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80화 (180/468)

180화. 전사로 인정받는 법 (2)

“3대 700, 꾸익.”

“…….”

휘이잉.

북방의 삭풍이 불어왔다. 살갗을 저미는 바람에 콩닥거리던 심장 한쪽이 서슴없이 쑹컹쑹컹 썰려나갔다. 라키엘은 대뇌피질을 살살 긁어오는 쌔한 불길함을 애써 지르밟아 눌러두며 반문했다.

“700……?”

“그렇습니다. 인간의 황태자여, 꾸익.”

“뭐가 700이라는 거지? 설마…… 토익 700인가?”

제발 그렇다고 해줘.

그럼 나 프리패스라고.

하지만 오크 족장 브라쉬는 이쪽의 아름다운 기대를 아롱사태 씹듯이 저버렸다.

“토익이 뭡니까, 꾸익?”

“아, 그럼 한컴 타자 속도 700?”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꾸익.”

“…….”

현실부정이 안 통하는구나. 역시나 돌아오는 족장 브라쉬의 대답은 불길했던 예상 그대로였다.

“3대 700이라는 것은 3대 운동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의 총합입니다, 꾸익.”

“…….”

아 씨.

어째서 쌔한 예감은 빗나가는 적이 없는 걸까. 라키엘은 전면 개방을 외치려는 눈물샘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설마 벤치프레스, 데드리프트, 스쿼트?”

“정확하십니다, 꾸익!”

“…….”

“무릇 전사라 불리고 싶은 존재라면 그 정도는 솜방망이 다루듯이 들어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실 우리 오크 전사들은 더 많은 무게를 감당해야 진정한 전사로 불릴 수 있습니다, 꾸익.”

“700보다 더? 얼마나?”

“1톤, 꾸익!”

“…….”

어우야 미친.

기겁하는 사이, 족장 브라쉬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1톤은 오크족 전사의 기준이고, 인간에게 전사의 자격을 시험할 때는 700킬로그램을 제시합니다. 종족의 신체에 따른 차이를 감안한 기준이지요, 꾸익.”

“그게 가능한 건가?”

“물론 가능합니다, 꾸익.”

“어떻게?”

“그 정도면 지푸라기 아닙니까, 꾸익?”

“…….”

응, 내 멘탈이 지푸라기처럼 바사삭.

라키엘은 버석거리려는 멘탈을 부여잡으며 한편으로 깨달았다. 안타깝게 죽은 툴룬 상단장, 그가 이곳 오크 부족과 거래를 트기 위해 6년이 넘도록 공을 들였다는 일이 바로…….

‘헬스장 죽돌이 짓을 한 거였구만!’

확실하다.

이제는 알겠다.

툴룬 상단장, 오크족과 거래를 트기 위해 6년이 넘도록 쇠질을 하며 근육을 키웠던 거다. 그러한 인간극장 뺨치는 노력 끝에 마침내 3대 700을 들어 올리고 전사로 인정받았겠지. 비로소 오크들과 본격적인 거래를 시작했던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3대 700이라니. 내가 그걸 어떻게 들어.’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아무리 인생이 하드코어한 시궁창이라지만, 이런 병약가련한 육체로 3대 700이라는 무식한 미션에 도전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릴 줄은 정말로 몰랐다. 3대 700이라면 최소한 스쿼트로 250킬로그램은 짊어져야 한다는 소리인데.

‘……차라리 바벨이 나를 들겠다.’

3대 700이라면 지구에서도 최상위권 인류에게나 가능한 수치다. 어지간한 사람은 약을 한 사발로 드링킹하면서 운동을 직업으로 삼아도 평생 도달할 수 없는 수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걸 이 몸으로?

병약가련한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육체로?

‘차라리 북극곰이랑 강강수월래 하고 살아남는 편이 쉽겠구만!’

그렇다.

이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미션이다. 아니,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거다. 최소 5년, 아마도 훨씬 더 이상이 걸릴 테니까.

