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감초가 힘을 숨김 (3)
콰아앙!
맹렬한 타격감. 순간적인 충격에 휩싸여 크게 출렁이는 구렁이의 뒤통수. 이내 이쪽을 돌아보는 분노에 찬 눈길. 기간토피스의 냉혹한 야성이 넘실거리는 눈동자와 시선을 얽는 순간, 데미안 카이엔은 생각했다.
황태자, 당신이 틀렸다고.
“…….”
문득,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우린 이제부터 출발할 거니까, 넌 여기 남아서 아이한테 이걸 좀 먹여줘야겠다.’
……라고 황태자가 말했던가. 그러고선 자신과 아니스를 환자 곁에 남겨두고는 일행을 이끌고 황야로 떠났던가. 덕분에 자신은 황태자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던가.
‘난 간호사가 아닌데.’
당신의 호위인데.
언제나 당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당신의 숨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당신을 등 뒤에 두고서, 당신의 적과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사람.
그게 나여야 할 텐데.
한데 어째서 당신은 날 그렇게 대한 걸까.
‘내가 신뢰를 잃은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아니스와 함께 숙소에 남아 환자를 돌보았다. 백일해에 걸린 아이라고 했다. 아이에게 황태자가 준 탕약을 먹이고, 물수건을 갈아주며 곁을 지켰다. 그러는 내내 착잡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그 기분이란.
오전 내내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입을 열었다간 못난 불평이나 흘러나올 것 같아서였다. 한데 그런 이쪽의 마음을 헤아린 걸까. 수간호사 아니스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고 마음에 안 들면, 가보면 되잖아요?”
“……예?”
“가보라고요. 여긴 내가 도맡을 테니까.”
아니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카이엔 경이 여기 함께 있어봤자 나한테 별다른 도움이 안 되니까요. 당신, 간호사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전하 성격이 이상한 게 하루이틀이어야지.”
“…….”
“그냥 다녀와요. 전하나 일행 모르게. 다행히 전하께 아무 일이 없으면 당신은 먼저 돌아와서 종일 여기 있었던 체하면 되는 거고.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전하를 지켜주면 되는 거고.”
“아이한테 응급상황이 생기면 어떡합니까?”
“뭘 어떡해요. 여기 사람들한테 잠시 아이 맡겨두고 내가 전하한테 알리러 뛰어가야지.”
“…….”
“뭐해요? 출발 안 해요? 그렇게 우중충한 표정으로 간호하는 거 환자한테도 안 좋다니깐요?”
아니스의 닦달이 고마웠다.
그런 덕분이었다.
곧바로 숙소를 나섰다. 검을 챙기고, 황야로 나왔다. 황태자 일행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흙먼지와 붉은 깃발은 너무나 쉽게 눈에 띄었으니까.
그렇게 온종일 멀찍이서 일행과 함께 움직였다. 저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거리를 유지한 채였다. 그 사이, 해가 저물었다. 황태자 일행이 떠들썩해졌다. 뭔가를 찾은 걸까. 땅을 팠다. 그러다가…… 거대한 구렁이의 습격을 받는 모습이 보였다.
콰작!
……시이잇!
데미안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기간토피스의 뒤통수와 뒷덜미를 연달아 타격했다. 그때마다 금속성 마찰음과 불꽃이 튀었다.
그 모습을 보는 라키엘의 눈동자에서도 경악의 불똥이 팍팍 피어났다.
‘데미안이 왜, 여기서 나와?’
그는 깜짝 놀랐다.
20미터급 구렁이가 감행한 불의의 습격. 그 앞에 위기에 몰린 채 퇴각을 결정하던 자신이었다. 이제 다 끝났구나 싶었다. 긴뿌리 감초는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한데 그 순간, 숙소에 남겨둔 데미안 녀석이 튀어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자신이 숙소에 남으라고 명령했으니까. 그 명령을 대놓고 어길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저 명령 불복종이 너무나 반가웠다!
‘이 복덩이 같은 녀석!’
라키엘은 데미안을 숙소에 남겼던 자신의 판단이 실수였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한편으로는 데미안의 등장 덕분에 급변한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했다.
