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17화 (217/468)

217화. 나락 속의 진실 (1)

- 마침내 준비가 되었구나. 나의 화신체. 그릇이자 검이여.

금단의 결의를 품은 순간이었던가. 독한 결의와 함께 마지막 걸음을 내디딘 직후였던가. 초월적 울림이 가슴을 채웠다. 그와 동시에 미증유의 존재가 흡족한 눈을 떴다. 내면에서. 영혼의 영역 한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

데미안은 흠칫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목소리는 무엇일까. 환청? 착각? 아니다. 그런 것 따위가 아니라는 건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다. 모든 의식을 압도하는 위압적 존재감. 그때도 똑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체도 모를 내면의 무언가에 신경을 기울일 때가 아니다. 고개를 들었다. 쏟아져 내려오는 절벽의 잔해. 한때는 우뚝 서 있던 절벽 전체가 무너져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족히 수십만 톤은 넘을 바위와 토사의 물결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사나운 웃음이 배어났다.

어째서?

모르겠다.

내가 웃은 건지.

내면의 무언가가 웃은 것인지.

그 순간이었다.

- 걸음마는 언제나 즐거운 법이지.

내면의 존재가 되뇌었다.

역류하는 심장으로부터 대량의 마나가 전신을 침범해 들어왔다. 그러했다. 그것은 침범이었다. 혈관이 반응하고, 근육이 경련했다.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신체의 가장 작은 단위와 조각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

저도 모르게 몸을 숙였다. 어느새 뽑아든 허리춤의 단검. 위를 향해 휘둘렀다. 최후를 앞두고서 보이는 발악의 움직임? 아니었다. 단검을 휘두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어떤 행위라도 다 이룰 수 있겠노라고.

느낌은 현실로 변했다.

투확-!

내가 이렇게 강렬한 검기를 뿌려본 적이 있던가. 없다. 결단코 없다. 그저 허공을 향해 단검을 그었을 뿐인데. 그 경로를 따라 해일이 쏟아져 나가는 듯했다. 선두에서 쏟아져 내려오던 수십 덩이의 바위가 증발했다.

아니, 그것은 해일이 아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커먼 격류였다. 오러? 비슷하지도 않았다. 소드마스터의 오러에 지옥 마귀들이 내지를 법한 비명성이 깃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으니까.

내면에서부터 건네어 오는 달콤한 물음이 있다는 이야기 또한 들어보지 못하였으니까.

- 마음에 드는가?

‘…….’

누구야, 너.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로 환청 따위가 아니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거칠게 뛰는 심장. 그 박동을 관장하는 또 다른 존재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강렬한 확신. 섬뜩함을 억누르며 물었다.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 너의 창조자.

‘뭐?’

- 연옥의 주인이자 마계의 지배자. 마경의 창조주. 그리하여 너를 빚어내고, 너를 키워내고, 마침내 너를 그릇으로 삼아 이곳으로 강림할 지배자.

고요한 대답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순간이었다.

돌연, 눈앞의 시야가 사라졌다.

온 세상이 새카맣게 변하였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광경. 검은 불꽃으로 채워진 대지. 해도, 달도 없는 세상. 하늘조차 존재하지 않는 마경. 타락하고 저주받아 배회하는 영혼의 물결. 그들을 포식하는 초차원적 존재들.

그들의 왕.

마경의 폭군.

지배자의 눈길이 이쪽을 향하였다.

“……!”

눈길이 마주쳤다.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다. 저 존재가 바로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다. 어째서? 왜?

‘나는…….’

데미안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눈앞을 채우던 환각이 사라졌다. 현실의 풍경이 돌아왔다. 방금 휘둘러 증발시킨 바윗더미. 그 뒤로 계속해서 쏟아져 내려오는 거대한 붕괴의 물결이 보였다.

보자마자 다시 움직였다.

투콱-!

땅을 박찼다. 황태자의 주위로 떨어지는 바위를 연달아 쳐냈다. 그때마다 심연을 닮은 흑색 기파가 쏟아져 나갔다. 바위를 증발시켰다. 아무런 열기도, 굉음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때마다. 기파를 뿜어내는 찰나의 사이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빠르게 연속적으로 눈을 깜빡이면 이러할까. 언뜻언뜻 시야를 지배하는 검은 커튼. 그 틈새로 엿보이는 마경의 권좌. 도사리듯 앉아 이쪽을 향해 미소 짓는 존재.

