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소중한 보상 (3)
또다.
또 황태자가 뭔가를 꾸미려 한다.
‘이번엔 뭘까, 대체.’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 3호 요원은 내심 마른침을 꿀꺼덕 삼켰다. 그리고 잠시 주위를 살폈다. 혹시 누군가가 자신의 기척을 감지하진 않았을까. 지금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오크 족장의 감각이 예상보다 민감한 건 아닐까.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여전히 자신의 은신을 알아차린 이는 없다.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황태자의 호위인 데미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괜찮다. 오늘의 관찰 임무도 안전하다.
지붕 아래쪽에서는 여전히 황태자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봐, 족장? 혹시 말이야. 꿀 빠는 농장 비즈니스 하나쯤 맡아볼 생각 없어?”
“…….”
저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3호 요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또 이곳 도시의 사람들을 위한 뭔가를 하려는 걸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지금까지 황태자가 줄곧 보인 행보를 돌이켜보자면 충분히 그럴듯했다. 황도에서 별궁 한의원을 열어서 사람들을 무상으로 치료해 주었듯이, 여기서도 임시 의료원을 열어서 아이들을 치료했으니까.
그럼에도 어떠한 대가나 보상도 챙겨 받지 않은 황태자였다. 실로 감탄이 나왔다. 자신이 관찰하는 황태자가 이런 인격자일 줄은 몰랐다. 마젠타노 황가의 역대 황족 중에 과연 저런 인물이 있었던가 싶을 지경이었다.
‘가장 위대한 지배자이자 성군이라 불리는 샤를로트 여제도 저 정도는 아니셨을 거야.’
보면 볼수록 자연스럽게 존경심이 쑴펑쑴펑 솟구쳤다. 물론, 훈훈해지는 가슴과 별개로, 냉철한 머리 한쪽에서는 의아함 또한 들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가 예전과 너무나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심할 정도로, 극적으로.
‘전엔…… 시종과 시녀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 하루의 유일한 행동일 지경이었는데 말이지.’
정말로 그랬다. 불과 1년 하고 조금 더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는 온종일 병상에 누워 골골거리던 신세였다. 그러다가 조금만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시종과 시녀들에게 끔찍할 정도로 히스테리를 부리곤 했다.
한데 갑자기 달라졌다. 하루아침에 싹 바뀌었다. 보는 사람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의심이 아주 가끔씩, 고개를 치켜드는 것은.
‘……과연, 같은 사람이 맞을까?’
또다.
또 이런 생각이다.
3호 요원은 내심 당황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은 보고 들은 것을 상부에 보고하는 사람이지, 스스로 판단을 하면 안 되는 이다. 그러니 일에 감정이나 사견을 담으면 안 된다.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마음도, 이성적으로 의심하는 마음도, 모두 그렇다.
그러니…….
‘내 걱정이나 하자, 후우.’
결혼기념일을 코앞에 두고 이렇게 장기 출장을 나오고 말았다. 출장 소식을 알리던 저녁의 와이프의 눈빛과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사실은 황태자를 관찰하여 황제한테 직통으로 보고하는 특수 정보조직의 요원이야’라고 사실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애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내는 자신을 평범한 황실 말단 공무원으로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그 비밀은 무덤까지 지켜나가야 할 테지. 그러니 이번 출장이 끝나고 돌아가면 한동안 끔찍한 바가지에 시달려야 할 테지.
‘어휴. 그 생각은 하지 말자.’
3호 요원은 잠시 떠오르는 비애감(?)을 털어냈다. 그리고 문득, 얼마 전에 상부로부터 입수한 정보 하나를 떠올렸다.
앙부아즈의 반란군 사령관, 쟈빌론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작자가 기어이 마법 실험실에서 탈출했다지? 탈출에 성공하는 순간에도 ‘리한 군의과아아안-!’이라고 악에 받쳐서 외치며 어딘가로 달려갔다던데. 설마 여기까지 황태자를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진 않을 거다. 그런 일이 실현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감히 생겨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계속 임무에만 집중하자. 황태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계속해서 관찰하자. 그래야 장기 출장 수당이 제대로 나올 테니까. 집에 돌아가는 날에 와이프의 바가지를 무마할, 뒤늦은 결혼기념일 선물을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때였다.
황태자의 이어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농장이냐고? 그건 바로…….”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 3호 요원은 팝콘을 씹는 기분으로 귀를 더욱 쫑긋 기울였다.
♣
“그건 바로…….”
“바로, 꾸익?”
“긴뿌리 감초 농장이지.”
뻥, 하고 터지는 팝콘처럼 휘둥그레지는 오크 족장 브라쉬의 눈매. 그 부리부리한 눈을 흡족하게 마주 보며 라키엘이 말했다.
