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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210화 (210/468)

210화. 낚시의 시간 (2)

저런 종류의 웃음은 위험하다. 전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요즘은 확실히 알겠다.

‘황태자 이 인간, 또 무슨 꿍꿍이를 품은 거지?’

데미안 카이엔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의혹을 알차게 채워넣은 눈빛으로 황태자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황태자. 저건 절대로 허세가 아니다. 패배를 예감하고서 초조함을 감추려고 짓는 미소 따위가 아니다. 명백하게 치명적인 함정을 준비한 사냥꾼의 표정이다.

그는 치솟는 당혹감을 감추려고 애를 쓰며 되물었다.

“전하. 방금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정말로 제가 물러나고 전하께서 저 흑마법사에게 붙잡혀야, 오늘 우리가 이긴다는 말입니까?”

“으음. 잘 들었네.”

“…….”

“그래야 이겨. 안 그러면 오늘 저놈을 놓치고 말 테고.”

“…….”

어째서 그런 겁니까?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설명이 이토록 절실했던 적이 또 있을까. 당장 위험한 흑마법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데도. 노골적인 적의를 한껏 드러내고 있는데. 그러함에도 황태자는 여전히 여유만만한 모습이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아니, 이 상황을 안배한 것처럼.’

커다란 체스판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의 눈빛이 저러할까. 황태자는 지금 상황을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예상하고 준비를 갖춘 것일까.

감히 짐작도 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지금껏 자신이 보아 온 황태자는 결코 이유 없이 미친 짓을 벌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확실하게 준비가 되어 있으니 저러는 것일 테지.

“하지만 전하. 멀리에 있지는 않겠습니다. 만일 전하께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 펼쳐진다면, 저는 전하의 명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곧바로 움직일 것입니다.”

“아니. 내가 신호 보내기 전엔 나오지 마.”

“……어떠한 경우에라도 말입니까?”

“어. 내가 당장 죽을 것처럼 보이더라도.”

“무슨…….”

얼마나 큰 야바위를 치려는 걸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런 상황에서조차 황태자가 걱정되지가 않았다. 오히려 점점 흑마법사를 향한 동정심만 더욱 모락모락 피어났다?

“…….”

나, 정신이 조금 이상해진 걸까. 혹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황태자의 미친 사고방식에 물들어 버린 걸까. 데미안은 남모를 자괴감(?)을 느끼며 물러났다. 언제든 황태자를 지키기 위해 움직일 수 있도록, 근처의 바위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 카르투는 오크 전사들의 틈바구니를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돌진해 오고 있었다.

츠즈즈즛-!

멀리서 몰려오는 오크 전사들에게는 광포화 마법을 난사했다. 그럴 때마다 전사들의 대열이 어김없이 흐트러졌다.

가까이 달려드는 오크 전사에게는 생명력 흡수를 사용했다. 붙잡힌 오크 전사가 근손실의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역시. 상성이 너무 안 좋아.’

흑마법사를 상대하기엔 오크 전사들은 너무 정직(?)하다. 흑마법사 특유의 음험하고 교묘한 마법에 거의 저항을 못 하는 모습이었다. 그건 우루스도, 족장 브라쉬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오히려 차분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사냥을 준비했다.

‘이렇게.’

스윽.

라키엘은 검정색 K맛 가시를 빼들었다. 한 발짝 나섰다. 두 발짝, 세 발짝. 돌진해 오는 카르투를 향해 마주 걸어갔다.

덕분에 카르투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황태자! 네놈이 죽지 못해 환장을 했구나.’

아까 독침에 당했던 고통의 원한을 갚으리라. 카르투는 독한 복수심을 품고서 오크 전사 셋을 폭발 마법으로 떨쳐냈다. 그렇게, 황태자와의 사이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병력을 제거했다.

‘그 목숨을 끊어 내 꼭두각시로 삼아 주마!’

츠파앗!

손을 뻗었다.

핏빛 마법진이 열렸다. 검붉은 화살이 섬전 같은 기세로 쏘아졌다. 목표는 황태자의 심장이었다.

쐐애액-!

스치기만 해도 온몸의 혈액이 부패하는 치명적인 부패의 화살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카르투는 확신했다. 이건 맞을 수밖에 없노라고.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비기 중의 하나였다.