섬뜩했다.

그런데 낯설지가 않았다.

언젠가 저 미소를 본 적이 있다.

언제?

- 비로소 떠올렸구나. 네가 탄생하던 순간을.

그렇다.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던 탄생의 기억이 비수처럼 망각을 뚫고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아기도, 어린아이도 아니었어.’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불과 10년 전이었다. 어디에서? 저 마경의 권좌에서. 저곳이다. 저 권좌가 내가 만들어진 장소다.

무엇을 위해?

화신체가 되기 위하여.

저 존재의 강림에 쓰일 그릇이 되기 위하여.

“…….”

거짓말.

- 정녕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니다. 저건 조작된 기억이다. 분명하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사람이니까. 울고 웃으며 살아왔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왔으니까. 어린 시절부터의 추억과 기억이 그 모든 시간을 증명하니까.

- 정녕 그리 생각하는가?

과연 어느 쪽이 조작일까.

나는. 모르겠다.

내가 어째서 저 존재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그 이유조차도 모르겠다.

‘마계왕, 아케로스…….’

- 그래. 훌륭하구나. 나의 그릇이여.

마계왕, 아케로스가 흡족하게 웃었다. 소름이 돋았다. 내가 태어나던, 아니, 만들어지던 때에도 저 존재가 저렇게 웃었다는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인생은?

지금까지 품어왔던 내 기억은?

어린 시절, 그토록 힘겹게 지냈던 날들은?

‘그 모든 게 만들어진 기억이었다고?’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나는!”

투확-!

소리쳤다.

들러붙어 오는 진실을 떨쳐내듯 단검을 휘둘렀다. 다시금 수십 톤의 바위가 증발되었다. 쉼 없이 땅을 박찼다. 모래 알갱이 하나조차 떨어져 내려오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황태자가 무사하도록. 오직 그 목표에만 집중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 잘하고 있구나.

“……!”

마계왕이 더욱 기뻐하고 있다. 내가 힘을 개방할수록. 역혈의 마공을 사용할수록. 이 힘에 익숙해질수록 만족하고 있다.

그 사실이 알려주는 날카로운 진실은 뻔하다.

‘이 힘이 완성되는 순간…….’

마계왕이 내 육신을 통해 지상에 강림하리라. 내 육신을 빼앗으리라. 내 영혼은 흔적조차 남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이 힘을 거두어야 할까.

역혈의 심법을 중단하여야 할까.

“…….”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쓰러져 있는 황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협곡의 붕괴는 끝나지 않았다. 그 사실들이 알려주는 미래는 명확했다. 지금 내가 힘을 거두면, 심법의 사용을 중단하면 황태자는 죽는다.

그건, 싫다.

……까드득!

단검 손잡이를 더욱 거칠게 움켜쥐었다. 비로소 선연한 깨달음이 뒤늦게야 떠올랐다.

‘전하. 당신은……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힘을 사용할수록 마경의 초월적 광경이 시시각각 심장에 깃들어 왔다. 비로소 완연히 알 수 있었다.

언제나 나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안전하게 두려던 황태자. 언제나 은근히 나를 보호하려 들던 황태자. 검투장에서 만났던 때에도. 미노타우로스의 왕과 맞서던 날의 밤에도. 쟈빌론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던 때에도.

항상.

언제나.

황태자는 일개 호위에 불과한 나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돌아왔다. 몸을 던졌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도 여겼다.

한데 아니었다.

틀린 건 나였다.

오해를 품은 이도 나였다.

‘이래서였어.’

다시는 역혈의 마나 심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황태자. 그의 과잉보호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지금과 같은 사태를 예방하고자 했던 거다.

‘몰랐습니다. 설마 당신이 그런 마음이었을 줄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했던 걸까, 황태자는. 그랬음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챙겨주었던 걸까.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고마움의 크기만큼 의문도 떠올랐다.

