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04화 (204/468)

204화. 크라노스 공방전 (1)

이대로는 안 된다.

모두가 죽을 것이다.

죽임을 당한 후에마저 안식을 누리지 못하리라. 사악한 흑마법사의 손에 의해 좀비가 되어 버리리라. 영원한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되리라.

심지어, 내 외손녀마저도.

“…….”

한때 상단장이라 불렸던 남자.

3대 700의 사나이, 툴룬은 주먹을 꽈드득 쥐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창문 안쪽에 그의 외손녀가 있었다. 세상 하나뿐인 소중한 아이가 두려움에 질린 채 유모에게 안겨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뭐라도 해야 한다고.

‘설령 내가 좀비의 몸이 되었다곤 해도!’

툴룬은 죽은 심장이 다급하게 뛰는 느낌을 받았다. 언데드가 된 덕분에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흑마술사 카르투, 그놈의 군단이 도시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곧 성벽이 함락될 것이다. 언데드 군단이 도시로 물밀듯 들어올 것이다.

그 전에, 막아야 한다.

“…….”

툴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뒷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밤의 난데없는 침공 때문에 하인들이 모두 혼란에 빠져 도망친 탓이었다.

그렇듯 어지럽혀진 뒷마당 한쪽에 내걸린 낡은 망토가 보였다. 우비 대용으로 쓰이는 커다란 망토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망토를 덮어썼다. 그걸로 변장이 쉽게 완성됐다.

‘이 정도면 되겠지.’

이런 난리통에 굳이 자신의 망토를 들추어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좀비라는 걸 알아보는 이도 없겠지.

안심한 툴룬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뒷마당을 빠져나갔다. 저택을 벗어나는 마지막 순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잘 있거라. 우리 병아리.’

소중한 외손녀가 무사하길. 신의 가호가 그 아이에게 깃들기를. 그는 진심으로 기원한 후에 걸음을 떼었다. 대로로 나섰다.

도시는 이미 혼란의 극에 달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누군가는 다급히 피난을 떠나려 봇짐을 짊어졌다. 또 누군가는 수레를 끌고 나왔다. 어떤 이들은 너무 급하게 뛰려던 나머지 부딪쳐 나동그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동서남북 모든 방향이 언데드 군단에게 둘러싸였으니까. 모든 성문이 가로막혔으니까. 마치 불길에 던져진 항아리 속에 갇힌 쥐 떼 같았다.

그래서 툴룬은 잠깐 번민해야 했다.

‘그럼 지금 제일 위급한 곳은 어디지?’

동서남북 네 방향의 성문 중에 가장 함락이 가까워진 곳은 어디일까. 잠깐 좀비로서의 감각을 일깨웠다. 덕분에 손쉽게 답을 정할 수 있었다.

‘……북문.’

북쪽의 성문에서 가장 많은 동족, 좀비의 느낌이 풍겨왔다. 당연히 함락이 가장 임박한 곳일 터다. 그걸 감지한 때부터였다. 좀비 툴룬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공포에 질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틈새를 비집고서, 대로와 골목을 지나, 북문을 향해 달렸다. 마침내 북쪽 성문에 도착했다. 상황은 생각보다도 더 심각했다.

“이런…….”

성문 위쪽, 성루를 올려다본 좀비 툴룬의 입에서 망연자실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말 그대로 함락 직전이었다. 아니, 거의 함락 상태였다.

수십 구의 강화 좀비들이 이미 성벽 위를 점거했다. 남은 소수의 장교와 병사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맞서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 듯했다. 시간이 없었다.

“흡!”

좀비 툴룬은 다시 내달렸다. 성벽 안쪽의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랐다. 최후의 수비병 몇몇이 절망적인 저항을 시도하는 성벽 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지금껏 자신의 정체를 가려주던 망토를 벗어 던졌다.

“크루루워억-!”

일부러 포효했다.

가장 좀비스럽게.

더없이 흉포하게.

그 행위의 반응은 곧바로 돌아왔다.

“……어엇?”

성벽의 완전 함락을 막기 위해 절망적으로 애쓰던 최후의 다섯 수비병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쪽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기겁하며 놀랐다.

물론 그것이 툴룬이 바랐던 반응이었다.

‘좋았어.’

생각대로다.

좀비 툴룬은 매우 만족하며 땅을 박찼다. 기겁한 수비병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워억-!”

“어악?”

수비병들의 대응엔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성벽 위로 올라온 눈앞의 적들만 상대하던 중에, 갑자기 후방을 기습당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툴룬은 상관치 않았다.

“그와악!”

더욱 흉포하게 외치며 돌격했다. 3대 700킬로그램을 달성하는 데에 크게 일조했던 대퇴사두근이 폭발적인 추진력을 선사했다. 병사들이 검을 내리치는 것보다 반 박자 빠르게 접근했다. 두 팔을 짐승처럼 휘둘렀다.

“그룩!”

챙강-!

