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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193화 (193/468)

193화. 망자의 속사정 (2)

30분 전.

변방 도시 크라노스의 외곽. 드넓은 황무지 으슥한 구석에 자리한 동굴 안쪽에서, 네크로맨서 카르투는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으으음.’

보인다.

마나의 집중과 연결. 위대한 흑마술이 선사하는 선물. 자신의 피조물과의 감각의 공유.

덕분에 그는 좀비와 완전히 감각이 연결되었다. 아까 거적과 낡은 모자를 씌워서 은신처 밖으로 내보낸 좀비였다. 온종일 크라노스로 걸어가게 하였다. 한밤의 으슥한 시간을 골라 도시로 침투시켰다.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좀비를 조종했다. 사람들의 눈길이 뜸한 새벽 무렵, 광장 어름에 자리를 잡게 했다. 길가 구석에 널브러지듯 앉혔다. 도시를 둘러보는 와중에 운 좋게 챙긴 찌그러진 깡통과 동전 두 닢도 앞에 세웠다.

완벽했다.

‘이건 누가 봐도 평범하고도 정석적인 걸인의 모습이야.’

카르투는 자신이 연출해낸 좀비의 모습에 크게 만족했다. 너무나 전형적인 걸인의 모습이었다. 길가 구석에 널브러지듯 앉은 자세와 각도, 성의 없게 덮어쓴 거적, 비뚤하게 푹 눌러쓴 낡은 모자까지.

심지어 이 좀비는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선한(?) 놈이었다. 덕분에 좀비에게서 나는 특유의 지독한 시취도 거의 없었다. 물론 약간의 악취야 나긴 했지만, 그 정도 냄새쯤은 걸인의 정도를 걷는 이에겐 기본 소양이 아니겠는가.

어쨌건, 덕분에 침투를 무사히 마쳤다. 그때부터였다. 카르투는 걸인으로 위장시킨 좀비의 눈과 귀를 활짝 열었다.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려 노력했다.

온갖 수다와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귓가를 콕콕 찔러왔다.

누구누구네 아들이 사고를 쳤고. 그런데도 뻔뻔하게 굴어서 어른들이 혀를 내두르며 둘의 결혼을 허락하고야 말았고.

어떤 집의 암소가 송아지를 두 마리나 낳아서 경사가 났고. 잔치가 열린 와중에 술에 취한 아무개가 암소 꼬리에 불을 붙이려다가 뒷발에 차였고. 결국엔 임시 의료원으로 실려가 황태자 전하께 치료를 받았고 등등.

‘……황태자?’

카르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태자라니. 임시 의료원이라니. 이런 곳에서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단어의 조합이고, 내용이었다.

‘어째서 황태자가 이런 곳에?’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곳 크라노스는 변경 중에서도 변경이다. 얼마나 외진 곳이냐면, 아예 오크족 자치령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마젠타노 제국 황실의 간접적인 지배만을 받는 지역이란 뜻이었다.

그런 이곳에 황태자가 올 일이 있을까. 아니, 황태자는커녕 역대 황실의 어떤 황족조차도 온 적이 없는 곳이 이곳이었다.

‘게다가…… 임시 의료원?’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의료원이었다. 물론 소문으로야 황태자가 기괴한 취미를 지니게 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했다. 병원 놀이 비슷한 것을 한다고 하였던가.

‘한데 그걸, 이런 변경에 와서까지? 굳이?’

혹시 미친 걸까.

그래서 기행을 벌이는 걸까.

카르투는 호기심을 느끼며 좀비와 연결된 청각에 더욱 집중했다. 덕분에 들려오는 다음 내용에 경악해야 했다.

“그래서, 그 술 취한 바보는 어떻게 됐답니까? 황태자께서 그 바보도 치료를 해주셨습니까?”

“물론이죠. 전하께서는 못 고치는 병이 없다잖아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우리 아이도 전하께서 고쳐주셨는걸요.”

길가에서 청년과 아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청년이 물었다.

“엇, 부인의 아드님도 전하께 갔었습니까?”

“네에. 그날은 뭐랄까. 사실 저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우리 아이 기침이 도저히 멎을 생각을 하질 않아서. 얼굴에 열꽃이 피더니 기침에 피까지 섞여 나와서.”