“얼마 전에 우리가 함께 채집했던 긴뿌리 감초 있잖아. 그거, 뿌리에 잔털이 굵직하게 좀 많더라고? 당연히 그걸 헛되이 버릴 수는 없지 않겠어? 심어서 키워야지. 새 긴뿌리 감초로 자라나도록.”
“하지만, 꾸익!”
“하지만 뭐?”
“잔뿌리 그거 맛있습니다, 꾸익!”
“맛있어도 안 돼.”
“세상에 없는 별미라고 했습니다, 꾸익!”
“응.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그럼 안 먹어도 미련 없겠지?”
“…….”
“어쨌건 잔뿌리를 골라내서 심을 거야. 산삼 묘근으로 장뇌삼을 만들듯이.”
“장뇌삼이…… 뭡니까, 꾸익?”
“그런 게 있어. 야생에서 자라는 산삼 씨앗이나 묘근을 의도적으로 심어서 키운 거.”
라키엘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실이었다.
실제로 장뇌삼을 키우는 분들이 쓰는 방법이 그러했다. ‘심봤다!’를 외치며 채집한 산삼의 씨앗을, 터를 고른 산자락에 심는 분들이 제법 있었다. 터의 잡초 등등을 제거하고 정리한 후에, 산삼이 잘 자라는 적당히 그늘진 환경에서 씨앗이나 묘근을 심곤 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정성 들여 산삼을 키웠다.
“그걸 세상 사람들은 장뇌삼이라고 부르지. 실제로 산삼보다 효능이 많이 떨어지지는 않으면서, 의도적으로 양산해서 키워 팔 수 있으니 파는 쪽도 이득이 되고.”
그러하다. 그것이 바로 양산화의 장점이자 특징이다.
산삼과 장뇌삼의 관계가 딱 그렇다. 혹은, 모터쇼에 출품되는 콘셉트카와 그걸 베이스로 제작되어 본격 판매되는 양산차의 경우가 그렇다.
산삼과 장뇌삼.
콘셉트카와 양산차.
그것이 바로 긴뿌리 감초를 채집하던 순간부터 떠올리고 키워온, 이번 계획의 모티브였다.
“마침 긴뿌리 감초에도 묘근으로 쓰일 잔뿌리가 많이 있으니까 그걸 키워보면 좋겠지. 가능하다면 본격적으로. 대량으로 양산을 해서, 야생종보다 생장과 발육이 더 빠르도록 키우면 더 좋을 거고.”
성공만 한다면? 원래의 순수 야생종보다는 약효가 다소 떨어지지만, 일반적인 보통 감초보다는 훨씬 우월한 상위호환의 감초를 꾸준히,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별궁 한의원에서 제조되는 탕약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업그레이드가 되는 셈이다.
‘그럼 환자의 완치율도 올라가겠지. 천일건강탕을 만들면서 느낀 바로는 긴뿌리 감초의 가장 주요한 성분과 효능이 항균, 항생 작용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천연 항생제나 마찬가지니까.’
페니실린을 대체할 항생제의 지속적인 확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당연했다.
인류 의학의 발전은 페니실린, 항생제의 발견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니까.
‘실제 페니실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유사품 정도의 역할은 어느 정도 해줄 수 있을 거야. 그거면 돼. 그것만으로도 예전엔 못 살리던 환자를 절반 이상은 살릴 수 있을 테니.’
행복한 상상의 나래가 제멋대로 김칫국을 연달아 퍼마셨다.
한데 그때였다.
“꾸익?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꾸익.”
족장 브라쉬가 커다란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툭, 덧붙였다.
“긴뿌리 감초는 수백 년에 걸쳐서 뿌리에 양분을 저장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농장에서 키워서 수확하려다간 농부들이 먼저 늙어 죽을 거 같습니다, 꾸익.”
“뭐, 아무래도 그렇겠지.”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브라쉬가 걱정하는 바가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농장의 장점이 무엇이겠는가.
“성장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면 돼. 토양과 온도, 영양까지 전부 딱 맞춰 주면 야생종보다 훨씬 빠르게 자랄 거야. 게다가 야생종만큼 양분이 저장되기까지 기다릴 생각도 없고. 적당히 약효를 볼 정도만 키우면 바로 수확할 거니까.”
실제로 장뇌삼도 비슷했다.
원래 산삼의 씨앗은 생으로 파종을 하면 싹이 트는 데에만 무려 2년이 걸리곤 했다. 그래서 장뇌삼을 키우는 분들은 종자를 채취하는 즉시 과육을 제거하여 깨끗한 물에 씻고 정선하는 등의 ‘개갑’이라는 과정을 거치곤 했다.
