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05화 (205/468)

205화. 크라노스 공방전 (2)

“우리는 난다, 꾸익!”

“착지한다, 꾸익!”

“추락한다, 꾸익!”

“끄떡없다, 꾸이익!”

퍼얼 펄 눈이, 아니, 오크가 왔다. 하늘에서 100인의 오크 전사가 내려왔다.

그것은 난데없는 등장이자, 강습 작전이었다. 대비할 틈도, 미처 막을 틈도 없었다.

쿠웅! 콰앙! 쿠당탕!

마치 짓궂은 거인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아니, 바윗덩이처럼 우람한 오크 전사들이 하늘에서 차례차례 떨어져 내려왔다.

무방비였던 크라노스 북측 성벽 위로 몸통 착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어떤 오크도 크게 다치지 않았다.

“안 아프다, 꾸익!”

“팔 부러졌지만 괜찮다, 꾸익!”

“머리에 피 나도 멀쩡하다, 꾸익!”

“어차피 머리 안 쓴다, 꾸이익!”

“침 바르면 낫는다, 꾸익!”

성벽 위로 쿠당탕 떨어진 오크 전사들이 벌떡벌떡 몸을 일으켰다. 개중에는 운이 나빠서(?) 팔이 부러진 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멀쩡했다. 온몸에 뽁뽁이처럼 야물딱지게 두른 황야 덤불 덕분이었다.

게다가 근육량 자체가 워낙 빵빵하다 보니, 어지간한 충격 따위는 충분히 버텨낼 수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성벽에 착륙하자마자 위용을 뽐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싸운다, 꾸익!”

“성벽을 지킨다, 꾸익!”

“대갈통을 부순다, 꾸이익!”

오크 전사들이 포효했다. 저마다의 무기를 치켜들었다.

인간이라면 두 손으로 다루기에도 부담스러웠을 그레이트 투핸디드 소드, 배틀액스, 차라리 공성병기에 가까운 참마도 등이 살벌한 기세로 번득였다. 아래로 내리 찍혔다.

콰작! 퍽!

성벽을 무지성으로 기어오르던 좀비 군단이 가엾은 희생양이 되었다.

인간 수비병들이 내리치던 창칼 따위는 그저 약간의 손상으로만 씹고 전진하던 좀비들이었지만, 오크 전사들의 맹렬한 일격 앞에서는 달랐다.

쩟컥-!

오크 전사의 거대한 중병기가 내리치는 곳마다 좀비들이 말 그대로 ‘쪼개졌다.’

비단 머리나 어깨만 쪼개진 것이 아니었다. 그냥 아예 몸통 자체가 두 동강이 났다. 철퇴에 맞은 순두부 꼴이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좀비 특유의 질긴 생명력을 선보이며 버둥거렸지만, 두 갈래로 쪼개지거나 통째로 뭉개진 몸뚱이로는 더는 성벽을 오를 수가 없었다.

“쿠워억! 피가 끓는다, 꾸이익!”

“덤벼라, 꾸익!”

“내리치는 거 열심히 하면 코어랑 상체 조져진다, 꾸익!”

“코어! 조진다, 꾸이익!”

그것은 가장 지독한 좀비마저 움찔거리게 만드는 야생 전사의 날것 그대로의 포효! 그러한 오크 전사들의 용맹한 분전 덕분이었다.

북측 성벽을 점거하려던 좀비 군단 선봉대의 진격이 저지당했다.

그걸 보며 먼발치의 라키엘은 주먹을 힘껏 쥐었다.

“좋아, 잘했어!”

“코몽!”

오크 전사들을 콧구멍 공기압으로 날려보낸 아기 코끼리 환상종, 코몽이가 힘차게 화답했다.

라키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했다. 정말로 조금만, 1분만 늦었으면 북쪽 성벽이 꼼짝없이 함락당할 뻔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심이었다.

‘가장 최정예의 오크 전사들만 날려 보냈으니까. 저들이라면 당분간은 충분히 버텨줄 수 있을 거야.’

문득, 1시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낚였더랬다. 흑마법사 카르투의 본진, 소굴을 치며 놈의 함정과 속임수를 박살 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틀렸다. 그것 자체도 놈의 낚시질이었다. 꼼짝없이 걸렸다. 덕분에…….

‘시체 폭발, 위험했지.’

지금도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졌다. 카르투로 위장하고 있던 좀비. 놈의 변장 마법을 걷어내고 정체를 까발린 직후였다.

좀비의 눈이 돌연 시뻘겋게 물들었던가. 흉포한 마나의 급격한 흐름이 느껴졌던가.

소름이 돋던 그 순간, 좀비의 몸이 산산조각으로 폭발했다.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 고도로 집적된 마나의 파괴적인 폭류였다.

