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소중한 보상 (1)
삭풍이 분다.
불어온 삭풍이 판막을 뒤흔든다.
그 가슴 시린 떨림 속에서 심장은 고개를 들었다. 반쯤 허물어진 성벽 위에 도도히 군림한 채, 아래를 굽어보았다.
다시금 불어오는 서늘한 눈보라. 희뿌연 절망의 군대가 성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보르데텔라 백일해균의 군세가 모든 땅을 뒤덮고 있었다. 최후의 보루인 이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마침내 생명의 마지막 조각을 침탈하기 위하여.
‘그렇게 둘 수는.’
절대로 없다.
심장은 비장한 마음으로 검자루를 거머쥐었다. 그런 이쪽의 각오를 읽은 것일까. 지금껏 말없이 곁을 지켜왔던 부관, 허파가 헛기침을 했다.
“허픕! 흐픕!”
“아직도 숨이 차는가, 나의 부관이여.”
“……허퍽! 흐퍽!”
“괜찮다. 굳이 말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대의 각오 또한 알고 있으니. 모든 제군이 나와 같은 심정일 터.”
심장이 되뇌는 순간이었다. 백일해의 군대가 성벽에 부딪혀 왔다.
- 투쾅!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던 성문이 위태롭게 온몸을 떨었다. 심장이 외쳤다. 쏴라! 그를 따르는 모든 장기와 세포들이 노호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승리에의 집념이자, 생존에의 굳은 항거였다.
혈투가 벌어졌다. 마침내 성문이 뚫렸다. 허물어지는 방어진의 선봉에서 심장은 격한 포효를 내질렀다. 수없이 적의 목을 베고, 머리통을 쪼개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적의 수는 너무나 많았고, 그 기세 또한 더없이 맹렬하였다.
‘이제 더는…….’
감당치 못하리라.
심장의 가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한데 그때였다.
……콰아아-!
성벽 주위의 새하얀 설산 너머에서부터, 강력하고도 신비로운 물결이 성을 향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심장도, 백일해도, 전장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사태였다. 이내 심장은 깨달았다.
‘지원군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종류의 탕약이 체내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냉혹한 설산의 눈을 녹이고, 무너진 성벽을 타고넘어, 백일해의 군대를 급류처럼 휩쓸었다.
그 속에서 심장이 포효했다. 허파가 노호성을 내질렀다. 모든 장기와 세포들이 기사회생의 함성을 토해내며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다.
반격의 서막이었다.
♣
‘……라는 내용의 개꿈을 방금 꾼 것 같은데.’
라키엘은 실눈을 살콤 떴다. 그러자마자 눈꺼풀을 비집듯 뚫고 들어오는 햇볕. 눈이 부셨다. 대낮인 걸까. 멍한 가운데 생각했다.
‘그나저나, 내가 왜 잠들어 있었지?’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자신의 마지막 기억에 새겨진 장소는 상단 건물의 주방이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탕약 연구에 매진했다. 어찌하다 보니 탕약 조제 스킬의 새로운 옵션을 얻었다. 약재의 감정을 엿볼 수 있는 기이한 옵션이었다.
덕분에 긴뿌리 감초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긴뿌리 감초가 원하는 레시피를 만들고, 탕약을 달였다. 거의 5시간을 버티고, 또 버텼다. 물론 힘들었다. 백일해 감염 초기의 전형적인 증상이 팍팍 올라왔으니까. 열마저도 펄펄 끓었으니까.
솔직히 까무러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끝끝내 탕약을 완전히 우려냈다. 식혔다. 그러자 탕약 조제 스킬이 셀프로 조제된 탕약을 자동으로 감지했다. 성분 분석 결과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런데, 기억이 딱 거기까지다.
“…….”
설마 나는 성분 분석 결과를 보기 직전에 기절한 걸까. 아닌데. 그 후에 뭐라고 더 외친 거 같기도 한데.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떠오르는 게 딱히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을 되살리려 애쓸수록 머리가 지끈지끈. 이윽고 라키엘은 멍한 상태를 완전히 벗어났다. 눈을 온전히 뜰 수도 있었다. 덕분에 이쪽을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과 마주치게 되었다.
“……전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응, 쟈빌론.”