압도적인 그의 완력이 병사의 검을 옆으로 쳐냈다. 그 직후, 병사들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콰앙!

“컥!”

“크윽!”

힘에서 밀린 병사들이 와르르 넘어졌다. 병사들의 얼굴 가득 낭패감이 서렸다. 하지만 툴룬은 그들에게 대응할 틈을 주지 않았다. 다른 좀비들이 병사들을 덮치기 전에, 새치기하듯 먼저 온몸을 날렸다. 병사들을 확 덮쳤다.

“크와악-!”

“으악!”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듯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병사들. 툴룬은 그들을 더욱 흉포하게 물어뜯……는 척하며 재빨리 속삭였다.

“쉿. 나는 좀비지만 자네들 편일세. 죽이지 않을 테니, 나한테 죽는 척을 하시게.”

“……어? 예?”

“어서!”

“……으으아아악!”

재빨리 눈치를 주었다. 잠깐 얼떨떨해하던 병사들도 뭔가를 깨달았는지, 즉각 만족스러운 리액션(?)을 선보여 주었다.

그때부터였다.

좀비 툴룬은 그야말로 혼신의 연기력을 펼쳤다.

“크와아아악! 구룩! 그루루룩!”

일부러 눈을 새하얗게 뒤집었다. 다른 좀비보다 더욱 사납게 미친개처럼 포효하며 병사들을 물어뜯는 척했다. 그 기세에 언데드 군단의 좀비들이 오히려 주춤주춤 뻘쭘해하며 그에게 병사들을 양보(?)할 정도였다.

분위기를 완전히 파악한 병사들도 혼신의 호응을 선보였다.

“으아아악!”

“커억! 거…… 그크흑!”

목숨 걸고서 죽어가는 척을 했다. 한편으로는 언데드 군단 좀비들의 눈치를 살폈다. 연기가 통했나?

그런 듯했다. 군단의 좀비들은 순식간에 병사들에게 무관심해졌다. 툴룬이 병사들을 공격하는 척하며 그들의 옷이며 갑옷에 온통 묻힌 침 덕분이었다. 군단의 좀비들은 툴룬이 묻힌 타액 냄새를 통해 병사들을 좀비로 인식했다.

‘됐다.’

툴룬은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행히 생각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다음 단계를 실행할 때다. 그걸 위해 병사들을 구해준 거니까.

그는 쓰러져 있는 병사들을 향해 낮고도 재빠르게 속삭였다.

“자 그럼 다들, 나한테 당해서 좀비가 된 것처럼 구시게. 얼른.”

눈치를 팍팍 주었다.

다행히 병사들도 그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어째서 좀비가 자신들을 살려주는 건지. 아니, 대관절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각을 하고 말까지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구, 그룩……! 국!”

“그뤼워으으으……!”

“그르륵! 그륵!”

가까스로 살아남은 병사 다섯이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좀비 연기를 펼쳤다. 다행히 이번에도 연기력이 통했다.

툴룬의 다음 명령이 이어졌다.

“좋았네들. 그럼 이제 나와 함께 저놈들을 이끌고 성벽 밖으로 내려가세.”

“……예?”

좀비 툴룬의 말에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좀비 툴룬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야 시간을 끌 수 있지 않겠는가.”

“…….”

병사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좀비 툴룬이 뭘 노리고 있는지가 감이 왔다. 병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잠깐 나누는 비장한 각오의 눈초리. 이내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되었다. 어차피 죽음을 면치 못했을 목숨, 뜻깊게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노라고.

“각오가 되었나? 구르륵! 구륵!”

“……예.”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비 툴룬이 선두로 나섰다. 비틀비틀, 좀비 특유의 기괴한 걸음을 보이며 일부러 한껏 포효했다.

“구뤄으어어어억! 크와아악-!”

그 어떤 좀비보다도 사납게. 흉맹하게. 난폭하고 우렁차게. 동시에 병사들이 그의 포효에 호응했다.

“그와아아악!”

“커아악! 가악!”

목이 쉬도록 외쳤다. 간절한 바람잡이였다. 그토록 절박한 마음 덕분이었다. 성벽을 완전히 점거한 강화 좀비들이 병사들이 주도한 분위기에 덩달아 일제히 포효했다. 덕분에 일대의 좀비들이 모두 툴룬을 따르는 분위기가 잠깐 만들어졌다.

툴룬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일세!’

‘……알겠습니다!’

툴룬이 앞서서 성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성벽을 이루는 거대한 석재 틈새를 붙잡고 성벽 바깥면을 내려가며 포효했다.

“그와악! 커우웍!”

돌격의 포효였다.

병사들도 호응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툴룬을 따라 성벽 밖을 위태위태하게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혼신의 힘을 다 쏟은 바람잡이였다. 그러한 솔선수범(?) 덕분이었다.