“아드님의 상세가 많이 심각했군요. 심려가 많으셨겠습니다.”

“말도 마세요. 앞이 막막했어요. 그러다가 이웃 육촌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죠. 빨리 아이를 업고 임시 의료원에 가보라는 이야길 말이죠.”

“전하의 임시 의료원 말입니까?”

“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애를 업고 뛰어갔죠. 정말로 황태자 전하께서 계시더라구요. 덕분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선뜻 손을 내미시며 아이를 보살펴 주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아드님은요?”

“나았죠. 말끔하게.”

“기침병이 말입니까? 아, 저도 소문을 제법 듣긴 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접해보질 못한 터라. 대체 전하께서는 어떻게 기침병을 잡으신 겁니까?”

“물약이었어요. 숯을 탄 것처럼 시커먼 색깔의 뜨끈한 물약이요.”

“물약 말입니까?”

“네에. 듣기로는 귀한 약초들이 이것저것 들어간 거라고 했는데, 그걸 직접 마셔본 아이의 말로는…….”

“어땠답니까?”

“고릴라 배꼽 맛이 난다고…….”

“…….”

“흠흠! 어쨌건 그 약을 먹으니까 거짓말처럼 열과 기침이 잠잠해졌죠. 그 뒤로 며칠 더 약을 타와서 마셨구요.”

“그럼 아이는?”

“아, 저기 오네요. 얘야! 엄마가 길에서 앞 안 보고 뛰지 말랬지!”

……라는 대화였다.

‘이게 무슨.’

흑마법사 카르투는 경악했다. 방금 좀비의 귀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믿기지가 않았다. 기침병을 단숨에 가라앉히는 물약이라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거리에서 계속하여 들려오는 이야기는 그 물약이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글쎄, 전하께서 건네주신 물약을 마셨더니…….”

“아이고, 말도 마요. 용하다니까.”

“다 죽어가던 아이가 지금은 쌩쌩해졌대도?”

“우리 아버님도 기운을 차리셨어요.”

“그럼 이제, 기침병으로 사람 죽어나갈 일은 없어진 거로구만요?”

“어? 그런가? 그렇군, 허헛, 허허허헛!”

‘…….’

사실이다.

거짓이라면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저렇듯 당연하게 떠들 리가 없다. 비로소 카르투는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황태자, 그놈 때문에…….’

내 시체 확보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구나. 그놈이 감히 내 일에 끼어들어 기침병을 치료한 덕에 죽는 사람들이 확 줄어든 것이었구나.

카르투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잘 굴러가던 자신의 계획이 걸림돌을 만났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이런 변방에까지 황태자가 와서 훼방을 놓는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야.”

카르투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고 나니 냉정하게 지금 상황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니 걱정도 함께 사라졌다.

‘어차피 황태자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진 않겠지.’

그럴 것이다. 길어봐야 서너 달 후면 황도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된다. 황태자가 돌아간 후에, 황태자가 운영한다는 긴뿌리 감초인지 뭔지 하는 농장을 박살 내면 된다.

그러면 다시 크라노스를 비롯한 이곳 지방에 기침병을 널리 일으킬 수 있다. 예전처럼 사람들이 병마에 시달리다 죽어갈 것이고, 자신은 편하게 시체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모든 것이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이다.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야.’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단지 서너 달 계획이 늦춰졌을 뿐이다. 개가 짖어도 톱니바퀴는 굴러간다. 어차피 자신의 대업은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지금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실례지만 하나 묻지. 내가 마나의 흐름을 느끼는 특이한 심법을 지니고 있어서 감지하기 싫어도 감지해 버린 건데 말이야, 그쪽…….”

“……어?”

생각에 잠겨 있던 와중이었다. 난데없이 누군가가 걸인 좀비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어째서? 왜? 무슨 용건으로? 카르투는 흠칫 놀라며 좀비의 시야를 빌렸다.

그러자 보였다.

단정하고 깨끗한 옷차림. 편안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보이는 최상급 옷감으로 도배된 전신. 약간은 마른 체격과 얼굴, 은발의 젊은 남자가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은발 남자 주위로 늘어선 십수 명의 호위도 보였다.