“전하?”
“아닌가? 우루스인가?”
“……전하.”
“쩝. 농담이 안 통하는구만.”
“눈을 뜨시자마자 농부터 꺼내시는 걸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제야 데미안 녀석이 안심한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녀석은 줄곧 내 곁을 지켜준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지?”
데미안에게 물었다.
녀석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큰일이 나실 뻔했습니다. 이틀간 내내 누워만 계셨으니까 말입니다.”
“……이틀이나? 내가?”
“예. 혹시 기억이 안 나십니까?”
“으음, 전혀.”
“이틀 전의 그날 말입니다. 주방 문을 걸어 잠그고 안쪽에서 탕약을 달이던 전하께서 돌연 저를 소리쳐 부르셨습니다.”
“…….”
뭐라고 외친 거 같던 기억이 맞았구나. 그런데 그 뒤론 어떻게 된 걸까. 의문은 데미안의 설명을 들으며 걷어낼 수 있었다.
“사실 그때 저는 이미 전하께서 격한 기침을 토하며 쓰러지시던 기척을 모두 들었습니다. 하여 전하께서 소리를 치실 때는 일찌감치 문을 단숨에 부수고 있던 때였지요. 덕분에 저는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발견? 뭘?”
“전하께서 바닥에 주저앉아 거의 혼절하기 직전의 상태에서 탕약 그릇을 들고 계시더군요. 절대로 쏟으면 안 된다는 듯이 소중하게,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얼른 뛰어가서 탕약 그릇부터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전하께서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시며 당부하셨습니다. 마침내 해냈다고 말입니다.”
“……해냈다고?”
“예. 마침내 만들어냈노라고, 백일해를 효과적으로 치료하고 폐부의 기능을 회복하면서 부작용은 최소한으로 억제할 탕약이 만들어졌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뭐라고 했을까.
“당장 이 탕약을 네일라에게, 아이에게 가져가서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말까지 꺼내시고는 그대로 혼절하셨지요.”
“…….”
비로소 어렴풋이 떠올랐다.
기절하기 직전, 그 순간 눈앞에 떠올랐던 메시지. 탕약 조제 스킬의 결과. 새로운 탕약의 내용을 보며 느꼈던 환희까지. 그리고 심장을 비롯한 오장육부가 외치던 함성까지.
[오장육부가 당신의 성과에 감격하며 함성을 내지릅니다.]
[심장 : 우워어어어어억! 해냈다아!]
[허파 : 흐…… 프흐흐흑……!]
[대장 : 형님들 저 지릴 거 같지 말입니다!]
[간장 : 아서라 남자는 함부로 우는 게 아닌 법.]
[위장 : 그런데 왜 질질 짜고 있음?]
[콩팥 : 아 우는 거 아니라고ㅋㅋㅋ 눈물샘 삑사리 난 거라고 아ㅋㅋㅋ]
[오장육부가 생존의 희망을 느끼며 환호합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기쁨 가득 담긴 7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3,000]
“…….”
그랬다.
탕약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자신이 바라고 또 바라던, 이상적인 백일해 치료제 그 자체였다. 그것까지 확인을 한 뒤에 완전히 혼절했다. 그리고 지금 일어났다.
한데…….
“왜 내가 멀쩡한 거지?”
라키엘은 데미안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깨어나기 직전에 꾸던 꿈이 떠올랐다. 백일해와 절망적인 전투를 벌이던 심장과 오장육부. 그러던 중에 몰려오던 지원군. 새로운 탕약이 왔다고 외치던 심장의 노호성까지.
설마 그거.
“아이에게 먹이라 했던 탕약을 나한테 먹인 건 아니겠지?”
덜컥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아닙니다. 아이는 무사합니다. 전하께서 건네주신 탕약을 먹고 안정을 취하니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더군요.”
“그래?”
그건 다행이긴 한데.
“그럼 나는 어떻게?”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탕약은 한 첩이 전부였다. 그걸 아이에게 먹였다면, 이쪽은 여전히 백일해에 시달리며 기침의 지옥에 빠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니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는 아무리 봐도 백일해에 시달리며 중태에 빠진 사람의 것이 아니다. 기침이 나오지가 않았다. 몸에 기력은 다소 없을지언정, 미열은 남았을지언정, 죽을 정도로 괴롭지도 않았다.
