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나락 속의 진실 (2)
난리가 났다.
정말로 잠깐 사이에 난리가 났다.
라키엘은 떨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설마하니 데미안 이 녀석…….’
혼절하며 추락하던 나를 따라 녀석이 정말로 뛰어내렸을 줄은 몰랐다. 날 지키겠다고 이런 짓을, 협곡 전체를 날렸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뻔하다.
‘리베르사 심법.’
역혈의 마공. 마계왕이 녀석에게 심어둔, 녀석에게만 허락된 최강이자 최흉의 심법. 그걸 발동해 버린 거다. 아예 전력으로, 한계까지.
……꿀꺽.
무의식중에 마른침을 삼켰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아까 파편에 맞은 걸까. 얼굴 절반을 뒤덮고 있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거슬렸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손끝에 힘을 주었다. 꼭 쥐고 있는 검정색 K맛 가시. 그 끄트머리가 간신히 데미안 녀석의 두피를 파고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손이 떨렸다.
가시를 밀어내려는 어마어마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절대로 밀려나선 안 된다. 여기서 손을 멈추면, 정말로 끝이다.
‘이 녀석, 벌써 각성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어. 거의 마지막 선을 넘기 직전이야.’
라키엘은 재빨리 데미안의 얼굴을 살폈다. 이미 표정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우는 것 같았다. 달리 보면 일그러져 있는 듯도 했다. 어떻게 보면 서글픈 느낌도 났다.
그러나 녀석의 눈동자.
눈동자만큼은 달랐다.
‘…….’
저런 눈빛은 살면서 처음 봤다.
사람의 눈빛이 아니다.
마치 끝이 없는 바닥, 무저갱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눈길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가장 깊은 심연의 악몽 속에서 허우적거리고야 마는 기분이 든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마계왕.’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 속의 최종 보스에 해당하던 빌런. 통곡의 벽과도 같았던 절대 강적. 마계왕을 묘사하던 내용이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죽거나 미칠 수 있다고 했지. 인간의 영혼이 감당할 수 없을 깊이의 심연과 대면하게 되고, 그것만으로도 정신과 신체 모두에 돌이킬 수 없을 타격이 가해진다고 했던가.’
그랬던 것 같다.
지금 데미안의 눈빛이 거의 그러했다. 멍한 듯한데 섬뜩했다. 심지어 한 번 마주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도 없게 됐다.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삽시간에 배어났다.
‘젠장. 어쩌다가 이런.’
까드득!
이를 갈며 필사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정신 차리자, 라키엘.
넋 놓지 말자, 이한.
그러니까 눈을 돌리자.
‘이건…… 건물주다!’
자고로 임대료가 간당간당할 때는 건물주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 복도에서 딱 마주쳤더라도 건성으로 ‘응능흐스요’ 인사하며 걸음을 2배속으로 돌려야 한다. 당연히 그 와중에 눈이 마주치면 절대로 안 된다.
설령 마주쳤더라도, ‘내가 당신을 굳이 껄끄러워하는 건 아니’라는 느낌의 자연스러운 시선 회피 스킬이 필요하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산다.
내게는 이미 그러했던 경험이 있다. 심지어 제법 많이!
‘……큽!’
과거의 경험을 떠올렸다. 혼신의 의지로 눈길을 돌렸다. 가까스로 성공했다. 비로소 영혼의 속박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풀려나자마자 경혈 스캐닝부터 발동했다.
키이이이잉-!
시야가 변했다. 데미안의 전신 경혈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녀석의 내부에서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나 있었다.
‘뭔…… 경혈 움직임이…….’
날뛰고 있다.
방향이 없다.
단순한 역행?
차라리 그 정도라면 나을 텐데, 이건 아예 수백 번 흔들었다가 뚜껑을 열기 직전의 맥주병 내부 같은 느낌이었다. 건드리면 터지는 탄산, 아니, 폭탄. 그걸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는 병뚜껑이 바로 정수리에 꽂힌 검정색 가시였다.
‘…….’