그냥 화살 따위보다 훨씬 빨랐다. 가장 숙련된 엘프 궁수의 화살 정도가 비슷할까. 이건 보통의 인간이 반응할 수 없는 종류의 속도였다.

그런데…….

“하.”

쉬릿!

돌연, 황태자가 섬광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

부패의 화살이 너무나 허망하게 빗나갔다. 카르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자신이 뭘 본 것인가. 어째서 황태자는 화살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저런…… 능력이 있었나?’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믿기지가 않게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타닷!

“……!”

부패의 화살을 피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땅을 박찼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은 속도로, 비현실적인 기세로!

츠파앗!

20미터 남짓 떨어져 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카르투는 기겁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괴상한 모습을 보아야 했다.

투타다다다다-!

‘어?’

달려들어 오는 황태자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보통 저토록 빠르게 땅을 박차는 경우라면, 한 번의 커다란 힘으로 압도적인 속도를 내는 것이 일반적인 움직임일 터였다.

한데 황태자의 모습은 달랐다.

‘걸음이…… 왜 저렇지?’

한 번에 쾅, 하고 땅을 박차며 쇄도해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투다다다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작들 하나하나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서, 결과적으로 엄청난 돌진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크읏!”

카르투는 멍하니 떠올리던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황급히 반응했다.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회색 마법진을 열었다.

양쪽의 마법진에서 각각 30개씩, 도합 60개의 회색 구체가 떠올랐다. 오크 전사들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광분화의 구체였다.

츠팟, 쐐애액-!

모조리 내쏘았다. 황태자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움직이건 말건, 한 발만 맞으면 된다. 광분화는 사고력의 감퇴도 불러오니까. 제자리에서 무지성으로 날뛰는 황태자를 잡는 것이 훨씬 쉬울 테니까.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60발을 모조리 피할 순 없을 테지!’

카르투가 외쳤다.

황태자가 몸으로 대답했다.

응 아니야, 라고.

투파파파파팟-!

“……!”

날아드는 60발의 구체를 모조리 피했다. 심지어 단순하게 직선으로 날아가던 구체도 아니었다. 60발 하나하나가 전부 유도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피했다!

‘어떻게?’

차라리 소나기 속을 걸어가면서 빗방울을 하나도 맞지 않는 쪽이 쉬울 것이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로 그랬다.

‘설마…… 가속화 마법?’

카르투의 눈동자가 경악에 잠겼다. 이제야 알겠다. 기이하도록 빨라진 몸놀림도. 그 속에서 보이는 비정상적인 자잘한 동작들도. 모두.

‘투명화를 쓰더니 가속화까지?’

설마 황태자는 엄청난 수준의 마법사였던 것인가? 뒤늦은 경악에 카르투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물론 그는 라키엘이 지닌 검정색 K맛 가시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다. 라키엘이 가속화 마법이 아닌, 단순히 K맛 가시로 자신의 몸을 찔렀다는 사실도 몰랐다. 덕분에 돌입한 ‘신진대사 8282 모드’의 존재 또한, 전혀 짐작조차 못 했다.

그 사이, 라키엘이 마침내 카르투의 면전까지 순식간에 접근했다.

투팟!

‘모조리…… 보인다!’

라키엘은 눈을 부릅떴다. 8282 모드로 진입하며 극도로 빨라진 신진대사. 심장이 날뛰었다. 허파가 포효했다. 대장이 혈류량을 기꺼이 양보했다. 간장이 폭발적인 화학 처리를 개시했다.

세상이 느리게 보였다.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가속된 덕분이었다. 정보를 처리하고, 판단하며, 대응하는 속도 모두가 경이로울 지경에 이르렀다.

신경이 섬광처럼 전달되고, 근육이 일사불란하게 반응했다. 거기에 경혈 스캐닝까지 발동했다. 카르투가 마법을 시전하려 준비할 때마다 마나의 흐름이 다 보였다. 어떤 종류의 마법을 어디를 향해 발사할 것인지도 예견할 수 있었다.

그런 덕분이었다.

‘쉽다, 쉬워!’

투파팟! 파팟!

