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끊어진 거래 (1)
아프다. 이런 사태는 진짜 아프다. 혹시 하늘은 내가 누리려는 안정적인 만수르 라이프가 그렇게나 부럽고 배가 아픈 걸까.
“……그러니까, 약재 납품이 안 들어오고 있다고?”
“예, 전하.”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신 황송하고 죄송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덕분에 쌔한 예감이 스멀스멀 옆구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냥 단순히 납품이 늦어지거나 하는 사태면 저런 표정을 보이진 않을 테니까.
“조금 더 자세히.”
“예에, 전하. 그것이…….”
시종장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실은 며칠쯤 되었습니다, 전하. 특정 몇몇 약재가 며칠 전부터 납품이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당연히 거래하던 약재상에 문의를 넣었고 말입니다. 독촉도 했습니다. 하온데, 오늘 답이 오기로는…….”
“어떤 답이 왔지?”
“당분간 약재 납품이 계속 어려울 것 같다는 대답이 왔습니다, 전하.”
“뭐?”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몇몇 약재라니. 당분간이라니.
“어떤 약재가 언제까지 납품이 어렵다는 거지? 구구절절 미사여구는 넣지 말고 사실만 말해보도록.”
“예, 전하. 황기와 마황, 아위와 감초 등등입니다. 그리고 납품이 다시 가능해지는 시기는…… 아직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하.”
“아직 알 수 없다고?”
“예, 전하. 다만-”
시종장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최소 반년, 어쩌면 그 이상까지 계속 납품이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최소 반년이라니. 더 길어질 수도 있다니. 심지어 그중에 감초가 있다는 점이 가장 최악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감초는 공급이 끊어지면 안 되는데.’
사실이다.
이건 심각한 사태다.
흔히들 ‘약방의 감초’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감초가 오만가지 처방에 다 들어간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당장 별궁 한의원에서 조제하는 탕약 중에 감초가 들어가는 처방만 해도 족히 수십 가지는 된다.
‘위령탕(胃苓湯), 온경탕(溫經湯), 월비가출탕(越婢加朮湯), 황기건중탕(黃耆建中湯), 황금탕(黃芩湯), 황련탕(黃連湯), 을자탕(乙字湯), 갈근가출부탕(葛根加朮附湯), 갈근탕(葛根湯), 가미귀비탕(加味歸脾湯), 감맥대조탕(甘麥大棗湯), 길경탕(甘麥大棗湯), 궁귀교애탕(芎歸膠艾湯), 거기에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수십 가지 더.’
실로 탕약 이름만으로 노래 10절까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감초가 들어가는 처방은 실로 다양하고 방대했다.
이는 감초 특유의 성질 때문이었다.
‘함께 들어가는 여러 약재의 독성을 완화하는 작용을 하니까. 감초가 없으면 나머지 약재들의 성질이 제각각 미친 듯이 날뛰면서 따로 놀게 되거든. 주요성분인 글리시리진산이 독성물질에 의한 간 손상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특히나 달달한 감미(甘味)가 있어서 한약재 특유의 쓴맛을 잡아주는 데에는 감초만 한 놈이 없으니까.’
그런데 감초가 없으면?
공급이 끊어지면?
‘망하는 거야.’
최소 현재 처방 중인 탕약의 절반 이상은 조제할 수가 없게 된다. 환자들의 회복지수와 자신의 행복지수 그래프가 손에 손잡고 나란히 음차원의 하드코어한 시궁창으로 3.5회전 트리플악셀 다이빙을 시전하게 될 것이다.
즉, 별궁 한의원 운영에 심각한 악영향이 생기리라. 하지만 라키엘은 금방 대안을 떠올렸다.
“흐음. 그럼, 약재를 납품받는 거래처를 바꾸면?”
그러면 된다. 약재상이 거기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한데 물음을 받은 시종장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웠다.
“물론 그 방법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전하. 하지만…….”
“하지만?”
“다른 약재상들을 모조리 수소문했지만 역시 황기와 마황, 아위와 감초는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설마, 황도 시내의 모든 약재상에서?”
“예, 전하.”