성벽을 점령했던 좀비들이 분위기에 휩쓸렸다. 툴룬과 병사들을 따라 다시 성벽 밖으로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무지성으로 따라가는 쥐 떼처럼. 선두를 따라 바다에 뛰어드는 레밍처럼.

덕분에 점령되었던 북측 성문이 기적적으로 해방되었다. 멀리서 군단을 지휘하던 진짜 흑마법사, 카르투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비벼야 했다.

“저건 또 뭐야?”

카르투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상했다. 북쪽 성문을 거의 함락했던 좀비 선봉대가 돌연, 스스로 성벽을 버리고 있었다.

“쯧. 멍청한 놈들 같으니.”

혹시 명령이 꼬였나. 역시 좀비는 이게 문제다. 일일이 제대로 명령을 내려주지 않으면 순식간에 대열이 얽히거나 혼란에 빠져 버리니까.

카르투는 쓰리게 웃으며 마력을 일으켰다.

‘그래 봤자, 어차피 내가 이겼으니.’

이 전쟁은 자신의 승리다.

자신의 꼬리를 잡으려던 황태자와 토벌군은 아직도 함정의 실체를 모를 것이다. 자신의 대역을 맡긴 고위급 좀비에 그만큼 공을 들였으니까. 교묘한 변장 마법을 덮어쓴 채로, 미리 지정한 행동 패턴을 완벽하게 수행했을 테니까.

그걸 간파하는 건 거의 불가능할 테지.

‘거기서 가짜 폐급 좀비들과 전투를 벌이며 허황된 거짓 승리에 기뻐하거라.’

그동안 자신은 여기서 도시를 함락할 것이다. 그동안 언데드 군단을 키워준 거위의 배를 찢어버릴 것이다. 아예 거위 자체를 좀비 군단으로 만들 것이다.

‘이만큼이면 됐어. 계획 밖의 급진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됐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

도시의 시민들을 모조리 좀비로 만들면 된다. 그러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이후에 파견될 제국의 본격적인 토벌군과 맞서볼 만해진다.

“그러니, 진군.”

츠스스스……!

카르투가 크라노스의 북쪽 성문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마력이 뻗어 갔다. 북쪽 성문 일대의, 툴룬의 낚시질(?)에 걸려 혼란에 빠져 있던 선봉대 강화 좀비들에게 스몄다.

혼란이 가라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크루룩! 크워억!”

성벽 밖으로 나오던 좀비들이 다시금 방향을 돌렸다. 상황을 깨달은 툴룬과 병사들이 재차 연기력을 펼쳤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툴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그는 다급히 성벽 위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잠깐이나마 시간을 벌어주며 좀비들에게서 해방된 성벽 위쪽. 그러나 돌아온 수비 병력은 보이지 않았다. 성벽은 여전히 텅텅 비어 있었다.

원인은 둘 중의 하나이리라.

이미 모두 죽었거나.

공포에 질려 도망쳤거나.

“…….”

그럼 자신은 어찌하여야 할까. 이대로면 좀비 군단이 텅텅 빈 성벽을 순식간에 넘어갈 것이다. 도시로 진입하여 무차별 학살을 벌일 터다. 자신의 외손녀도 예외가 아니겠지.

까드득!

툴룬은 각오를 다졌다. 싸워야 한다. 이제 남은 길은 그것뿐이다. 설령 사지가 갈가리 찢기더라도. 더한 꼴을 겪더라도. 외손녀가 무사해질 1분, 1초의 시간이라도 벌어 주려면, 이제는 이 방법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려는 순간이었다.

“……누우우우우-!”

돌연, 머나먼 황야에서 워낭소리 충만한 포효성이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툴룬은 포효성이 들려온 북서쪽 지평선을 돌아보았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황태자?’

수많은 횃불이 지평선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토벌군이 이곳을 향해 급속 회군을 감행하여 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 거대한 황소 실루엣이 보였다. 황소의 등에 타고 있는 호리호리한 자의 윤곽도 얼핏 보였다.

눈에 담는 순간 알아볼 수 있었다. 한낱 좀비로 전락해 있던 자신의 의식을 일깨워준 은인. 황태자였다.

그렇듯 좀비 툴룬이 토벌군과 황태자의 귀환에 눈을 부릅뜨는 순간.

“……우리는 난다, 꾸익!”

“착지한다, 꾸이익!”

“추락한다, 꾸익!”

“끄떡없다, 꾸이이익!”

쿠웅! 쾅! 콰쾅!

온몸에 황야 덤불을 뽁뽁이처럼 빈틈없이 두른, 그보다 농염한 투지로 근육을 빵빵하게 채운, 정예 오크 전사들이 어디선가 날려왔다. 비어 있던 북쪽 성벽 위에 추락, 아니, 우렁찬 동체 착륙(?) 강습작전을 시도했다.

마치 항공모함의 전투기 이륙용 사출기 캐터펄트(catapult)처럼, 고도로 압축된 공기로 오크들을 발사한 환상종, 아기 코끼리 코몽이의 활약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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