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백일해를 극복하는 법 (3)
당황스럽다.
매우 당황스럽다.
문득, 처음 허파에게서 따봉을 받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이렇게 당황스러웠다. 혹시 내가 홰까닥 미쳤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계속 살펴보니 아니었다. 그건 진짜 따봉이었고, 진짜 RP였다.
지금도 똑같다.
- $#^$#%……??
눈앞에 떠오르는 목소리. 아니, 흐릿하게 어른거리는 글자 비스므리한 이미지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라키엘은 믿기지가 않는 심정으로 손을 들었다. 제 양쪽 볼을 짝짝 소리 나게 때렸다.
찰싹찰싹!
“…….”
그런데도 여전히 눈앞에 흐릿흐릿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뭔가가 자꾸만 어른거렸다. 눈에 들어간 잡티? 아니었다. 단순히 잡티가 들어간 거라면, 긴뿌리 잡초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질 때만 뭔가가 눈앞에 떠오르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건…….’
라키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형상을 향해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자 어른거리던 형상의 형태가 조금씩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ㅇㅂㅇ??]
‘……이모티콘?’
도대체 왜, 긴뿌리 잡초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 앞에 난데없는 이모티콘이 보이는 걸까. 이모티콘이 마치 이쪽을 향해 말을 하듯이 방긋거리고 있는 걸까.
‘진맥.’
라키엘은 자신의 손목을 짚으며 스킬부터 발동했다. 이윽고 맑은 알림음과 함께 셀프 검진표가 떠올랐다.
딩동!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22세]
[신장 : 176.9 Cm]
[체중 : 59.7 Kg]
[혈액형 : Rh+ O]
오랜만에 보는 셀프 검진표가 주르륵 떠올랐다. 처음 셀프 진맥을 했던 시절보다 아주 약간은 멸치를 탈출한 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쪽의 종합소견을 재빠르게 훑었다.
[종합 소견 : 모든 항목에서 열악한 약골 신체입니다. 모든 장기의 기능이 허약하며, 나약한 면역력을 아스라한 심법의 마나 순환력으로 보완하며 버텨내는 중입니다. 매우 큰 주의를 요하는 보르데텔라 백일해균이 대량으로 증식하고 있습니다. 즉각적인 치료와 안정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
허약한 몸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백일해에 감염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렇다. 한데 종합소견 어느 부분을 살펴보아도 헛것이 보인다는 류의 언급은 없다.
그러니까, 긴뿌리 감초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이모티콘이 고열이나 피로 때문에 보이는 헛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대체 왜?’
이런 게 보이는 걸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딩동!
또다시 울리는 알림음.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며 답을 알려주는 메시지.
[당신은 온몸의 피로도를 갈아 넣는 수많은 노력과 실험 끝에 긴뿌리 감초가 지닌 대부분의 성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차원이 아닌, 치열한 노가다의 결과로 뼈에 새겨진 산물입니다.]
[또한, 당신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자신이 익힌 지식이 전부가 아니며, 때로는 환자와 약재의 성격에 따라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과 깨달음이 당신의 탕약 조제 스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탕약 조제 스킬에 새로운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③ : 약재 관심법 - 당신은 유연한 마음과 재빠른 눈치로 약재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모든 약재는 자신이 좋아하는 재료와 섞일 때, 부작용을 줄이고 약효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
라키엘은 눈을 끔벅거렸다.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미쳤다고.
‘이게 말이 돼?’
말도 안 된다.
약초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다니. 그 취향에 맞춰서 재료를 배합하면 부작용을 줄이고 약효의 시너지만 살린 탕약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니.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사기적인 능력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 봐도, 부릅뜨고 봐도, 심지어 뒤꿈치로 봐도 엄연한 실화였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긴뿌리 감초가 있었다.
[ㅇㅂㅇ!]
“…….”
긴뿌리 감초를 시야에 담자마자 증강현실처럼 떠오르는 이모티콘이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라키엘은 저 이모티콘의 생성 원리(?)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마나의 흐름이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긴뿌리 감초에 깃들어 있는 마나가 특정한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어. 그게 내가 지닌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보이는 것이고.’
경혈 스캐닝과 비슷한 원리였다. 그렇게 보니 이게 마냥 허황하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정기가 깃들어 있으니까. 사람이나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 또한 예외가 아니겠지.’
바로 그거다.
식물에도 마나가 깃들어 있다. 물론 이름 없는 잡초나 평범한 나무에 깃든 마나는 지극히 미약하겠지. 그러나…… 긴뿌리 감초 같은 영약 등급의 식물은?
‘보통의 식물보다 훨씬 고농축의 마나를 담고 있는 거야. 덕분에 이렇게 형태를 이룬 마나가 보이는 거고.’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이모티콘은 말 그대로 긴뿌리 감초가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마나의 배치를 조절하며 표현하는 일종의 표정 언어였다.
‘그렇다면…….’
라키엘은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긴뿌리 감초 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른 약재에 가까이 가져가 보았다. 맥문동을 향해서였다.
그러자…… 긴뿌리 감초의 이모티콘이 바뀌었다!
[(>ㅂ<)♡!!]
……좋다는 거겠지? 그럴 거야.
‘그럼 맥문동은 합격. 다음은…….’
긴뿌리 감초를 반하에 가까이 접근시켰다. 이번에도 이모티콘이 변했다.
[-_-]
“…….”