‘전하.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던 겁니까. 그리고 이 사실들을…… 어떻게 알고 있던 겁니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의식이 흐려져 갔다. 역설적인 기분이었다. 몸은 강대한 힘을 뿌려대며 날뛰고 있는데. 반대로 정신은 몽롱해져 갔다.

‘나는…….’

이대로 의식을 잃을 수는 없는데.

더 알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여기서 굴종하고 싶지 않은데.

……투콰학-!

눈앞의 초월적 광경이 거짓말 같았다. 손짓 한 번에 수십 톤의 질량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설마 꿈일까. 내가 만드는, 혹은 앞으로 만들게 될 또 다른 재난의 한 자락을 들추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 속에서 외쳤다.

나는 인형이 아니라고.

한낱 그릇도 아니라고.

만들어진 존재 따위는 더더욱 아니라고.

외치고, 또 외치며 기억을 붙들었다. 그것만이 나를 비로소 나로 존재하게 해줄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

기억과 추억들. 어린 시절 뒷골목의 풍경. 하수도. 냄새. 신발조차 없던 나날. 앞에 세워두곤 했던 나무 그릇. 누군가가 던져주던 동전. 기쁨. 어머니. 눈발 날리던 날. 내뱉던 기침. 핏자국. 애써 숨기시던 몸짓과 표정. 눈물. 서리처럼 번지던 입김. 마지막 숨결. 유언까지.

‘그것들이 만들어진 기억이라고?’

거짓말.

아니다.

어머니의 당부. 내 손을 꼭 쥐던 감촉. 앙상하고. 버석하고. 차갑고. 그러나 간절하여 뜨겁기만 했던 그날의 눈물까지.

‘나는…….’

그날 후로 매일 울었던 것 같다.

골목 밖의 세상을 향해 그렁그렁한 눈길을 던졌던 것 같다. 부러웠다. 나와 상관없이 행복해 보이던 사람들. 어째서 나는 저들처럼 될 수 없나.

그럴수록 웅크렸다. 가난하여 따스한 점도 있다고. 마음은 더 풍족하다고. 궁핍과 만족의 비애를 애써 가난과 행복의 역설로 치환했던 날들. 그렇게 간신히 버텼던 나날들.

그런데 그게 거짓이었다고?

- 그래.

거짓말.

아니다.

‘나는!’

외치고 싶었다. 온몸으로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몸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몸은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바위. 붕괴하는 절벽.

아니, 이미 붕괴는 끝났다.

더는 떨어지는 바위가 없다. 굉음도 없다. 그럼에도 거칠어진 숨결이 가라앉지가 않는다. 또 다른 파괴의 대상을 찾아 눈길을 번득인다. 주위의 모든 것. 어떤 것이라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과연 나일까.

소름이 돋았다.

멈추고 싶었다.

그런데 불가능했다.

이미 의식이 흐려지고 있다. 추억의 끈을 간신히 붙드는 것도 한계였다. 절망감이 몰려왔다. 역혈의 심법을 이러려고 쓴 것은 아니었는데. 최후의 의식마저 이렇듯 사라져 버리면, 다시는 나로서 눈을 뜨지 못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 후의 나는 내가 아닌 거겠지. 두려웠다.

그래서였다.

마지막을 직감하며 혼신의 힘을 모았다. 모든 영혼의 밑바닥까지 긁어내듯 저항했다. 최후의 목소리로 외쳤다.

“전하!”

도망치라고.

내가 내가 아니기 전에.

어서 깨어나서 뛰라고.

멀리 달아나라고.

뒷말까지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더는 외침이 나오지 못했다. 대신 쓰러진 황태자를 향해 돌진했다. 단검을 치켜들었다. 설마 이대로 내리치려는 걸까. 내 손으로 황태자를 죽이게 되는 걸까.

한데 그 순간이었다.

와락-!

얌전히 누워 있던 황태자가 돌연,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났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그 손에 검정색 가시가 들려 있었다. 가시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막을 틈도, 피할 틈도 없이, 정수리에 꽂혔다.

톳!

“……!”

돌이킬 수 없을 기세로 역류하던 마나의 역행이 거짓말처럼 중단되었다. 동시에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의식과 자아를 잠식해 들어오던 마계의 지배자, 마계왕이 처음으로 당혹감을 머금게 되었음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