“그럼 황도에 출입하는 상단은? 조사해봤나?”
“물론입니다, 전하. 하오나, 그 어떤 상단의 운송 품목에서도 저 약재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
이건 좀 심각해지는데.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시종장의 말을 들으니 사태의 윤곽이 얼마나 커다란지가 감이 잡혔다.
‘황도를 출입하는 모든 상단의 운송 품목에 저 약재들이 없다는 말은 즉, 황도와 이곳 지방 전체의 감초 유통이 끊겼다는 건데.’
그거다.
그거 외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째서?”
라키엘이 물었다.
시종장이 송구한 듯 고개를 숙였다.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으면 조사해올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그래, 부탁해.”
시종장이 물러났다. 진료실에 적막이 남았다. 그 빈 공간을 라키엘의 한숨이 채웠다.
“후우.”
하필이면 감초라니.
왜? 무슨 일 때문에?
짐작이 가는 곳이 없었다.
‘감초는 여기 정원에서 재배도 안 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재배를 시도하기는 해봤다. 감초가 원래 잘 자라는 만주나 시베리아 몽골 등지와 비슷한, 한랭하고 건조한 정원 구역에서 재배를 시험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토질이나 물이 달라서 그랬던 걸까. 납품받는 감초에 비해 약효가 반의반도 안 나왔다. 약으로 쓸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때려치웠다. 괜히 재배하느라 손만 많이 가고, 약효는 떨어졌으니까. 그냥 양질의 감초를 약재상에서 납품받는 게 효율이 좋았으니까.
그런데 그게 막히면 이젠 어떡해야 할까.
“……후.”
깊은 한숨이 진료실 책상 위로 흘러내렸다.
♣
시종장은 저녁이 한참 지난 시간에야 돌아왔다. 그가 가지고 온 조사 결과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전하. 황도뿐만이 아닙니다. 제국 영토 전체의 감초 유통이 씨가 말랐습니다.”
“뭐?”
그게 가능한 일일까.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시종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제국에 유통되던 감초가 거의 모두 서북부 변경지대인 크라노스크 지방에서 산출되었다는 점은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 그 지방의 감초가 최고니까. 기후마저도 감초 재배에 너무나 적합하니까.”
사실이었다.
마젠타노 제국의 북서부에 위치한 크라노스크 지방은 지구의 시베리아나 만주, 몽골과 기후가 거의 흡사한 한랭하고 건조한 지대라고 했다. 그만큼 감초 재배에 적합했다. 문제는 너무나 척박해서 사람이 살아가기에 빡쎈 동네라는 점이었지만.
“그래서 오크 부족이 그 지방에 모여서 살고 있다고 했지. 맞나?”
“예, 전하. 크라노스크 지방은 척박하고 험악한 황무지이기에, 오크 부족이 특별자치령을 이루어 대대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 무슨 일이 있나?”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되고 궁금해졌다. 크라노스크 지방에서 주로 산출되는 감초가 제국 전체에 유통이 되지 않고 있다니. 왜일까.
“그곳에서 반란 같은 게 일어났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혹시 대규모 마적이나 산적 떼가 발호해서 설치는 통에 상단의 거래나 통행에 차질이 생겼나? 아닌데. 마적이나 산적 따위가 설쳐봐야 오크 전사들한테 싸그리 썰릴 테고.”
사실이었다.
듣기로 오크 종족의 피지컬은 대륙의 유사 인류 중에 으뜸이라 했던가. 그만큼 강인하고 용맹한 전사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굳이 그런 곳에서 설칠 산적 떼가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런 이쪽의 추측을 증명하듯,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전하. 반란이나 도적 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조사 결과, 크라노스크 지방의 오크들과 독점적으로 거래를 하던 상단에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상단? 독점 거래?”
“예, 전하. 이걸 보시지요.”
시종장이 가방에서 꺼낸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오늘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크라노스크 지방과 툴룬 상단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
서류를 살폈다.