만일 녀석의 정수리 백회혈에 가시를 1초만 늦게 꽂았더라면? 탄산이 터졌겠지. 폭발적인 각성의 기세가 임계점을 넘었겠지. 돌이킬 수도, 막아낼 수도 없는 마계왕의 강림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생각하니 소름이 죽 돋았다.
‘소설에서는…… 마계왕이 데미안의 몸에 강림한 것만으로도 그 지역 일대가 아예 소멸했지.’
반경 수십 킬로미터의 지대가 말 그대로 사라졌다. 향후 수백 년 동안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전락했다.
여기서도 그럴 것이다.
저 병뚜껑, 아니, 검정색 가시가 밀려나면.
‘그건 안 돼.’
꽈악!
더욱 힘껏 가시를 눌렀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콜라병 주둥이에 억지로 손가락을 욱여넣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탄산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손가락이 밀려나는 중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타앗!
다른 손을 움직였다. 안주머니에 남아 있던 가시를 모조리 움켜쥐어 꺼냈다. 확인했다. 검정색 가시 3개. 고작 이게 나한테 남은 마지막 무기이자, 멸망을 막을 최후의 도구다.
‘……x발.’
무서워서 절로 욕설이 나왔다. 하지만 반대로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톳!
제일 먼저 찌른 곳은 입술 아래에서 턱으로 내려가는 수직선, 그 중간 어름의 오목한 자리에 있는 경혈, 임맥의 승장혈(承漿穴)이었다.
자고로 승장혈은 얼굴이 퉁퉁 붓는 부기가 올라왔을 때, 부기를 빼주는 데에 특히 좋은 효험이 있는 자리였다. 이곳을 꾹꾹 지압하면 아침에 부어 있는 얼굴을 어느 정도는 수습(?)할 수 있다.
그럼 지금은?
마찬가지다.
‘지금 데미안의 몸속에 차오르고 있는 날뛰는 마나의 흐름…… 이게 가장 많이 올라오는 곳이 바로 얼굴이니까.’
얼굴, 머리로 올라오는 마나의 격렬한 흐름. 이게 정수리의 백회혈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있다. 엄청난 압력으로 백회혈에 꽂힌 검정색 가시를 밀어내려 들고 있다.
이게 뚫리면?
그래서 백회혈이 열리면?
‘백회는 하늘의 기운과 맞닿아 있다고 하지. 그곳이 뚫린다는 건 즉, 마계왕의 의식체가 데미안의 내부로 들어오는 길이 열린다는 뜻이고.’
데미안이 육신을 빼앗길 것이다. 마계왕의 완벽한 화신체로 거듭날 것이다. 그걸 저지하려면, 백회혈로 치고 올라오는 마나의 격류부터 막아야 하리라.
‘이렇게!’
꽈악!
승장혈에 꽂은 가시를 지그시 누르며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녀석의 날뛰는 기운을 누그러뜨리는 정확한 보사법(補瀉法)으로 혈을 자극했다.
적절한 자극이 주위에 영향을 퍼뜨렸다.
……덜컥!
모이고 적체되어 얼굴을 붓게 만드는 노폐물처럼. 백회혈을 향하여 얼굴로 모이던 마나의 격류가 일순간 중단되었다. 방향이 바뀌었다. 아래로. 노폐물이 내려가고 부기가 빠지듯. 슬며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된다!’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정말로 해낼 수도 있겠다. 희미하게 엇비치는 희망을 엿보며 지체할 틈도 없이 손을 움직였다.
다음 가시로 찌른 곳은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위의 위쪽 승모근이었다. 흔히 뭉쳤다며 주무를 때 손가락으로 강하게 누르면 가장 아픈 자리,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의 견정혈(肩井穴)이었다.
토돗!
평소에 피로가 쌓이면 목과 승모근부터 뭉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이곳에 자리한 견정혈이 전신에 기를 분배하여 주는, 일종의 와이파이 공유기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견정혈이 속한 족소양담경은 신체에서 가장 긴 경혈이지. 발바닥 아래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인체의 거의 모든 주요 부위를 따라 이어져 있어.’