그러면 2년이고 뭐고 없이 그냥 물속에서 다이렉트로 씨앗이 발아되어 버린다. 그걸 그대로 땅에 심는 것만으로도 2년이라는 시간을 앞당겨 절약하는 셈이다.
긴뿌리 감초 재배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장뇌삼 심마니 아재들이 쓰는 방법을 응용하면 할 수 있어. 일단 긴뿌리 감초의 잔뿌리가 제법 많으니까, 그것들로 생장 실험부터 해보는 거야.’
라키엘은 확신을 품고서 족장 브라쉬를 돌아보았다.
“그러니 농장 설립, 그대에게 맡겨보고 싶은데.”
“저 말입니까, 꾸익?”
“어. 내가 직접 할 수는 없잖아. 언제까지고 여기 계속 머무르지도 않을 건데.”
“하지만 인간의 황태자께서는…… 꾸익.”
“전사로 인정받지 못했지. 알아. 그래서 사업체를 꾸리지 못한다는 뜻이겠지?”
“물론…….”
“그래서 네일라를 대리인으로 내세울 거다.”
“…….”
“전사로 인정받은 툴룬 상단장의 혈육인 네일라라면 그대 오크들의 영역인 이곳에서 사업체를 꾸려나갈 자격이 있겠지. 그러니 그 아이를 이곳에 세울 농장의 현지 법인 대표로 내세울 거야. 어떤가.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
“이봐?”
“예, 꾸익!”
“내가 한 말을 알아는 들었나?”
“……예, 꾸익!”
“쯧. 하나도 못 알아들었구만.”
“…….”
“자, 그럼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지. 이제부터 잘 들어봐.”
라키엘이 종이와 깃털 펜을 착착 꺼냈다. 오크 족장 브라쉬의 얼굴 가득, 미분 적분 수업을 덜컥 받게 된 유치원생의 표정이 내걸렸다.
♣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긴뿌리 감초 농장 운영을 위한 현지 법인 설립이 추진되었다. 물론 라키엘은 복잡한 행정 서류 업무는 모조리 근위대 지휘관에게 맡겼다. 교양 넘치는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졸지에 서류 더미에 파묻히게 된 근위대 지휘관이 울상이 되었다.
그 사이, 라키엘은 화분 수십 개를 놓고서 실험을 시작했다. 긴뿌리 감초의 잔뿌리를 묘근으로 삼아 화분에 심었다. 각각의 화분의 생장 조건을 모두 다르게 하였다.
10가지 종류의 토양을 수집하여 배합을 다양하게 나누었다. 투입하는 영양과 물, 일조량, 온도와 습도도 모두 다르게 하였다.
그리고 생장 과정을 지켜보았다.
‘저 중에 빠르게 자라는 놈이 있겠지!’
……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허탕이었다.
8일이 지나는 동안, 어떤 화분의 묘근도 싹을 틔우지 않았다.
‘어째서?’
당황스러웠다.
다시 실험을 반복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화분의 긴뿌리 감초 묘근이 마치 짜고서 파업이라도 한 듯, 어떤 녀석도 싹을 틔울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연 라키엘의 미간 주름이 종일 힘차게 찡그려졌다.
‘왜지? 뭔가 생장을 위한 특별한 영양이나 조건이 필요한 건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어떤 조건이 필요한 건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고민이 깊어졌다. 그 끝에 결론이 나왔다. 식물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식물 덕후는…… 엘프지!’
덕후를 넘어선 광적인 식물 애호가. 마침 그런 엘프 하나가 아직 황도의 별궁에 식객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엘프족의 집행자, 실비아였다.
“데미안? 당장 전서구 띄워.”
별궁으로 전서구를 날렸다. 실비아에게 보내는 서신을 담았다. 물론 그녀가 눈이 뒤집혀서 이곳으로 뛰어올 만한 내용을 낭낭하게 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실비아 양? 당신 나이보다 더 연식이 오래된 초 희귀 식물이 발견됐는데, 구경 한번 오실래요?
추신) 한 달 안에 안 오시면 이거 데쳐서 밥에 비벼 먹을 예정임.
……이라는 내용이었다.
보내놓고 보니 국밥처럼 든든(?)했다. 이건 무조건 온다. 확신을 품고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며 긴뿌리 감초 생장 실험에 매진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열흘의 시간이 잘도 흘렀다. 한편으로는 임시 의료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진료했다. 풍토병이나 다름없던 백일해의 뿌리가 팍팍 뽑혀 나갔다.
덕분에 변방 도시 크라노스의 외곽에 자리한 어느 동굴에서는, 한 네크로맨서가 영혼의 뿌리까지 착잡해지는 초조함과 당혹감에 젖어들게 되었다.
“……왜? 어째서? 요즘 크라노스에서 기침병으로 죽는 사람이…… 확 줄어든 거지? 이러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