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지키고 싶은 사람들 (3)
눈을 부릅떠 본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일순간 느려지는 기분. 그토록 기이한 감각 속에서 협곡 꼭대기가 멀어지고 있다. 점점이 뿌려지는 내 핏방울 사이로. 폭발과 붕괴가 일어나는 아래를 향하여. 하염없이 떨어지며.
멀어진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안 돼.’
라키엘은 멍하니 생각했다. 머리가 너무나 아팠다. 파편에 맞은 걸까. 혹은 어딘가에 부딪힌 걸까. 알 수 없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혹시 나는 기절하고 있는 걸까. 그런 것 같다.
이런 상황, 기분, 낯설지가 않았다. 그 언젠가 겪어본 적 있는 느낌이었다. 언제? 이제는 조금 아득해져 버린 기억 속의 어느 페이지. 그래. 서울. 양화대교. 몹시 추웠던 겨울밤. 그날.
‘나는…….’
술에 취했더랬다.
끝내 망해 버린 한의원이 내 인생의 모습인 것만 같아서. 앞으로가 더 막막해서. 조금 취한 채로 택시에 탔던가. 불쑥, 충동적으로 양화대교 한복판에서 내렸던가.
그저 걸었다. 하필이면 바람도 차가웠다. 무심결에 짚고서 올라탄 난간의 감촉도 그랬다. 무어라 외쳤던 것도 같다. 그러다가 그만 균형을 잃어버렸다.
‘뛰어내릴 생각까지는 아니었는데.’
실수였다. 순간 기우뚱 기울어졌던 균형. 몸을 가누질 못했다.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떨어진 것이었다.
그때도 이랬다.
멀어지던 그날의 난간. 멀어지는 지금의 협곡 꼭대기. 점점이 뿌려지던 그날의 눈발. 점점이 뿌려지는 지금의 내 핏방울. 시린 강물을 향하여. 폭발이 일어나는 아래를 향하여. 하염없이 떨어졌다. 하염없이 떨어진다.
‘나는…….’
그때 혼자였다.
아무도 떨어지던 나를 붙잡아주지 않았다. 근처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 곁에 누구도 있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지금도 그럴까. 끝내 나는 그때처럼 홀로 추락하고 마는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전하!”
거짓말처럼 청각을 두드려오는 목소리. 아득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다가오는 실루엣. 뻗어오는 손길.
데미안이었다.
“……!”
녀석이 손을 뻗어오고 있다. 다급한 몸짓으로. 그보다 더욱 절박한 눈빛으로. 우루스의 등을 박차고서. 몸을 날리고 있다. 아니, 추락하는 나를 향해 뛰어 내려오고 있다. 온몸을 던지며.
‘이 멍청아.’
네가 그러면 안 되는데.
넌 무조건 안전해야 하는데.
끝까지 온실의 화초로 남겨두고 싶었는데.
‘그런데 왜.’
거기까지였다.
의식이 급속도로 흐려졌다. 세상이, 눈앞이 어두워졌다. 이럴 수는 없다고. 여기서 눈을 감아선 안 된다고. 끝까지 정신 차려야 한다고 스스로를 향해 외쳤다.
소용이 없었다.
온 세상이 어두워졌다.
다음 순간, 내가 느낀 감각은 내 손을 붙잡는 손길이었다. 양화대교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사실은 그토록 바랐던, 끝내 아무도 내밀어 주지 않았던 온기였다.
……이거면 된 걸까.
모르겠다.
그것이 의식을 잃기 직전, 라키엘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데미안이 손에 힘을 주었다. 간신히 뻗어 맞잡은 황태자의 손. 끌어당겼다. 황태자의 가벼운 몸이 부딪쳐 왔다. 단단히 붙잡았다.
그는 아래를 보았다.
……투확!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폭발. 섬광이 두 눈을 찔렀다. 끔찍한 열기가 솟구치며 파멸의 몸짓으로 이쪽을 환영했다. 반대로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저곳까지 떨어진다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무사하진 못할 것 같다. 어느새 혼절한 황태자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겠지.
그건…… 싫다.
까드득!