그 모든 부위에 기혈의 기운을 1차적으로 분배하는 곳이 바로 일명, 생명지정(生命之井)이라 불리는 견정혈이었다. 그러니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된 신체는 견정혈부터 풀어 주면 큰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데미안의 몸에는 각종 혼란한 기운이 얽히며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였다. 하여 견정혈을 다스렸다. 매우 강력하고, 단호하게.
‘이렇게!’
꾸듯!
이번에는 반시계 방향으로 가시를 돌리며 보사법을 발휘하였다. 긴장되어 있던 데미안의 견정혈이 뚫리며 무장해제 되었다.
그 순간이었다.
- 감히.
“……!”
머릿속에 커다란 음성이 울렸다. 누군가가 영혼을 직접 때리듯이 던져 오는 말소리였다. 듣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마계왕이다.
대답할 틈도 없이 마계왕의 나직한 호통이 들려왔다.
- 이 세상에 속하였으나 남의 몸을 빌린 자여. 감히 내 길을 막아서려는가?
“…….”
대꾸할 필요가 없다. 대답하면 안 된다. 아까처럼 눈도 마주치지 말고. 마지막 가시부터 꽂자. 다짐하며 세 번째 가시를 들었다.
그때였다.
덥석!
“큽!”
돌연 데미안이 두 손을 뻗어왔다. 녀석의 손이 내 목을 움켜쥐었다. 숨이 컥 막혔다. 압도적인 완력. 압도적인 살의. 폭주. 장악. 목이 통째로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흐, 흡! 큽!”
버둥거렸다. 소용이 없었다. 공업용 프레스에 목이 끼면 이럴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보고야 말았다. 내 목을 조르는 데미안. 녀석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미 육신을 거의 지배당하고 있는 거다. 마계왕의 완전 강림까지 마지막 한 걸음만을 남겨놓은 거다. 내가 막을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목이 부러지는 건 아닐까. 무섭다.
- 부당하게 빌린 육신은 무의 공허로. 그것이 순리인 법.
“……!”
영혼을 뒤흔드는 준엄한 목소리. 신화적 존재의 일갈.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오기가 솟아났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싫다. 그러기엔 너무 억울하다. 이러자고 여기까지 달려온 게 아니다. 방금 들은 비난 또한 억울하다. 다른 놈은 몰라도, 마계왕에게 저런 소리를 듣는 것만은 못 참겠다.
‘그쪽도 남의 몸뚱이나 빼앗으려 드는 주제에.’
이를 갈며 되뇌었다. 손을 뻗었다. 데미안의 뻗어온 팔뚝 사이로. 내게 남은 마지막 가시를 뻗었다. 목표는 팔꿈치 안쪽 면. 위팔뼈 위관절융기(epicondyle of the humerus) 부위. 부딪히면 전기가 느껴지는, 뼈가 볼록 솟은 어름.
그곳에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의 소해혈(少海穴)이 있었다.
톳!
평생 해냈던 것 중에 가장 정확한 시침이었다.
동시에 나는 보았다.
- ……!
눈이 마주쳤다. 마계왕의 부릅뜬 눈. 육신의 눈이 아니었다. 초월적 존재의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덜컥, 전신이 굳었다. 내 영혼의 밑바닥에 쩌적 균열이 새겨지는 것 같은 기분. 섬뜩했다. 지금껏 꾸어본 그 어떤 악몽보다도 더.
- 끝내 대적을 선택하겠다는 것인가. 타차원의 티끌이여.
‘…….’
눈길을 피할 수가 없다. 아까처럼 되지가 않는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럴수록 더욱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소해혈에 살짝 꽂힌 가시. 그 끄트머리를 붙들고서. 내 남은 모든 걸 끌어모아서.
눌렀다.
돌렸다.
그것이 나의 대답이었다.
대답을 받은 마계왕이 웃었다. 무저갱의 나락이 열리는 듯한 미소였다. 그것이 내가 완전히 의식을 잃기 직전에 보았던, 마지막 광경이었다.
아니.
어쩌면.
허물어지던 나를 데미안이 받아주었던 것도 같다.
부디, 그랬으면 한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