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끝없는 기침의 질병 (2)
“혹시 인간의 황태자께서는, 이 지방에서만 지극히 희귀하게 발견되는 긴뿌리 감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꾸익?”
“…….”
걸걸하게 울리는 족장 브라쉬의 물음.
라키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긴뿌리 감초? 그런 걸 내가 들어본 적이 있던가.
결론은 쉬웠다.
“없지, 당연히.”
금시초문이다.
라키엘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족장 브라쉬가 수박보다 커다란 머리를 의미심장하게 끄덕였다.
“아마도 그러실 겁니다, 꾸익. 그건 이곳 현지의 인간이나 오크도 아는 이들만 아는 그런 풀이니까 말입니다, 꾸익.”
“혹시…… 엄청난 약효를 지닌 약재인 건가?”
마치 산삼처럼?
기대하며 물었다.
브라쉬가 벌쭉 웃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꾸익.”
“아마도?”
“예, 꾸익.”
브라쉬의 말이 이어졌다.
“부족의 어르신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 더욱 까마득한 조상의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시대의 이웃인 강철모래 부족에 아로쉬라 불리던 미남 오크 족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꾸익.”
“그런데?”
“하루는 그가 황야를 거닐다가 감초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냥 평범하게 보이는 감초이긴 했는데, 아로쉬는 옳다구나 하고 감초를 캐내기 시작했지요. 그 시절부터 우리 오크들은 겨울이면 감초를 끓인 차를 물 대신 마시는 걸 즐겼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감초를 캐기 시작한 아로쉬는…… 뭔가가 이상함을 금방 깨달았다고 합니다, 꾸익.”
“이상함? 어떤?”
“뿌리가 땅속으로, 아래쪽으로 끝도 없이 뻗어 있었다더군요, 꾸익.”
“……얼마나?”
좀 흥미로운데.
감초 뿌리는 원래부터 땅속으로 깊이 자라기는 한다. 그런데 끝도 없이 땅속으로 뻗어 있었다면 대체 얼마나 깊었다는 걸까.
라키엘은 귀를 활짝 열었다.
브라쉬가 말했다.
“족히 10미터가 넘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15미터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꾸익.”
“헐.”
“그뿐만이 아닙니다. 깊고 깊은 뿌리 제일 아래에 주먹만 한 덩어리 수십 줄기가 감자처럼 뭉쳐 있는데, 아로쉬는 뿌리 전체와 아래의 덩이를 조심스럽게 파내어 부락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일족과 다 함께 그걸 끓여서 마셨더니…….”
“마셨더니?”
“3대 10톤을 달성했다고 합니다, 꾸익!”
“…….”
“실로 훌륭하고 아름답지 않습니까, 꾸익?”
“…….”
응 퍽이나.
‘그거 그냥 헬스맨 주스잖아?’
라키엘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품었는데, 듣고 보니 그저 오크들 사이에 잔뜩 뻥튀기가 되어서 내려오는 무안단물급 도시전설, 아니, 헬스 전설이 아닌가 말이다.
절로 한숨이 푹 흘러나왔다.
“그래서, 혹시나 그 긴뿌리 감초를 찾아내기라도 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렇습니다, 꾸익!”
“어째서?”
“네일라는 제 친우이자, 제가 인정한 인간 전사의 하나뿐인 혈육이니까 말입니다, 꾸익.”
브라쉬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그러니까 그 아일 꼭 좀 살려주십시오, 꾸익.”
“…….”
그래서 그 옛날이야기 하나를 들려주려고 이 밤중에 달려온 거구나. 적어도 진심으로 말이다.
문득, 브라쉬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라키엘도 브라쉬가 해준 이야기를 한 번쯤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일말의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게 되었다.
“하면, 그대가 말한 긴뿌리 감초라는 것 말이지.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지?”
“열심히 채집해야 찾을 수 있습니다, 꾸익.”
“열심히? 어떻게?”
“감초 1만 뿌리 중에 하나의 비율로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꾸익.”
“……뭐?”
라키엘은 순간 자기가 뭘 잘못 들었나 면봉을 찾고 싶어졌다.
