
“엇?”
“헛?”
이쪽을 돌아보며 깜짝 놀라는 파비오 씨와 신입 의사 발렌티노. 한쪽에는 파비오 씨의 어머님이 간병인 침상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도 보였다.
라키엘은 그들을 향해 태연하게 말했다.
“약 배달 왔습니다아.”
“……예?”
“좀 드셔 보라고 말입니다.”
행여나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소중하게 가지고 온 탕약을 파비오 씨에게 내밀었다. 파비오 씨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새겨졌다.
“이게 뭡니까?”
“뭐긴요. 약이지.”
“약이요?”
“이름은 구리멸망탕?”
“…….”
“이상한 거 아니니까 믿고 잡숴 보세요.”
“…….”
파비오는 황태자가 내미는 탕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릇에 담겨 모락모락 뜨끈한 김을 피워내는 물약. 온통 시커먼 색깔만 보자면 꼭 구정물 같았다. 게다가 냄새도 굉장히 낯설었다.
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던 어머니와 나를 받아주셨으니까.’
이렇게 무료로 입원까지 시켜주었다. 자신조차도 모르던 질병을 파악하고, 이렇게 약까지 손수 만들어서 가지고 왔다. 무려 제국의 황태자가! 자신이 감히 우러러볼 생각도 못 할 귀한 분께서!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삽시간에 젖어드는 파비오 씨의 감수성, 아니, 눈물샘! 하지만 그의 살랑살랑 피어나던 감동은 덧없는 일장춘몽의 꽃잎처럼 스러지고 말았다. 황태자에게서 받은 구리멸망탕을 딱 한 모금 입에 머금는 순간.
꿀끄억.
“……급?”
파비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으면 온몸이 덜컥 굳어 버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하였던가. 그 언젠가 들었던 어르신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지금이 딱 그랬다.
‘아.’
나는 죽은 건가. 그런 건가. 혹은 벌써 지옥에 떨어졌나. 그렇다면 내가 떨어진 지옥은 미각멸망의 지옥인 거겠지. 그러니까 내 입속에서 지옥 악귀나 즐길 법한 이런 맛이 혓바닥을 마구잡이로 유린하며 쑤셔대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뭐해요?”
지옥왕, 아니, 황태자의 물음이 날아왔다. 그제야 파비오의 눈동자에 잠깐 가출했던 초점이 돌아왔다. 그가 삐거걱, 고개를 돌렸다. 몹시 흔들리는 눈빛으로 황태자를 쳐다보며 무언의 항의를 보냈다.
전하, 끝끝내 저를 죽이려 하시나이까.
“안 죽어요. 삼켜 봐요.”
“……꿀꺽.”
“참 잘했어요. 한 모금 더.”
“저, 전하!”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입원시켜 달라고 고집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딱히 나쁘게 살지도 않았지만 어쨌건 착하게 살겠습니다!
파비오는 진심으로 빌고 싶었다. 정말이었다. 방금 황태자가 건넨 탕약이 너무나 맛이 없었다. 진짜로 처음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었을 땐 거의 영혼의 발가락 하나쯤은 지옥의 문지방을 살포시 찍고 온 것만 같았다.
즉, 다시는 먹고 싶지 않았다. 이걸 이대로 계속 더 마셨다간? 미각을 영원히 잃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자비(?)가 없었다.
“괜찮아요.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입니다.”
“하, 하지만, 전하.”
“너무 심하게 쓰다고요?”
“예…….”
“그럼 몸에 더 좋은 거겠네.”
“…….”
“미안해요. 이렇게 쓰게 만들어서. 다음부턴 감초(甘草)라도 좀 넣어 볼게요. 그럼 쓴맛이 다소 줄어들 테니까.”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설마하니 맛 때문에 이렇듯 격렬한 반응을 얻을 줄은 몰랐는데. 너무 약효에만 몰두한 나머지 환자의 미각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감초를 첨가한 버전은 새로 개발해야 하는 거고. 일단은 지금 버전의 탕약으로 치료의 가닥부터 잡아야지.’
결국, 그는 파비오 씨를 어르고 달래야 했다. 탕약을 마시는 내내 파비오 씨의 곡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결과는 놀라웠다. 며칠 후, 파비오 씨를 진맥한 라키엘은 구리멸망탕의 효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딩동!
[종합 소견 : 누적되어 있던 만성적 피로가 조금씩 개선되고 있습니다. 윌슨병이 감지되었습니다만, 체내의 구리 성분 배출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는 적절한 처방과 식단의 결과로 보이며, 현재의 치료와 케어를 유지할 시 원활한 상태의 회복을 기대해볼 수 있겠습니다. 화이팅♡]
‘……해냈다!’