모든 마법 공격을 너무나 쉽게 피해냈다. 카르투가 보이는 저항의 틈새를 뚫고 면전에 접근했다.

카르투가 기겁했다.

“그읏!”

츠즈즈즛!

다급한 수인을 맺었다. 카르투의 로브 옷자락이 수십 갈래의 흑색 칼날로 변했다. 사방으로 확 뻗었다.

스츠릉!

수십 자루의 흑색 칼날이 고슴도치의 날 선 가시처럼 공간을 헤집었다. 그러나 라키엘은 이미 그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물론 카르투도 포기하지 않았다.

“쥐새끼 같은 놈이!”

마치 묘하게 농락당하는 듯한 기분. 카르투가 더욱 열이 뻗친 표정으로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망령이 비명을 지르고, 암흑의 화염이 공간을 태웠다. 죽음의 채찍이 땅을 가르고, 맹독의 사슬이 춤을 추었다.

그러는 동안 카르투는 점점 확신을 품게 되었다.

‘된다. 놈이 지치고 있구나!’

여전히 자신의 공격을 얄밉도록 모조리 피해내는 황태자. 그러나 그는 느낄 수 있었다. 황태자의 동작이 조금씩 느려지는 게 보였다. 아주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지친 건가? 아니면 마법의 효과가 떨어지는 건가?’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이제 곧 황태자를 잡을 수 있으리란 점이 중요했다.

‘……이렇게!’

화악-!

기회를 엿보던 카르투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암갈색 마법진이 열렸다. 마법진이 주위의 공기를 강력하고도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고속으로 움직이던 라키엘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와아아악-!

“……!”

라키엘의 동작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곤 해도, 주위의 공기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흡입력. 사방의 공기 흐름 자체가 급하게 바뀌었다. 돌풍처럼 빨려 들어가는 공기의 흐름이 전신을 잡아당겼다.

“그, 크읏!”

라키엘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떠올랐다. 마치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카펫에 발톱을 박아넣고서 버티는 딱정벌레처럼, 일순간 그의 동작이 주춤했다.

카르투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재빠르게 반대편 손을 뻗었다. 라키엘의 목덜미를 그대로 움켜쥐었다.

터업!

“……큽!”

황태자의 얼굴 가득 떠오르는 다급함. 벗어나려 버둥거리는 몸짓. 카르투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잡았다!’

그는 황태자에게 조금의 희망도 주지 않았다. 목덜미를 잡자마자 생명력 흡수의 마법을 발동했다.

츠즈즈즈즈……!

라키엘의 목덜미를 움켜쥔 카르투의 손이 사악한 흑색 주술로 물들었다. 자비 없는 흡수가 시작되었다.

“이대로 죽어 내 종복이 되어라.”

“그윽!”

카르투는 환희를 느꼈다. 한편으로는 기대했다. 이제 황태자가 덫에 걸린 버러지처럼 버둥거리겠지.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절망감에 허우적거리며 애원하는 눈빛을 보내겠지.

“하지만 애원해도 소용없다. 기쁘구나. 내가 살면서 황족으로 좀비를 만드는 날이 올 줄은 몰랐으니까.”

쾌감이 느껴졌다. 뇌가 아찔해지는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며 황태자의 죽어가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때였다.

“애원은 이제부터 그쪽이 해야 할 것 같은데?”

“……뭐?”

황태자가 방긋 웃고 있었다.

의아했다.

무슨 허세일까, 저건.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후욱?

황태자의 목덜미로부터, 그의 목을 움켜잡은 손아귀를 통해서, 압도적인 마나의 기세에 실린, 이질적인 기체가 이쪽으로 울컥 흡수되어서 들어왔다?

‘무슨?’

카르투는 일순간 움찔했다.

자신은 생명력을 흡수하려 했는데. 그런데 방금 흡수되어서 들어온 건 뭘까.

‘생명력은 분명 아니었…….’

두쿵!

“……!”

카르투의 눈이 확 벌어졌다.

라키엘이 호흡을 통해 써클 슬롯에 정제해서 보관하고 있던 질소 기체가, 생명력 흡수 마법을 역이용해서 주입해 버린 대량의 질소가, 카르투의 신체에 끔찍하고도 급진적인 중증 잠수병(Decompression Sickness) 증세를 불러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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