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13화 (213/468)

213화. 타인의 희생 (3)

모든 것이 끝났다. 힘겨웠지만 해냈다. 이제부터 당분간은 지루하지만 섬세함을 요구하는 뒷정리의 시간이 펼쳐지겠지.

‘이 많은 언데드를 전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라키엘은 전장을 지나치며 무의식중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마침내 흑마법사를 처리한 지금, 후련함보다는 명치가 답답하게 콱 막혀 왔다. 크라노스 시의 성벽 바깥 평원을 온통 배회하는 언데드 때문이었다.

“구우우, 구워어…….”

한때는 살아서 미소 짓고 사랑을 나누었을 이들. 그러나 지금은 지휘자인 흑마법사를 잃고서 그저 초점 없는 눈동자로 전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흉성? 터뜨리지도 않았다. 단지 의미 없는 신음소리만 내며 천천히 걷고 있을 뿐.

덕분에 저들은 이제 존재만으로는 거의 해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숫자가 물경 2천이 넘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아무래도 저 좀비들을 모조리 방치하기엔 좀…… 그렇겠지.’

다른 문제보다 일단 위생적인 점이 제일 컸다. 저 좀비들이 썩어가는 몸뚱이로 도시 주위를 몇 날 며칠이고 배회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온갖 잡균이 도시 주위에 팍팍 뿌려지는 셈이니까.

게다가 저들은 따지고 보면 대부분이 한때 크라노스의 시민들이었다. 즉, 성벽 안쪽에 가족과 친지가 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한곳에 모아서 화장이라도 치러주는 편이 좋겠지. 그래야 유족들도 조금은 위로가 될 테니까.’

물론 2천 구가 넘는, 심지어 걸어 다니는 시신들을 얌전히 모아서 화장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터다. 하지만 방치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이제부터 더 바빠지겠네.’

잠시나마 잊고 있던 피로감이 한숨에 섞여 흘러나왔다. 솔직히 당장 뜨끈한 물로 샤워 한 번 때리고선 소파에 누워서 넷x릭스나 뒤적거리다가 잠들고 싶었다. 물론 그게 불가능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지만.

“일단은 닥친 일부터 빠르게 처리해야겠지. 그렇지 않나, 세르지오?”

“예, 전하. 오늘은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쪽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특근대의 최연장자 세르지오. 한때 고참 검투사였던 그가 까슬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아까 흑마법사의 소굴 전체가 함정이자 미끼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정말 아찔했는데 말입니다.”

“그랬나.”

“예.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크라노스가 함락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다면 큰일이 났겠지. 시민들이 모조리 당했을 테니까.”

“예, 전하. 그러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세르지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이 모시는 주군,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새삼스러운 존경심이 들었다.

그는 확신했다. 이 모든 승리가 황태자의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사실만은 확실하다. 따지고 보면 아까 흑마법사의 수작을 가장 먼저 간파한 이도, 크라노스로의 급속 회군을 명령한 이도 황태자였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크라노스에 돌아온 후에도 전장의 모든 판세와 흐름을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조율했다. 자신은 그 모습을 모조리 곁에서 지켜보았다. 지금도 그 과정들을 돌이켜보자면…… 절로 전율과 소름이 함께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역사에 길이 새겨질 위대한 분을 모시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군.’

세르지오는 새삼스러운 감격을 남몰래 곱씹었다. 아마도 자신의 추측이 맞을 것이다. 황태자는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까. 이대로 성장한다면 반드시, 제국의 역사를 찬란하게 빛낼 인물로 거듭날 테니까.

‘그저 지하 검투장에서 썩어가던 내가…… 허허, 허허헛.’

이렇게 출세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새삼스러운 감격과 자부심이 생겨났다. 앞으로 더더욱 황태자를 잘 모시고 지키겠노라 다짐하였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어? 저건 뭡니까?”

곁의 특근대원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뭘까. 세르지오는 반사적으로 동료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좀비 하나가 있었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좀비였다.