황태자. 아직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다 모르겠다. 어째서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몸을 내던진 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어쩌다 보니 충동적으로 당신을 따라 뛰어내려 버렸으니까.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나는 당신을 살리고 싶다.’
쾨쾨한 검투장까지 내려와 능청을 떨던 당신의 모습이. 내 등을 지지며 농담이나 지껄이던 당신의 모습이. 암울한 구렁텅이에서 날 구해준 것이었으면서도 서로의 이득을 위한 거라며 딴청을 부리던 당신의 태도가.
사실은 고마웠다.
언제나 날 곁에 두려고 애썼던 날들도. 조사관에게 추궁당하던 나를 옹호해 주던 당신의 말들도. 소드마스터에게 죽을 뻔했던 나를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썼던 당신의 용기도.
솔직히 고마웠다.
그럼에도 언제나 침착한 척하던 당신의 태도가. 실은 남들보다 두려움에도 매번 그걸 애써 감추려던 당신의 본심이. 끝끝내 미처 숨기지 못하여 못내 떨리던 당신의 손끝이.
항상 안타까웠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지키고 싶다. 이런 곳에서 허망하게 스러지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살려내고야 말겠다.
‘그 어떤 대가를 바쳐서라도!’
스칵!
다른 손을 뻗었다. 번득이는 검광. 절벽을 찔렀다. 검이 절반 이상 암석을 파고들었다. 혼신의 힘으로 더욱 찌르고, 버텼다.
카드드드드득!
검이 암석을 갈랐다. 그만큼 추락의 속도가 늦추어졌다. 잠시 피어나는 희망의 불꽃. 그러나 현실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깨달아야 했다.
츠캉!
“……!”
검이 부러졌다.
암석을 가르던 검날이 저 위쪽으로 멀어졌다. 손아귀에 남은 검은 반토막. 다시금 잔인한 추락이 이어졌다. 검을 버렸다. 맨손을 뻗었다.
콰자자작!
“……!”
손가락이, 손바닥이 통째로 불에 지져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감각마저도 곧 사라졌다. 속도가 줄어들지가 않았다. 붙잡히는 것도 없었다. 협곡 바닥이 삽시간에 다가왔다. 아래는 폭발의 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추락의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설령 그걸 견딘다 한들, 저 폭발의 열기와 위에서 붕괴하는 수만 톤의 암석 사이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섬뜩했다. 절망적 감각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이대로 끝인 걸까.
그 순간이었다.
“누우우우우-!”
돌연, 우렁찬 외침과 함께 압도적인 그림자가 위쪽을 뒤덮어 왔다. 깨닫자마자 거대한 미노타우로스의 전신이 이쪽을 확 감싸 안았다.
“우루스 경?”
“누우!”
이쪽과 황태자를 아울러 감싸 안은 우루스가 특유의 커다란 눈을 끔벅끔벅 떴다. 마치, 이제는 안심하라고 타이르는 듯한 눈길이었다. 혹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노라 결의를 다지는 것도 같았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같은 마음이니까.
“……누우!”
우루스가 스스로를 격려하듯 포효했다. 데미안과 황태자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과거의 절망과 현재의 염원이 눈동자 가득 명멸했다. 협곡. 쏟아져 내려오던 암석. 품에서 죽어가던 어린 목숨. 그 순간의 무력했던 자신.
그러나 지금은 같지 않으리라.
그때와는 다르리라.
“누우우!”
제대로 된 착지를 위해 균형을 잡기는 늦었다. 대신 우루스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콰드각!
추락의 충격이 엄습했다. 우루스의 의식을 때리고 뒤흔들었다. 끝내 버텨냈다. 대부분의 충격을 감당하고, 흡수했다. 대신 큰 대가를 받아야 하였다.
“……누욱!”
왈칵!
부러진 갈빗대가 허파를 찔렀다. 비명의 끝자락에 선혈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우루스는 자신의 안위보다 품속부터 먼저 살폈다.
품에 안긴 데미안이 보였다. 데미안에게 안긴 황태자가 보였다. 둘 모두 숨을 쉬고 있다. 죽지 않았다. 다친 곳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거면 됐다. 예전과 다르다. 다행이다. 해냈다. 지켜냈다.