그때 가장 재빠르게 대응한 이가 데미안이었다. 녀석이 순식간에 앞을 막아섰다. 맹렬한 검기를 뿌리며 전면을 방어했다.

덕분에 폭발력의 대부분을 상쇄할 수 있었다.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음 또한 물론이었다.

“……라고는 하지만, 너 진짜로 괜찮냐?”

상념의 끝에서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나란히 말을 달리는 데미안 녀석에게 물었다. 녀석이 별일 아니라는 듯 싱겁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쯧. 아닌 거 같은데.”

“정말입니다.”

“그런 폭발을 정면에서 받아놓고 멀쩡하다고?”

“예.”

“설마 나 몰래 그걸 쓴 건 아니겠지?”

“역혈의 심법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런가.”

“예.”

“…….”

아무래도 조금 의심스럽다. 그건 절대로 쉽게 넘길 종류의 폭발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당사자인 녀석이 거듭 괜찮다고 하니, 더 캐묻기도 조금 그랬다.

‘그럴 시간이 없기도 하고.’

라키엘은 저 멀리 크라노스 방향을 바라보았다.

100인의 오크 강습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전황이 밝고 희망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쪽과 크라노스.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대규모의 언데드 군단이 보였다.

아까 흑마법사의 소굴 앞에서 박살 냈던 폐급 좀비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최정예의 상급 좀비로만 구성된 군단이었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야.’

성벽이 함락되기 전에 놈들의 후방을 쳐야 한다. 군단을 움직이는 심장, 흑마법사 카르투를 제압해야 한다. 그래야 오늘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

“우루스! 브라쉬!”

라키엘이 외쳤다. 손을 들어 언데드 군단 후방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돌격!”

그가 가리킨 곳.

그곳에 카르투가 있었다. 놈이 마력을 집중시키며 군단을 지휘하는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누우우우-!”

“돌격, 꾸이익!”

우루스가 워낭소리 충만한 포효를 터뜨리며 코뿔소처럼 진격했다. 브라쉬가 이끄는 오크 전사들이 돌격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데미안만큼은 예외였다.

“전하. 저도 돌격하고 싶습니다.”

“응. 안 돼.”

“전하의 곁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까?”

“당연하지.”

라키엘이 콧방귀를 풍 뀌었다. 데미안의 미간이 희미하게 찡그려졌다. 또다. 황태자는 또다시 나를 보호하려 든다.

전에는 내가 신뢰를 잃었나 싶어 의기소침했지만, 계속 겪다 보니 이제는 알겠다.

‘신뢰를 잃은 게 아니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태자가 자꾸만 날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들고 있어.’

데미안은 거의 확신했다.

조금 전에도 그랬다.

아까 시체 폭발을 막아내느라 다치지 않았느냐고 물어오던 황태자. 그건 단순히 호위의 멀쩡함을 체크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끼는 꽃병이 깨지거나 금 간 곳이 없는지를 살피는…… 그런 종류의 눈빛에 가까웠다.

‘어째서?’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단지 당신의 곁을 지키는 호위일 뿐인데. 당신을 보호하는 것이 본분이며, 그 과정에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일상이자 당연한 일일진대.

한데 어째서 황태자 당신은 거듭 나를 온실의 화초처럼 두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뭔가 이상한 점은 있었다.

아까 시체 폭발의 마나 폭풍을 막아내려 나섰던 때였다. 전력으로 검기 다발을 뿌려낸 직후였다.

폭발력과 정면으로 부딪친 순간, 사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아주 잠깐, 대략 5초 정도? 선 채로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한데 그때 까맣게 물든 시야 속에서 기이한 것을 보았다. 아니, 느꼈고, 들었다.

- 또 다른 나여. 반갑군.

“…….”

잠깐은 헛것을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곱씹을수록 아닌 것 같다.

이질적이면서도 친숙한 느낌. 자신의 내면에 자신도 모르고 있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던 기분. 잠깐이나마 무의식의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그 존재와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

착각이 아니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그건 뭐였을까.’

알 수가 없다. 다만, 황태자가 자꾸만 자신을 보호하려 드는 기이한 행동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역혈의 심법과 연관이 있을지도.

“…….”

거기까지 생각하던 데미안은 상념을 털어냈다. 지금은 치열한 돌격이 감행되는 순간이다. 황태자를 지켜야 한다. 넋 놓고만 있을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뭘 하시려는 겁니까?”

상념의 끝에서 황태자를 돌아본 데미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사이, 황태자가 이상한 짓(?)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째서 지금 가시를…….”

……자신의 팔뚝에 꽂으려 드십니까?

처음엔 잘못 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황태자가 팔뚝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다른 손에 든 가시로 자신의 팔뚝을 겨누고 있었다. 마치, 가끔 그러하듯이 셀프 시침을 하려는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어째서? 왜?’