‘어쩌면 긴뿌리 감초 채집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의 눈길이 현장을 기민하게 훑었다. 그가 제일 먼저 눈길을 던진 곳은, 저 멀리 우루스가 날려간 자리였다.
서서히 걷히고 있는 흙먼지. 그 속에서 커다란 덩치가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흔드는 실루엣이 얼핏 보였다. 우루스였다.
‘역시.’
잠깐 타격을 받긴 했지만, 중상을 입지는 않은 듯했다. 충분히 그럴 거라고 보았다. 원래부터 튼튼한 황소니까. 고작(?) 100미터 정도를 날려갔다고 해서 엄살을 떨 녀석은 절대로 아니니까.
그러니까, 희망이 있다.
‘데미안은?’
라키엘은 데미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선 격렬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시이잇! 시잇!
거대 구렁이가 연식 쉭쉭거리며 섬뜩한 안광을 토해냈다. 고개를 흔들고, 꼬리로 공간을 헤집고 후려쳤다. 그때마다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인영이 경이로운 동작을 선보이며 모든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데미안이었다.
‘녀석, 설마 리베르사 심법을 쓰고 있는 건 아니겠지?’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소설 마검황에 나오는 최강, 최흉의 심법. 역혈의 신공 리베르사. 그걸 쓰면 안 된다. 녀석의 각성이 진행될 테니까.
그때였다.
카앙-!
급류처럼 미끄러져 움직인 데미안이 기간토피스의 몸통 아래로 접근했다. 상대적으로 연약한 배 부위에 검격을 먹이며 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녀석의 검격은 기간토피스의 비늘을 베어내지는 못했다. 단지 타격력만을 전달했을 뿐.
그걸 보자마자 라키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를 역행시키고 있진 않구나.’
만약 녀석이 리베르사 심법을 쓰는 상태였다면? 저런 거대 구렁이의 비늘 따위(?)는 버터처럼 썰려 나갔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즉, 심법을 쓰지 말라던 이쪽의 당부를 녀석이 잘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좋아. 그럼…….’
각이 나왔다.
이제는 반격의 시간이다.
우루스가 무력화가 됐던 잠깐의 시간. 그 위기의 타이밍을 데미안이 감당해주고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우루스가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때까지 데미안이 리베르사 심법을 일으키지 않고 버텨내면 된다.
그러자면…….
덥썩!
라키엘은 삽을 집어 들었다. 뛰었다. 기간토피스를 향해? 아니었다. 그가 달려간 곳은 기간토피스와 데미안이 혈투를 벌이는 반대 방향이었다.
그곳에 채집을 하다가 중단한 긴뿌리 감초가 있었다. 라키엘은 채집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삽을 번쩍 치켜들었다. 삽머리의 날카로운 끝을 감초 뿌리를 향해 겨누었다. 당장 삽을 내리칠 듯이. 한껏 위협적인 몸짓으로.
외쳤다.
“야아아! 뱀타아앙-!”
그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기간토피스는 반응이 없었다. 데미안과 격하게 쿵쿵쾅쾅 싸우느라 이쪽의 목소리가 닿지 않은 듯했다. 잠시 뻘쭘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좌우의 근위대와 특근대원들을 돌아보며 재빨리 명령했다.
“전원, 이제부터 내가 선창하면 그 내용을 그대로 복창한다. 최대한 우렁차게!”
“우렁차게!”
라키엘의 뜻을 깨달은 수행원단이 일제히 입을 모았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이 외치면, 근위대와 특근대원들의 허파가 맹렬하게 수축하며 60인분의 함성을 토해냈다.
“야아! 뱀타아앙!”
“야아아아아-! 뱀타아아아앙-!”
……멈칫!
데미안을 한입에 삼켜 보기 위해 미친 듯이 날뛰던 기간토피스의 움직임이 드디어, 처음으로 멈칫했다. 놈의 쭉 찢어진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라키엘이 삽을 치켜들었다.
“계속 까불면! 이거! 찍어 버린다!”
“계속 까물며어언-! 이거어-! 찍어 버린다아아악-!”