빛의 속도로 정색하는 긴뿌리 감초. 비로소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놈 이거, 감정 표현이 아주 확실하구만?’
그래도 이렇게 확실한 편이 낫다. 호불호 테스트를 제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테이블 위에 놓인 모든 약재에 긴뿌리 감초를 갖다 대었다. 그때마다 감초가 표현하는 이모티콘 표정을 보며 호불호를 파악했다.
덕분에 그는 총 12가지의 약재를 추려낼 수 있었다.
맥문동, 진피, 백출, 백복령, 소맥, 생강, 오매, 멥쌀, 황련, 갈근, 전호, 대황까지. 전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조합의 약재들이었다.
“…….”
이거, 괜찮을까.
배웠던 상식과 조금 다른 조합을 보자니 잠깐 망설임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긴뿌리 감초도 내가 배운 적 없는 약재야. 그러니 내 기존의 지식에만 끼워 맞추듯이 긴뿌리 감초를 다루면 실패할 수밖에 없어.’
이미 150번 넘게 실패한 실험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굳은 마음을 먹고서 신중하게 배합의 비율을 조정했다. 약재의 투입 순서 또한 긴뿌리 감초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그리고 물을 올렸다.
……보글보글!
이윽고 끓기 시작하는 맑은 물.
그 속에 미리 손질한 긴뿌리 감초 조각과 나머지 약재를 차례로 투입했다. 탕약의 색깔이 변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면밀하게 살피며 불의 세기를 조절했다. 한편으로는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성공해라.’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기회. 놓치기 싫었다. 해내고 싶었다. 오직 그러한 마음으로 불 앞을 지켰다. 은근한 불에 달여지는 탕약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탕약을 달인다 함은, 정상인 몸 상태에서도 지극한 정성과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하물며 백일해 감염 초기의 증상을 보이는 몸으로는 버티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쿨룩! 콜록!”
가까스로 억눌러놓았던 기침이 기어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동안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 압박감까지. 그 모든 것들이 무거운 쇳덩이처럼 온몸을 짓눌러 왔다.
그때마다 짓눌린 몸에서 쥐어짜는 듯한 기침이 새어나왔다. 고통스러웠다. 목구멍이 갈래갈래 찢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기는 싫었다.
거듭 냉수를 마셨다. 아스라한 심법을 동원했다. 몰려오는 고열과 혼미한 정신 속에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주먹으로 제 허벅다리를 두드리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버티려 애를 썼다.
그때마다 몸이 허물어졌다. 매 순간마다 눈꺼풀이 무너졌다. 일분일초마다 정신이 아득해지기를 반복했다. 만약, 오장육부의 성원이 아니었다면 진즉 쓰러졌을지도 모를 순간들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정신력과 근성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심장 : 몸뚱이? 끝까지 포기 안 하려는 거야? 진심으로? 믿어봐도 돼?]
[허파 : 허어…… 파하…… ㅠㅠ]
[대장 : 형님들, 우리라도 믿어보지 말입니다 ㅠㅠ]
[간장 : 으으, 힘들어 죽겠…… 아니지, 이런 소리 하면 부정 탄다. 안 돼. 몸뚱이도 우리 다 같이 살아보자고 이렇게 애쓰는데.]
[위장 : 돈까스 먹자고 떼 안 쓸게. 몸뚱이 힘내라 꼭.]
[콩팥 : 그래. 우리도 응원한다고!]
[오장육부가 당신의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최후의 힘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오장육부가 모두의 생존을 염원하며 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800]
귓가를 아스라이 매만지는 목소리들. 가슴이 뛰고, 숨결이 차오르고, 뱃속에 힘이 깃들었다.
딩동!
[응원의 효과를 체감한 오장육부가 더욱 힘을 냅니다!]
[심장 : 모두 외치자! 영차! 영차!]
[허파 : 여헝……! 프하아!]
[대장 : 우리는! 산다! 꼭! 해낸다!]
[간장 : 우리는! 반드시! 늙어서! 죽는다!]
[위장 : 오래오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콩팥 : 평범하게 주름살 생기고! 머리도 하얗게 세고!]
[심장 : 할 수 있다아아-! 우리도 늙어보자!]
[오장육부가 힘찬 함성을 내지릅니다.]
[오장육부의 마음이 당신의 전신 세포를 뒤흔듭니다.]
[오장육부가 열렬한 소망을 담아 500 HP를 추가로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300]
‘……그래.’
할 수 있다.
해내고 싶다.
늙는다는 것.
누군가에겐 그저 꺼려지고 싫은 일이겠지. 하지만 죽도록 아픈 사람에겐 그것만큼 절실한 소망이 또 있을까. 평범하게 나이를 먹어가고, 늙어가고, 소박한 촛불처럼 가족의 품에서 서서히 저물며 마무리하는 인생.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언젠가 먼 훗날에 자식과 손자들을 앉혀두고서 그렇게 눈을 감고 싶다. 더 나이를 먹고 싶다. 늙어보고 싶다. 해마다 불편해지는 허리와 무릎을 두드리며 투덜거려보고 싶다.
그렇듯, 평범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모두의 진심이 담긴 응원을 받으며 끝까지 눈을 부릅떴다. 달여지는 탕약의 냄새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수십 차례씩 고개 흔들어 의식의 마지막 끈을 붙들었다. 매달렸다. 장장 다섯 시간을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딩동!
[새로운 탕약이 완성되었습니다.]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을 감지하였습니다.]
[탕약 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운명을 확인할 순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