그런데 호위들의 어깨에 달린 견장은…….

‘황실…… 근위대?’

카르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순간, 좀비에게 다가온 은발 남자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져 왔다.

“그쪽,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

어떻게 알았지.

“딱 걸렸네?”

“……!”

움찔!

그냥 넘겨짚는 게 아니다. 확신을 담은 물음이다. 카르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와 감각이 연결된 좀비도 어깨 가득 당혹감이 실린 바운스를 그렸다.

카르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들켰다!’

도망쳐야 한다.

저 황태자에게서!

‘젠장, 어째서 여기에 황태자가? 게다가 어떻게 내 좀비를 알아봤지?’

그는 황급히 좀비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콰당탕!

걸인, 아니, 좀비가 당황한 몸짓으로 황급히 일어났다. 그러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내심 무릎을 탁 쳤다.

‘역시.’

맞다.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딱 보는 순간 쌔하게 느껴지더라고.’

조금 전이었던가. 마차를 타며 창밖을 보던 중이었다. 흘러가는 거리의 풍경 속에서 우연히, 걸인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걸인인 줄로만 알았다. 한데 어쩐지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스라한 심법 덕분이었다.

‘평소에도 기력 회복을 위해 아스라한 심법을 미약하게 계속 발동하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주위의 마나 흐름을 어느 정도는 대강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고.’

마나의 흡수와 증폭, 발출에 최적화된 심법이 아스라한 심법이었다. 자연히 심법을 발동할 때면 주위 마나의 흐름에 민감해지곤 했다.

방금 전, 걸인을 볼 때가 그랬다.

걸인을 보자마자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느껴지던 수상한 마나의 흐름. 호흡의 패턴이 이상했다. 걸인의 주위를 흐르는 마나의 기운이 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덕분에 처음엔 특이한 병을 지닌 환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마차를 세웠고, 가까이 다가갔다. 경혈 스캐닝을 켰다. 그 순간, 걸인의 몸속 마나의 흐름을 환히 비춰볼 수 있었다.

비로소 깨달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산 사람의 마나 흐름이 아니다. 저건 걸어 다니는 시체다.

즉…….

‘좀비라는 거지.’

……꿀꺽.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책이나 영화에선 지겹도록 본 좀비지만, 여기서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현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마주한 기분이랄까. 시신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걸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소설 마검황 속 내용이 불현듯 떠오른 까닭이었다.

‘좀비가 있다는 건, 근처에 흑마법사도 있다는 뜻이거든.’

자신이 긴뿌리 감초 농장을 설립하려는 지방에 흑마법사가 횡행한다, 라. 그건 안 될 소리였다. 자칫 공들여 추진한 사업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는가.

라키엘은 재빨리 명령했다.

“데미안, 저거 생포해. 사람들이 못 알아채도록 일단 골목으로 몰아서. 안 물리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걸인 좀비가 당황해서 움찔거릴 때부터 이미 검 손잡이를 쥐고 있던 데미안과 근위대, 특근대원들이었다. 라키엘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검집 씌운 검을 들고서 나섰다.

“……크워욱!”

데미안 등의 압박에 좀비가 일어나서 뒷걸음쳤다. 데미안이 천천히 전진했다. 좀비가 더욱 뒤로 물러났다. 골목으로 내몰렸다. 마침내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 데미안의 검집 씌운 검이 가볍게 움직였다.

빠악!

“구웍?”

낮게 휘둘러진 데미안의 검이 좀비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렸다. 그 직후, 특근대원과 근위대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넘어진 좀비의 팔다리를 꽉 붙들고서 포획했다.

“……그욱! 그웍!”

좀비가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그 서슬에 머리 깊숙이 눌러쓰고 있던 낡은 모자가 벗겨졌다. 창백한 시체 특유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한데 좀비의 맨얼굴을 본 순간,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기억의 조각 하나가 의식을 푹 찔러왔다.

저 좀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언제?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한 날. 어디서? 상단장의 장례식장에서. 어떻게? 상단장의 영전에 세워진 초상화를 통해.

그러니까 저 좀비는…….

“……툴룬 상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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