그 답은 데미안의 대답에 있었다.
“똑같은 탕약을 추가로 달였습니다. 마침 전하께서 연구를 진행하며 남기신 기록이 있더군요.”
“…….”
그랬다.
모든 실험마다 내용을 꼼꼼히 기록해두었더랬다. 마지막에 혼신의 기력으로 달였던 탕약 또한 마찬가지였다. 들어간 약재의 배합, 달이는 방법과 시간까지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한데 단지, 그 레시피만으로 탕약을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어떻게?”
“아니스 양의 활약이 컸습니다. 전하께서 달이신 탕약을 아이에게 먹인 이가 아니스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설마.”
“예, 맞습니다. 아니스 양은 후각이 매우 뛰어나니까요.”
“아이에게 탕약을 먹이면서, 그 짧은 순간에 탕약의 냄새를 정확하게 기억해둔 건가.”
“예. 덕분에 몇 번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전하의 것과 거의 똑같은 탕약을 달여낼 수 있었습니다. 그걸 전하께 먹여드렸고 말입니다.”
“…….”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스스로 진맥을 해보니 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딩동!
[종합 소견 : 모든 항목에서 열악한 약골 신체입니다. 모든 장기의 기능이 허약하며, 나약한 면역력을 아스라한 심법의 마나 순환력으로 보완하며 버텨내는 중입니다. 최근 보르데텔라 백일해균에 감염되어 중태에 빠졌으나, 매우 적절한 치료제의 도움으로 병마의 그림자가 대부분 걷혔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신체적 후유증이 남아 있습니다. 가급적 안정을 취할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진맥 결과로 뜨는 종합 소견이 알려주었다. 적절한 치료제 덕분에 백일해를 극복하고 고비를 넘겼노라고.
‘그럼 아이도 비슷한 걸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라키엘은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신발을 신었다.
“전하?”
데미안 녀석의 당황한 목소리. 녀석에게 쓴웃음을 돌려주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잖나. 환자가 있는데.”
“하지만…….”
“잠깐이면 돼.”
그냥은 못 누워 있겠다. 그 아이는 내 환자니까. 환자의 상태를 직접 보기 전에는 불안해서 편히 쉬지를 못하겠다. 그러니까 직접 가봐야겠다.
라키엘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었다. 데미안 녀석의 부축에 의지하고서 방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쳐, 이쪽을 보며 놀라 인사를 올리는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아이의 방으로 건너갔다.
그곳에 네일라의 처음 보는 모습이 있었다. 네일라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황량하기 짝이 없는 뒤뜰의 광경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두 발로 서서, 두 손으로 창틀을 짚고서.
“좀 어떠니?”
아이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하지만 아이는 이쪽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제법 야윈 옆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제대로 깨어 있는 모습은 처음이구나 싶었다. 조금은 슬픔에 젖어 있는 표정도. 이내 어색하나마 미소를 그리는 입매도. 여전히 뒤뜰만 바라보며 조곤조곤 건네어 오는 되뇜 또한, 그랬다.
“뒤뜰에서 외할아버지랑 자주 놀았어요. 저기, 저쪽에서. 외할아버지가 상단 일을 마치고 오셨을 때마다요.”
“…….”
이럴 때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혹여나 아이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찾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래서 아이를 달랠 말을 미리 생각해두긴 했는데.
괜찮다고. 외할아버지는 건강해진 네일라의 모습에 기뻐하실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아이의 착 가라앉은 눈빛을 보자니, 도저히 그런 말들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라키엘은 그저 말없이 아이의 어깨를 감쌌다. 아이도 이쪽으로 몸을 기대어 왔다. 같은 병마에 시달린 이들의 체온. 더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딩동.
이내 눈앞 가득 떠오르는 아이의 완치 알림과 보상 메시지. 그러나 이번만큼은 메시지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그렇게 오후 내내 아이와 나란히 기대어 고요한 추모의 시간을 보냈다. 노을이 질 무렵, 아이가 기댄 셔츠 옷자락 한쪽이 젖어 왔다. 그때까지 아이는 눈가를 훔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