전투가 한창 시작되려는 이때에, 황태자는 스스로에게 침술을 펼치려 드는 것일까. 무슨 생각인 걸까.

한데 돌아오는 황태자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다.

“어. 곧 돌격이 저지될 거라서.”

“……예?”

“우루스도, 브라쉬도, 모두 뛰어난 전사고 강력한 존재들이지만 말이야. 저 흑마법사 놈의 방비도 만만치는 않을 거거든.”

“…….”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게다가 그 말씀과 당신이 스스로 하려 드는 시침은 또 무슨 연관이 있는 겁니까.

머릿속 가득 의문이 느껴졌다.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돌연, 전방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츠콰아악-!

우루스가 좀비 군단을 모조리 밀어내며 돌진하고 있던 전방. 그곳의 지면이 불길한 핏빛으로 일렁였다.

마법진이 열렸다. 지면에 생성된 마법진 안쪽, 흑암의 공간에서 기이하고도 끔찍한 모습의 존재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쿼어어어어억-!”

쿠웅! 쿠쿵!

신장이 5미터에 달하는 근육질의 대형 구울이었다. 그런 놈들이 도합 50구는 되었다.

순식간에 높이 5미터의 흉포한 장벽이 우루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돌진을 멈출 우루스가 아니었다.

“누오오오-!”

더욱 우렁찬 포효와 함께 한 쌍의 뿔을 들이밀었다. 온몸으로 돌진했다. 선두의 거대 구울이 뿔에 복부를 관통당했다.

“궈어억!”

그러나 쓰러지지 않았다. 뒤로 밀릴지언정, 복부가 관통된 채로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다른 거대 구울이 놈의 등을 떠받쳤다. 한 놈, 두 놈, 다섯 놈이 매달렸다.

콰드드드득! 콰득……!

“누우! 누우우오!”

우루스의 돌진이 점점 느려졌다. 마침내 열 마리의 거대 구울이 매달렸을 때, 미노타우로스의 왕은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그때부터였다.

“쿼어억-!”

거대 구울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우루스도, 족장 브라쉬도, 정예 오크 전사들도 돌격이 가로막힌 채 구울들의 공세 앞에 혈전을 벌여야 했다.

덕분에 흑마법사, 카르투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한껏 피어났다.

‘……그런 발악 따위가 내게 통할 줄 알았나?’

그는 여유롭게 웃었다. 사실 오크 전사들이 돌연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와 성벽에 착지했을 때도, 군단의 후방이 습격을 당했을 때도 별반 놀라지 않았던 그였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미노타우로스라고 해도, 오크 놈들이 용맹하다 해도, 내 친위대 구울을 쉽사리 돌파할 수는 없을 테니까!’

믿었다.

역시나 결과는 믿음대로였다.

‘그리고 나는 이대로 군단을 진격시키면 쉽게 오늘의 승리를 따낼 것이란 말이지.’

어차피 승기는 자신에게 있다. 후방이야 친위대 구울에게 맡겨두면 된다.

자신은 이대로 전방에 집중하여 성벽을 공략하면 되리라. 저들이 자신의 후방을 뚫는 것보다, 달랑 100명 남짓한 오크가 지키는 성벽이 무너지는 것이 먼저일 테니까.

‘그러면 도시의 모든 인간을 좀비로 만들 수 있지. 네놈들을 요리하여 내 군단에 흡수하는 것도 한결 손쉬워질 테고.’

카르투의 미소가 짙어졌다. 상상만 해도 짜릿한 소득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네놈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내 구울 친위대를 넘어올 수는 없을 것이야. 그 어떤 수를 쓴다 해도 말이다.”

확신을 담고서 이죽거렸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정말? 진짜로?”

돌연, 난데없이,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물어왔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누구?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황태자?’

황태자의 목소리가 왜 바로 옆에서 들린 걸까. 대경실색한 카르투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돌아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깐 헛것을 들은 건가.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갸웃거리려 했다.

바로 그때.

……콕?

갑자기 등이 따끔해졌다. 온몸에 두른 방어 마법의 틈새로, 마법의 유일한 약점 부위라 할 수 있을 공기구멍의 아주 작은 틈새로, 뭔가 뾰족한 것이 등을 찌르고 들어왔다.

바늘?

가시?

알 수 없었다.

그저 피부만 따끔했을 뿐이니까. 뭔가 싶은 생각만 들었으니까.

그런데…… 곧…….

“……그, 그아아아아아아악?”

따끔했던 등으로부터 영혼을 우주 저편으로 출타시키는 극악의 고통이 삽시간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믿기지 않는 이죽거림이 귓가를 건드려 왔다!

“투명화 마법, 너만 쓸 수 있는 줄 알았나?”

“……!”

확실하다.

황태자의 목소리다.

섬뜩한 깨달음과 함께, 카르투의 두 눈이 경악으로 흡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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