“1만 뿌리 중에 하나? 1만 분의 1?”
“그렇습니다, 꾸익.”
“엄청나게 희귀하군. 그럼 긴뿌리 감초를 구분할 방법은?”
“없습니다, 꾸익.”
“…….”
“지면 위로 드러난 줄기나 잎은 보통의 감초와 똑같다고 했습니다. 오직 뿌리만 다릅니다, 꾸익.”
“그럼, 일일이 뿌리를 캐면서 확인을 해야 한다는 건가?”
“바로 그겁니다, 꾸익.”
“…….”
그걸 언제 다 캐고 확인해.
라키엘은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말이 1만 뿌리지, 수십 수백 명을 동원한들 그만큼을 캐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감초는 다른 작물처럼 밭에서 반듯하고 빽빽하게 키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드넓은 황야 곳곳에 자연적으로, 불규칙하게, 드문드문 자생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그걸?
광활한 황야 곳곳을 이 잡듯이 뒤져서?
‘어느 세월에?’
답이 없다.
라키엘은 결론을 내렸다. 냉정하게 따져보니 그랬다. 설령 1만 뿌리를 다 캐낸다고 해도? 그 속에 긴뿌리 감초가 있을 거라는 보장 또한 없다. 아니, 없을 확률이 더 크다.
‘게다가 만약에 그런 식으로 끝끝내 긴뿌리 감초를 찾아낸다고 해도, 그때쯤엔 아이의 치료 시기를 놓친 후가 되겠지.’
그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족장 브라쉬의 이야기 덕분에 잠깐이나마 희망회로에 불을 피웠는데, 아무리 봐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방안이었다.
“알겠어. 좋은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군. 앞으로의 치료에 참고하도록 하지.”
‘우리 언제 다음에 밥이나 한번 먹자’와 동급인 영혼 없는 이야기로 브라쉬를 만족시키며 돌려보냈다. 돌려보낸 후에도 계속 고민을 이어갔다.
‘긴뿌리 감초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제치고. 현실적으로 따져보자. 증상이 심각한 백일해를 치료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탕약과 침술, 뜸을 조합해야 할까. 조금 더 극단적인 치료법을 염두에 두어야 할까. 혹은 안정적인 치료를 이어가며 상태를 지켜봄이 옳을까.
‘긴뿌리 감초 같은 비현실적인 방안보단 확실히 그게 옳겠지.’
정말이다.
환자를 치료하며 도박을 걸면 안 된다. 진료는 장난이 아니니까. 최대한 안정적인 방법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니까 긴뿌리 감초 같은 건 제발…… 떠올리지 말라고, 이 멍청아.’
라키엘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리 생각을 이어가려 해도, 방법을 고민하려 해도, 계속해서 족장 브라쉬가 남기고 간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일족과 다 함께 끓여서 마셨더니 3대 10톤을 치게 만들었다는 신비의 감초.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얼마나 엄청난 성분을 지니고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걸 탕약으로 만들어서 아이에게 먹이면 어떨까. 기대도 됐다.
그러니까…… 그 궁금함과 기대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어오, 미치겠네.’
그렇지 않아도 막막한 참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다른 새로운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암담한 와중이었다. 한데 허황되지만 매력적인 약재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찰싹 달라붙어 버리니,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주 그냥 수능 전날 밤에 수능 금지곡 시리즈를 메들리로 들어 버린 기분이었다!
‘어쩔 수가 없겠네.’
라키엘은 결국, 인정했다.
‘조금 터무니없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건 무시할 수 없겠어. 만에 하나 정말로 긴뿌리 감초라는 걸 찾아낸다면, 그 약효가 실제로 뛰어나다면, 이번 치료의 가장 확실한 게임 체인저가 되어줄 테니까.’
그것만은 확실하다.