라키엘의 목소리가 60인분의 함성으로 증폭되었다. 기간토피스의 어그로(?)를 훌륭하게 끌어냈다. 덕분에 기간토피스가 라키엘의 몸짓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의 의도를 단박에 깨닫게 되었다.
……!
기간토피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저 인간이? 자신의 소중한 감초를? 진짜로? 진심? 믿기지가 않았다.
그 순간, 라키엘의 치켜 들렸던 삽이 아래로 세차게 움직였다. 감초 뿌리를 찍어 버리기 직전에 가까스로 멈추었다.
……시잇!
기간토피스가 기겁하며 움찔했다. 동시에 라키엘의 입꼬리에 사악한 미소가 배어났다.
‘역시!’
혹시나 했는데, 확실히 알겠다. 방금 이쪽이 건넨 협박에 대한 반응을 보니 제대로다. 저 거대한 구렁이 놈, 긴뿌리 감초를 애지중지하는 놈인 거다.
‘그래서 우리 일행을 습격한 거였구만.’
문득, 가끔 옛날이야기 등에 나오는 이무기라는 존재가 떠올랐다. 혹은 무협 소설에서 본 영물이라는 존재들도 떠올랐다.
‘딱 그런 거지. 영물들. 100년 묵은 복숭아니, 500년 묵은 산삼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먹으려고 그걸 지키는 존재. 하여간 이놈의 세상은 사람이나 몬스터나 건강식에 관심이 참 많아요.’
저 거대 구렁이도 그러하리라.
라키엘의 추측은 정확했다.
시이잇! 시잇!
기간토피스의 심장이 다급함의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날뛰었다. 1초마다 가슴이 16번씩 철렁철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긴뿌리 감초야말로, 자신이 평생을 지켜온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이었다.
시잇! 시이이이이잇!
절대로 안 된다. 저건 못 건드린다. 그러면 안 된다. 이제 3년. 딱 3년밖에 안 남았는데. 3년만 더 묵히면 100년을 채우게 되는데. 그때 저걸 먹어야 하는데. 그러면 자신은 한낱 거대 구렁이 몬스터가 아닌, 위대한 드래곤에 근접하는 존재로 탈바꿈할 수 있는데.
그런데! 감히!
“시아아아아아악!”
기간토피스가 포효하며 돌진했다. 자신의 소중한 긴뿌리 감초를 위협하는 라키엘을 향해서였다. 그러나 그 돌진은 금방 저지되고 말았다. 라키엘의 다시금 치켜든 삽에 의해서였다.
“어허!”
……덜컥!
“더 다가오면 진짜로 찍는다?”
“……!”
미치겠다.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시아아아아악-!”
돌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머뭇거릴 수도 없고. 내적 갈등과 멘탈 붕괴에 빠진 기간토피스가 제자리에서 안타까운 맴돌이를 하며 애꿎은 바위를 짓뭉갰다. 그 순간, 라키엘이 버럭 외쳤다.
“데미안! 우루스! 지금!”
“데미아아안-! 우루스으! 지그으음-!”
라키엘의 선창과 60인의 함성. 그 소리에 기간토피스가 주의를 빼앗기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놈의 뒤쪽에서 또 다른 포효가 맹렬하게 터졌다.
“누오오오오-!”
우루스가 뿔을 앞세우고 돌진했다. 기간토피스의 옆구리를 거세게 들이받았다. 깜짝 놀란 기간토피스가 반사적으로 우루스의 상체를 휘감았다. 그러나 우루스는 굴하지 않았다. 기간토피스를 위로 확 던지듯이 치켜들었다.
동시에 위쪽에서 데미안이 떨어져 내려왔다. 흑발 호위의 검이 서늘한 기세를 품고서 공간을 세로로 쪼갰다.
우루스가 위로 치켜드는 폭발적인 힘. 데미안이 아래로 내리 베는 예리한 기세. 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버린 기간토피스.
“……시이이잇!”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거대 구렁이의 단말마가 황야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 구렁이의 사체를 어떻게 처리하실 거냐는 근위대 조장의 물음에 라키엘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흐뭇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버리냐고? 미쳤어? 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