그 사이에 감초 공급이 끊긴 별궁 한의원은 망하고, 제국이 무너지고, 이곳엔 가련한 3대 700 헬스쟁이 한 놈만 팬티 쪼가리 한 장 걸치고서 덜러덩 남아 있게 되겠지. 아니, 그 전에 예상 기대수명이 먼저 소진될 거다.

‘그건 안 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키엘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대안이 있었다. 그는 족장 브라쉬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말이야. 꼭 내가 3대 700을 달성할 필요가 있나?”

“예, 꾸익?”

“이 친구 말이지.”

묵묵히 곁을 따르던 데미안을 가리키며, 한층 은근해진 목소리로 족장에게 물었다.

“이 친구가 겉으로는 호리호리하게 보여도, 사실은 제법 강하거든. 아마 조금만 연습하면 3대 700쯤은 금방 달성할 거고. 그럼 이 친구를 전사로 인정한 뒤에 거래를 시작하면 어떨까?”

바로 그거다.

굳이 내가, 직접 거래의 주체가 될 필요가 없다. 일행 중에 누구라도 3대 700을 찍고, 전사로 인정받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 감초 거래를 시작하면 된다!

‘바로 이거지! 가만 보면 기업들도 해외로 진출할 때 현지 법인을 따로 세우잖아? 그 현지 법인을 통해 판매며 사업이며 벌이잖아? 그거랑 똑같은 거지.’

라키엘은 내심 무릎을 탁 쳤다. 생각할수록 단순하면서도 적절한 묘수였다. 한데 이내 돌아오는 족장 브라쉬의 대답은…….

“안 됩니다, 꾸익.”

“……어?”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런 꼼수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꾸익.”

“어째서?”

이해가 안 됐다.

족장이 당연하다는 듯이 콧김을 풍 뿜었다.

“남자는 직접 하는 겁니다, 꾸익!”

“…….”

“감초를 사고 싶은 자가 이 호위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황태자께서 감초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직접 해야 합니다. 특히 우두머리라면, 스스로 자격을 증명해야 합니다, 꾸익.”

“아니, 이 친구도 사실은 같이 필요해서 말이지.”

“거짓말은 안 통합니다, 꾸익!”

“…….”

망했다.

6번 척추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파르르 떨리며 댄스타임에 돌입했다. 눈물이 앞을 가릴 것 같았다. 한데 그때, 뜻밖의 말이 족장 브라쉬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두 가지 예외도 있습니다, 꾸익.”

“뭐?”

예외?

정신이 번쩍 들었다.

브라쉬의 말이 이어졌다.

“단 두 가지의 예외에 한정해서, 3대 700의 전사 자격을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꾸익.”

“그게 뭔데?”

“하나는 만인의 지배자인 황제입니다, 꾸익.”

“그럼 나머지 하나는?”

제발 황태자라고 해줘!

라키엘은 간절하게 빌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달랐다.

“전사로 인정받은 자의 피를 이어받은, 3대 이내의 혈육입니다, 꾸익.”

“……뭐?”

잠깐.

그렇다는 건.

“혹시, 툴룬 상단주의 3대 이내의 혈육이라면 전사의 자격을 시험받을 필요 없이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꾸익.”

“…….”

머릿속에 섬광이 쳤다.

확실한 답이 나왔다.

그건 바로.

‘툴룬 상단장의 외손녀.’

외손녀라면 3대 이내의 혈육이다. 그러니까 된다. 그 아이를 통한다면 이곳 지방의 오크들과 약초 거래를 재개할 수 있다. 별궁 한의원의 감초 공급을 되살릴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아이를 살려야 한다.

‘그 아이, 원래부터 여기 온 김에 한 번은 살펴보려 했지. 양심상, 도의상 말이야.’

정말로 그랬다.

기왕 여기까지 온 길이었다.

툴룬 상단장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곤 하지만, 아픈 아이를 살펴보지도 않고서 황도로 휙 돌아가기엔 양심이 조금 찜찜했다. 하여 한 번은 진료를 보아주리라 내심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한데 이제는?

양심과 도의상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무조건 살려야 해.’

결론이 나왔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그럼 툴룬 상단장의 외손녀는 어디에 있지?”