비로소 이번 감초 수급난 사태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잠깐. 이거, 툴룬 상단이 크라노스크 지방의 오크들과 유일하게 거래를 유지하던 상단인데, 그 상단장이 최근 깊은 실의에 빠져서 식음을 전폐하고 상단 운영에서 손을 놓아 버렸다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전하.”
“그럼, 툴룬 상단장이 실의에 빠진 이유가…… 하나뿐인 외손녀가 중병에 걸려 오늘내일하고 있어서이고?”
“역시 그렇습니다, 전하.”
시종장이 첨언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그 외손녀는 툴룬 상단장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툴룬 상단장의 외동딸과 남편이 몇 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죽어서입니다. 그 외손녀가 사망한 외동딸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라고 들었습니다.”
“……쯧, 그러면 실의에 빠질 만하네.”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하나뿐인 딸이 사고로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외동딸. 그 아이가 상단장의 유일한 혈육인 거다. 한데 그런 아이가 중병에 걸려서 오늘내일하고 있다면? 어느 외할아버지가 온전하게 버틸 수 있을까.
“그럼 의사는? 안 불렀나?”
“근방에서 유명한 이들을 모조리 불러 모았지만, 다들 고개를 젓고는 물러났다고 합니다. 아무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군요.”
“흐음.”
라키엘은 보고서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툴룬 상단이 크라노스크 지방 오크와 독점적인 거래를 하던 상단인 이유가 쓰여 있었다.
‘외부인을 배척하는 지극히 폐쇄적인 오크들의 성향 때문이로군.’
툴룬 상단장도 오크들과 거래를 트기 위해 거의 6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공을 들였다고 보고서에 쓰여 있었다. 그걸 보니 이 사태가 이해가 됐다.
‘워낙 척박한 곳이라 다른 상단이 굳이 탐을 낼 거래처가 아니었고, 그나마 툴룬 상단이 독점적인 거래와 유통을 도맡고 있었는데, 상단장의 멘탈이 나가 버린 상황이란 거네. 하나뿐인 외손녀가 위독해져서.’
정리하자면 그러했다.
라키엘은 시종장에게 물었다.
“그럼, 내 권한으로 명령이나 제의를 하면 어떨까?”
“명령이나 제의라시면……?”
“그곳 지방의 오크들에게 말이야. 툴룬 상단을 거치지 말고 이곳, 별궁 한의원과 직접 거래를 하자고.”
“하오나 전하,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크 전사들이 지극히 폐쇄적이라서?”
“예, 전하.”
“황태자의 권력으로도 안 될까?”
“그들은 제국의 권력을 추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크라노스크 지방도 제국의 영토인데?”
“엄밀히 따지면 제국 변방의 특별자치령입니다.”
“황제 폐하께 부여받은 자치권이 있기에, 내 입김이 소용없을 거란 뜻이군. 맞나?”
“정확하십니다, 전하. 그렇기에 행여나 오크 전사들을 과도하게 압박하게 되면, 그들은 곧바로 반기를 치켜들 것입니다.”
“에이, 설마.”
“150년 전에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하.”
“……정말?”
“예, 전하. 당시의 어느 황족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오크 전사들을 과도하게 압박하였고, 그 결과 크라노스크 지방의 오크 부족 전체가 반발하며 북서쪽 국경 너머의 앙가르스크 왕국과 친교를 다지려 하였지요.”
“…….”
그래. 알겠다.
‘그곳의 오크들, 제국 황실과 공유하는 이득 때문에 국경 완충지대의 역할을 수행하는 공생 관계인 거로군. 그들에게 제국은 충성의 대상이 아닌 셈이고.’
라키엘은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는 해법이 얼핏 보였다.
“그래. 알겠다. 그럼 마차를 준비하도록.”
“예? 이 늦은 시간에 어딜…….”
“폐하를 뵈려고.”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오크 특별자치령이 오직 황제의 권위만을 존중하는 곳이라면? 답은 간단하다. 황제가 별궁 한의원과의 약재 직거래를 권고해 주면 된다. 그들은 황제의 말은 들을 테니까.
그런데 웬걸?
황제가 이 몸의 아빠다.
“그러니까 써먹어야지. 아빠 찬스.”
라키엘은 뻔뻔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