그저 반쯤 썩어 있고, 진물을 흘리며, 의미 없는 신음을 흘려대는…… 적어도 외양으로만 보면 너무나 평균적이고 보편적인 좀비의 정석 같은 모습이었다.

한데, 행동이 조금 특이했다.

“저놈, 갑자기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는데 말입니다?”

“떨기 시작했다고? 조금 전까진 안 그랬나?”

“예. 방금 막 저러기 시작했습니다.”

“…….”

세르지오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좀비를 훑어보았다. 과연 동료의 말대로 좀비는 온몸을 격렬하게 떨어대고 있었다. 아니, 제자리에서 팔다리를 마구잡이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 기세가 사뭇 기형적이고 기괴했다. 저러다가 콱 발작하며 달려드는 건 아닐까.

“다들 경계.”

수십 미터쯤 멀찍하게 떨어진 거리이기에 크게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평범한 좀비 하나쯤 기습적으로 달려들어 보았자 이쪽의 철통 같은 호위를 뚫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경계를 하여 손해 볼 것은 없다.

세르지는 그렇게 판단했고, 황태자 주위를 둘러싸며 함께 걷던 특근대원들의 대열을 약간 더 밀집시켰다.

그 사소한 판단이 황태자를 살렸다.

……후우욱?

온몸을 떨어대던 좀비가 폭발한 것은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들거리던 근육이 급속도로 수축했다. 흑마술로 이루어진 마나가 순간적인 막대한 흡인력을 행사했다. 좀비의 전신이 ‘한 점’을 향해 모였다. 밀집했다. 수축되고, 압축되었다. 찰나에 응축된 에너지가 흑마술을 통해 폭발적으로 발산되었다.

기습적인 시체 폭발이었다.

후콱-!

수십 미터 거리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맹렬한 폭발. 최초로 폭발한 좀비는 하나였다. 그러나 그 곁에 나란히 함께하던 좀비들이 있었다. 그 숫자가 약 20구에 달했다. 최초의 폭발의 기세가 20구의 나머지 좀비들을 덮쳤다.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투화학!

제일 먼저 일행을 덮친 것은 폭발의 기세가 밀어내며 압축시킨 공기의 벽, 충격파였다. 음속을 돌파하며 날아온 충격파가 특근대원들을 후려쳤다.

그러나 이미 그 순간, 특근대원들은 대응하고 있었다. 마침 부들거리는 좀비를 주시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좀비가 폭발하는 모습을 모두가 두 눈으로 보았다.

동시에 반응하였다. 오랜 시간 검투사로 살아오며 시시각각 생명의 위기를 넘나들었던 본능이 발휘되었다.

“……!”

누가 무어라 외쳤는지 제대로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는 그 외침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했다.

전하를 지켜라.

모두가 똑같은 의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충격파와 마주한 쪽의 특근대원들은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방패와 무구를 앞세우고서 버티려 애를 썼다. 그렇게 1차 충격을 걸러주는 사람의 벽이 세워졌다.

반대편의 특근대원들은 일제히 황태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황태자를 붙잡았다. 지면으로 내리눌렀다. 그 손길은 지극히 다급하고, 그만큼 거칠었으며, 무례했고, 우악스러웠다. 하지만 덕분에 황태자는 반항할 틈도 없이 바닥에 깔릴 수 있었다.

“……큭!”

그 순간 라키엘은 보았다.

자신을 내리누르는 특근대원들. 달려드는 특근대원들. 모두가 몸으로 자신을 덮어오고 있었다. 세르지오의 다급한 눈길이 보였다.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눈빛이 저런 건가. 소름이 돋았다.

뒤이어 몰려온 것은 끔찍한 충격이었다.

……!

소리도, 섬광도, 진동도.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어두워졌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거대한 비명과 함성으로 버무려진 드럼통 속에 던져진 것만 같았다. 드럼통이 1초마다 수십 바퀴씩 굴러가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뒤섞이는 기분.