라키엘은 환호했다. 구리멸망탕의 효능이 확실히 증명되고 있었다. 거기에 구리가 많이 함유된 음식물인 버섯, 동물의 간, 조개 등의 어패류, 견과류, 말린 과일, 바나나, 토마토, 포도, 땅콩, 감자 등등의 섭취를 제한한 식단의 구성도 효과적인 듯했다.
“됐습니다, 파비오 씨. 경과가 제법 좋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예.”
라키엘은 파비오 씨의 손을 꼭 붙들고서 흐뭇하게 웃었다.
“아직 티가 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만 계속 관리를 하면 돼요.”
“그러면 퇴원을…….”
“할 수 있겠지요. 간에 쌓인 구리의 수치가 정상으로 내려오면 말입니다.”
“그럼 그 후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계속 주기적으로 통원치료와 진찰을 받으셔야 합니다. 약도 계속 복용해야 하고, 지금처럼 식단도 꼼꼼하게 관리해야 할 테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잘 지켜주면, 평생 같은 질환으로 아플 일은 없을 겁니다. 건강하게 어머님을 돌봐드릴 수도 있을 테고요.”
“하, 하하…….”
파비오의 얼굴에 물기 서린 웃음이 피어났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자신의 마음을 황태자께 전할 수 있을까.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눈치도 없는 눈가만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동안 라키엘의 눈앞에는 소리 없는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당신은 집념이 서린 연구와 노력 끝에 개발한 새로운 탕약으로 환자 : 파비오의 윌슨병을 평생 관리할 방법을 정립하였습니다. 비로소 그는 심각한 유전적 질환을 훌륭히 극복하게 될 것이며, 남은 평생을 건강하게, 당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고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윌슨병은 기본적으로 완치가 불가능하여 평생에 걸친 관리가 필요한 질환이며, 이에 따라 기대 수명의 정확한 계산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상기의 이유로 ‘진료비 청구’ 스킬이 발동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당신의 오장육부가 보상을 챙겨줍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심장이 당신의 등을 토닥입니다.]
[허파가 당신의 등을 토닥입니다.]
[대장이 당신의 똥을 토닥입니다.]
[간장이 뭔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위장이 뭔가 잘못됨을 느낍니다.]
[콩팥도 커다란 착오를 느낍니다.]
[오장육부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한 대장을 척추에 거꾸로 매달아 본보기로 삼습니다.]
[잠깐의 혼란을 잠재운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따스한 격려와 성원이 담긴 7,0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8,800]
“…….”
무려 7,000 HP가 들어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쉽게 기뻐하지도, 티를 내며 환호하지도 않았다. 대신, 울음을 삼키는 파비오 씨의 등을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함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파비오 씨의 어머님을 든든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며칠이 더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행복한 미래를 조심스럽게 꿈꾸어 보았다.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있지 않을까 생각도 품어보았다.
별궁 한의원이 날로 활기를 띠어가는 모습을 보자면, 의료대학에서 잡아온(?) 신입 의사들이 나날이 한의원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자면, 절로 작은 희망이 피어났다.
‘할 수 있어. 내 생각대로 되어가고 있다.’
이대로 한의원의 종합병원식 체계가 잡히면 된다.
그러면 보다 안정적으로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할 수 있고, 그중에 확실하게 보너스 수명을 안겨줄 환자만 자신이 도맡을 수 있다. 더욱 효율적으로 보너스 수명을 늘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대로만 간다면 충분히 가능해.’
그러면 자신도 남들처럼 넉넉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안정적으로 황족의 삶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 어렴풋한 희망의 촛불이 가슴속에 켜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하? 큰일이 났습니다?”
“음?”
평소처럼 진료로 평범한 아침을 시작하던 중이었다. 첫 환자를 내보내고 다음 환자를 받으려는데, 들어오라는 환자 대신 별궁의 시종장이 원장실로 들어왔다. 한데 시종장의 표정이 어쩐지 심상치가 않았다.
“무슨 일이지?”
“그게, 실은…… 한의원에 납품이 들어오기로 했던 약재가…… 며칠째 들어오지가 않고 있습니다.”
“……뭐?”
이건 또 무슨 일일까.
한창 안정적인 행복을 누려보려던 라키엘의 가슴에 쩌정, 생각지 못한 약재 수급난의 아픈 돌멩이가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