어차피 무조건 아이를 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야 오크 부족과 감초 거래를 재개할 수 있고, 별궁 한의원을 무리 없이 운영할 수 있다. 이번 치료에 자신의 안정적인 보너스 수명 획득이 달린 것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라키엘은 진리의 ‘둘 다’를 떠올렸다. 일단 안정적인 치료법인, 보통의 맥문동탕을 달여 아이에게 먹이면 된다. 그렇게 일반적인 탕약으로나마 아이의 기운을 북돋으며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긴뿌리 감초를 탐색하면 어떨까.
‘가능성이 있겠어.’
비로소 각이 서고 견적이 나왔다. 결심이 새겨졌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 잠시 문밖을 지키도록.”
“전하?”
“혼자 생각을 좀 하고 싶구나.”
적당한 핑계로 데미안을 쫓아냈(?)다.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시스템창을 열었다.
‘스킬 개방 목록을 불러줘.’
반응은 금방 왔다.
딩동!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을 열람합니다.]
화아악-!
눈앞에 가상의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
[1. 부항]
[2. 뜸]
[3. 약재 감별]
[4. 약초 탐색]
[5. 약술 주조]
[6. 추나 요법]
‘추나 요법?’
목록 제일 아래에 예전엔 없던 스킬 후보가 하나 생겨나 있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놀라지 않았다. 예전, 앙부아즈에서 ‘내 손은 약손’ 스킬을 개방할 때도 이랬으니까. 전에는 없던 후보가 목록에 슬그머니 추가되어 있곤 했으니까.
‘어쨌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라키엘은 시스템창을 열기로 결심했던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스킬 후보를 주시했다.
‘약초 탐색.’
지금은 긴뿌리 감초를 최대한 빠르게, 효율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러니 저 ‘약초 탐색’ 스킬이라면?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쏠쏠한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개방한 모든 스킬이 그랬으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유용한 옵션을 제공했으니까.
결심한 라키엘이 되뇌었다.
‘4번. 약초 탐색.’
긴뿌리 감초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과장 섞인 도시전설급 소문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인은 해봐야겠다. 그토록 매력적인 가능성을 그냥 포기하기엔 지금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니까.
딩동!
[목록 4번. 약초 탐색을 선택하셨습니다.]
[스킬 개방 (3회차) 비용 : 8,000 HP]
[스킬을 개방하시겠습니까?]
[YES / NO]
“…….”
무려 8천.
하지만 이미 각오했던 일이다. 마침 보유한 HP도 저걸 커버할 정도가 된다.
‘가즈아!’
고민은 짧고, 결단은 과감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YES’를 선택했다.
딩동!
[한국의 한의원을 운영하던 시기의 당신은, 인맥을 통해 알고 지내던 몇몇 심마니 지인들과 종종 산행을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 고인물 심마니 아재들의 어깨너머로 전수받은 지식과 경험이 당신의 피와 살 같은 지식으로 새겨졌습니다.]
[당신이 지닌 재능과 지식이 스킬로 변환됩니다.]
[<약초 탐색> 스킬이 개방됩니다.]
[스킬 개방 (3회차) 비용으로 8,000 HP가 소모됩니다.]
파앗!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800]
소중하게 모아두었던 HP가 쑴펑 깎여나가고 달랑 800만 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스킬명 : 약초 탐색 Lv.1]
[야생 약초의 탐색 / 채집에 버프를 받습니다. 스킬 발동 시, 주위 10미터 이내의 약초를 탐색하는 <심마니 모드>로 진입합니다. ‘심마니 모드’에서는 약초가 지닌 성격, 약효의 강도에 따라 주위의 약초가 색깔로 구분이 됩니다.]
[환자에게 유용한 약효를 지닌 약초는 형광성 연녹색으로 표시됩니다. 약초가 지닌 약효가 강력할수록 표시되는 색깔이 선명해집니다.]
[환자에게 유해한 독성을 지닌 독초는 형광성 붉은색으로 표시됩니다. 독초가 지닌 독성이 강력할수록 표시되는 색깔이 선명해집니다.]
베일을 벗은 약초 탐색 스킬의 내용을 살펴보는 순간.
‘미친, 대박.’
눈이 번쩍 뜨였다.
새로운 스킬을 활용할 방법이 대뇌피질 가득 빛의 속도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