“누우……!”
우루스의 입가에 힘겨운 미소가 맺혔다. 오랜 시간 품어온 응어리 하나가 간신히 풀어졌다. 긴장의 끈도 함께 풀어졌다. 그것이 우루스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힘겹게 들이마시는 공기 속의 끔찍한 열기를 느끼며, 우루스가 눈을 감고 쓰러졌다.
“……커윽!”
데미안은 우루스의 품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힘겹게 황태자를 빼냈다.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사방에서 엄습하는 초월적 열기. 대폭발이 남긴 초열적 잔향이 전신의 피부를 지지는 듯했다.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대로는…… 다 죽어.’
자신도.
우루스도.
황태자까지 모두.
1분도 버티지 못하리라.
비단 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당장 머리 위에서 협곡 전체가 무너지며 쏟아져 내려오고 있으니까.
……투콰가각!
그저 많은 바윗덩이?
단순한 산사태?
아니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아예 협곡 전체가 붕괴했다. 수십만 톤의 바위와 토사가 모조리 무너져 내려오고 있다. 이쪽을 향하여. 빠져나갈 그 어떤 빈틈조차 없이. 희망의 어떠한 여지와 편린조차 보여주지 않으며. 압도적 절망의 커튼으로 시야의 모든 방향을 뒤덮어 오고 있다.
‘나는…….’
데미안은 눈을 부릅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일순간 느려지는 기분. 그토록 기이한 감각 속에서 모든 하늘이 사라지고 있다. 빛이 가려지는 사이로. 쏟아져 내려오는 거대한 죽음의 물결에 의하여. 하염없이 허우적거리듯.
희망이 멀어진다.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안 돼.’
데미안은 주먹을 쥐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나는 굳어 버린 걸까. 혹은 암담한 무력감에 짓눌린 걸까. 알 수 없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혹시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려는 걸까. 그건…….
‘싫다.’
내게 기댄 황태자. 쓰러진 우루스. 모두가 내 어깨에 얹혀 있다. 지금 이 순간, 움직일 수 있는 이는 내가 유일하다. 나만이 모두를 지켜내고, 살릴 수 있다.
그러니 뭐든지 해야 한다.
그 어떤 짓이라도.
설령 그것이 금지된 행동이라 하여도, 반드시.
……키아아아아악!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각오가 새겨지는 찰나. 전신의 모든 마나가 역행을 개시했다. 정해진 순리를 저버렸다. 심장과 근육, 뼈와 피부, 가슴과 마음속 모든 곳에서 마나가 역방향으로의 질주를 시작했다.
- 약속해. 마나를 역행하는 그 심법,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기억을 스치는 황태자의 당부. 그러겠노라 고개 끄덕였던 한때의 자신.
‘죄송합니다, 전하.’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겠습니다. 당신을 지키고 싶으니까. 오직 그것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최선이니까. 내가 당신 곁에 머물러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니까.
‘그러니까……!’
츠크가가각-!
데미안의 체내에서 모든 마나가 파멸적 격류를 생성했다. 돌이킬 수 없는 역행의 금기를 깨부수었다. 끝없는 증폭을 시작했다. 혈맥이 부서지고, 재구성되며, 전신의 모든 세포가 태초의 포효를 부르짖었다.
이전, 소드마스터 쟈빌론과 대적하던 때를 능가하는 역행의 폭류가 심장을 휩쓸었다. 미증유의 두근거림이 가슴을 채웠다. 황태자가 걱정하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 너, 그거 함부로 쓰다간 진짜로 큰일 난다.
설령 당신의 말이 진실이라도. 끝내 돌이킬 수 없을 일이 일어난다 하여도.
지금은 당신만을 위하여.
나는.
이렇게.
……!
소리도 없었다.
압도적 산울림이 모든 소리를 뒤덮었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심장 박동이었다.
두쿵.
역혈의 마공, 리베르사.
금단의 결의가 불러온 초월적 울림이 가슴을 채우는 순간, 데미안은 눈을 떴다. 동시에 미증유의 존재도 흡족하게 눈을 떴다.
- 마침내 준비가 되었구나. 나의 화신체. 그릇이자 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