“그 아이를 살려주실 겁니까, 꾸익?”

“물론. 그걸 바라고 일부러 예외의 경우를 입에 담은 것일 텐데?”

“맞습니다, 꾸익.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역시.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족장 브라쉬의 뒤를 따랐다. 족장은 상단 본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 자그마한 별채가 있었다. 툴룬 상단장이 생전에 자택으로 쓰던 건물인 듯했다.

“이곳입니다, 꾸익.”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자마자 들려오는 것은…… 어린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격한 기침 소리였다.

“콜록, 콜록! 쿨룩! 커윽, 콜록, 씨익씨익……!”

……심한데.

소리만 들어봐도 심상치가 않았다. 기침이 격한 것은 둘째치고, 호흡 사이에 날카로운 피리 같은 소리가 섞여 있었다.

‘기침이 너무 연달아 이어지는 까닭에 허파와 기관지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다 빠져나가 버리는 거야. 그렇게 생긴 공기의 압력 차이 때문에 바깥의 공기가 기관지로 확 몰려 들어가면서 저런 소리가 나는 거고.’

문득, 예전에 처음 황태자 라키엘의 몸에 들어왔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이 몸에서 딱 저런 피리 소리가 났던가. 많이 괴로웠다. 당장에라도 숨이 끊길 것처럼, 순간적으로 눈앞이 확 노래졌다가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으니까.

그걸 지금은 아이가 겪고 있는 거다.

“…….”

냉정해지자. 진료에 앞서 감정을 죽이자.

라키엘은 다짐하며 별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관과 응접실을 지나, 가장 안쪽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때마침 문이 열렸다. 하인으로 보이는 자가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들고 나오다가 이쪽과 마주치고는 흠칫했다.

“네일라를 치료하러 온 분이시다. 잠시 물러나 있도록, 꾸익.”

아마도 족장 브라쉬는 생전의 툴룬 상단장과 제법 교류를 나누었던 듯했다. 물수건을 들고 있던 하인과, 방에 남아 있던 간호인들 모두가 족장의 명에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비로소 라키엘은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가 보였다.

나이는 대략 열한두 살쯤?

‘상태가…… 좋지 않네.’

라키엘의 표정이 굳었다.

한눈에 봐도 아이의 예후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연신 터져 나오는 격한 기침과 피리 소리에 가까운 호흡음, 게다가 얼굴 곳곳에 불긋불긋한 반점이 생겨나 있었다. 단순히 피부가 붉어진 거? 아니었다.

‘점상출혈(petechia)?’

마치, 바늘로 피부를 찌른 자리에 피가 고인 듯했다. 좁은 범위에 새빨간 점이 새겨진 모습 같았다.

‘바이러스 감염인가.’

볼수록 심상치가 않았다. 격한 기침 등의 폐 질환, 거기에 점상출혈까지 보인다면 혈액 응고 능력이 약해졌다는 뜻이니까.

‘일단 진맥부터.’

조심스럽게 아이의 침대 옆에 앉았다. 마침 아이가 간신히 뜬 실눈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누구……? 할아버지?”

잔뜩 쉰 목소리. 아이는 눈을 뜨고는 있으되, 반쯤은 의식이 없는 듯했다. 라키엘은 섣부른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펄펄 끓는 열감이 느껴졌다.

‘진맥.’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제발. 치료할 수 있는 상태였으면.’

그저 단순한 열병이길. 내가 감당해줄 수 있는 질환이길. 그리하여 이 아이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기를.

라키엘은 간절히 바라며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그곳에 검진표의 핵심인 ‘종합 소견’ 항목이 있었다.

[종합 소견 : 심각한 발작성 기침과 레프리제(Reprise) 증상을 보이는 신체입니다. 보르데텔라 백일해균(bordetella pertussis)이 감지되었습니다. 전형적인 백일해 환자입니다. 경고! 즉시 감염 예방책을 마련한 후, 다시 진료에 임하시길 바랍니다!]

“……!”

종합 소견 메시지가 경고성 붉은 색채로 물드는 순간, 라키엘의 뒷목에 소름이 좍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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