암흑과 섬광의 난투.

비명과 침묵의 협정.

그 끝에 찾아온 것은 귓가를 거세게 울리는 이명이었다.

“……으, 읍.”

라키엘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자신이 고개를 들긴 한 걸까. 눈을 떴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마구잡이로 뒤섞여 반짝이는 반딧불이 수백 마리를 눈앞에 풀어놓은 것만 같았다.

제대로 들리는 것도 없었다. 삐- 하는 가느다란 소리만이 청각의 존재를 간신히 알려주고 있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땅을 짚었다.

짚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그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낯설었다.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살긴 한 걸까. 다른 이들은? 세르지오는? 특근대원들은?

‘모두…….’

괜찮은 걸까.

그 생각을 가까스로 떠올리던 무렵, 갑작스럽게 감각이 살아났다. 제일 먼저 몰려온 감각은 통증이었다.

“……큽?”

모든 관절이 다 쑤셨다. 아니, 조각조각 부서진 뼈마디를 마취 없이 못질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마치 수십 미터 사이즈의 망치에 전신이 으깨진 느낌이었다.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라키엘은 바닥을 짚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고통은 익숙했다. 검정색 가시로 스스로를 찔러대던 덕분일까. 오히려 눈을 부릅떴다. 파들파들 떨리는 눈꼬리의 느낌을 자각하며, 비로소 주위의 상황을 온전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환상종 뽀복이였다. 특유의 널따란 지느러미를 활짝 펼친 채 눈을 까뒤집고서 죽어 있었다.

그 뒤편으로, 뽀복이와 이쪽 사이에 쓰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방패를 앞세우고서 충격을 막아 냈던 특근대원들이었다. 모두가 의식을 잃은 걸까.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바로 곁에 혼절해 있는 세르지오 등이 있었다.

“…….”

손을 내밀었다. 세르지오의 목덜미를 짚었다. 미약한 맥이 느껴졌다. 죽지 않았다. 마음이 놓였다. 더듬더듬 기었다. 다른 이들도 차례로 살펴보았다. 다행히 모두가 큰 충격을 감당하느라 혼절하여 있을 뿐, 죽은 이는 없었다.

비로소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모두가 나를 살리기 위해 몸을 던졌구나.’

이쪽을 내리누르고 몸으로 뒤덮던 세르지오와 특근대원들. 그들이 나를 살렸다.

환상종 뽀복이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깨닫지도 못하는 틈에 제일 앞장을 서서 충격과 폭발을 감당했다. 그리고 죽었다. 덕분에 충격을 1차적으로 저지하는 방파제 역할을 해 주었고, 특근대원들도 혼절하는 정도로 그쳤겠지.

딩동!

[불사복치 뽀복이가 스킬 <부활! (Lv. 1)>을 시전합니다.]

[불사복치 뽀복이의 거대화 1 스택이 적립되었습니다.]

“……뽀보!”

뽀복이의 까뒤집혔던 눈이 반짝 뜨였다. 넝마가 되었던 지느러미가 복구되며 불꽃이 되살아났다. 잠깐 철렁했던 마음이 놓였다.

데미안이 다급한 걸음으로 달려온 것도 그때쯤의 일이었다.

“전하!”

녀석이 황망한 눈초리로 이쪽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우선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여기에 안전한 곳은 없다.”

“……예?”

데미안은 의아함을 느꼈다. 황태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혹시 머리를 다친 건 아닐까. 흑발의 호위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려던 찰나.

라키엘이 이를 갈았다.

“집단 시체 폭발이라.”

한 번의 연쇄 폭발.

뜻밖에 입은 충격.

덕분에 상황을 선명하게 간파한 라키엘의 입가에 난폭한 미소가 맺혔다.

“……끝끝내 귀여운 뒤끝으로 직접 손을 쓰게 만드는구만.”

물론, 그는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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