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기적 같은 기연 (1)
부디.
모든 것이 그저 꿈이길.
한때의 지나가는 편린이길.
황태자 당신이 위기에 내몰린 모든 일들이. 당신이 나를 구하고자 가시를 들었던 순간이. 내가 당신의 목을 졸랐던 찰나가.
그저 악몽이길. 깨어난 후에 고개 저어 털어내면 그만일, 일장춘몽에 불과하길.
부디, 그랬으면 한다.
부디.
“…….”
데미안 카이엔은 눈을 떴다.
처음엔 그저 멍하였다. 자신이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 건가 싶었다. 물끄러미 뜬 눈으로 들어오는 주위의 풍경이, 현실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평화롭고 고요했으니까.
‘하지만…….’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눈길을 움직였다. 소박한 실내가 보였다. 제법 익숙한 공간. 툴룬 상단 건물. 크라노스에 도착한 이후로 사용했던 침실. 덮고 있는 새하얀 시트와 폭신한 베개마저도 낯설지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여기에 누워 있는 걸까.
‘황태자 전하는? 그리고…….’
마계왕은?
……흠칫.
저도 모르게 어깨가 떨렸다.
비로소 떠올랐다. 그저 꿈이 아니었다. 한때의 지나가는 편린 따위는 더더욱 아니었다.
황태자 당신이 위기에 내몰린 모든 일들이. 당신이 나를 구하고자 가시를 들었던 순간이. 내가 당신의 목을 졸랐던 찰나가.
모두 현실이었다.
깨어난 후에 고개 저어 털어내면 그만인, 일장춘몽이 아니었다.
‘…….’
데미안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 간단한 동작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허리와 등, 가슴과 어깨, 목덜미까지. 아팠다. 신체를 이루는 모든 근육의 줄기가 작은 동작 하나에도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왼손을 들어 살폈다.
온통 붕대가 감겨 있었다.
“…….”
그래, 추락의 순간. 절벽에 꽂아 넣었던 검마저 부러졌더랬지. 그 후에 맨손으로 절벽을 움켜쥐어서라도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려 애를 썼던가.
그리고 나는 이 손으로 황태자 당신의 목을…….
‘나는 어떻게 된 걸까.’
붕괴하던 협곡에서 겪은 일들이 비로소 떠올랐다. 정신을 잃기 직전의 순간들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마계왕 아케로스.
어째서 내가 그 존재의 정체를 아는지, 심지어 이름마저 알고 있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다 알겠다.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도. 마계왕의 계획을 위해 마련된 준비물에 불과하다는 것도. 자신에게 주어진 역혈의 심법 또한 그 수단의 하나라는 사실 또한. 모두 날카로운 진실의 비수가 되어 가슴에 서슴없이 박혀 드는 기분이다.
‘그런데 전하가…….’
그걸 막아낸 걸까. 덕분에 내가 이성을 잃지 않고서 이렇듯 전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두쿵…….
마치 이쪽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심장에 자리한 마나하트가 반응했다. 심장의 움직임에 맞추어 부드러운 울림을 전해 왔다.
한데…… 마나하트가 만들어내는 흐름이 정상이 아니었다. 역방향이었다.
“…….”
데미안은 황급히 역혈의 심법을 중단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더욱 놀라고 말았다. 자신은 역혈의 심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예 아무런 심법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마나하트가 다시 한 번.
두쿵……!
역방향으로 마나를 순환시켰다.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설마.”
나는 이제 숨을 쉬듯이 자연스럽게 마나 역행을 하게 된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흐름의 방향을 되돌리려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마나를 정방향으로 돌리려 하면 오히려 숨을 일부러 멈추고 있는 듯한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기가 막혔다.
당황스러웠다.
그때였다.
벌컥!
“……!”
침실 문이 서슴없이 열렸다. 부릅뜬 눈길을 반사적으로 던졌다. 그러자 난데없이 등장한 침입자(?)가 튼실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벌쭉 웃었다.
“허? 벌써 깨어난 건가, 꾸익?”
오크 족장, 브라쉬였다.
“인간 데미안, 사흘 만에 눈을 떴다. 보기보다 튼튼하다, 꾸익!”
“…….”
사흘?
내가 그렇게나 오래 누워 있었다고?
데미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수건을 가지고 쿵쿵 걸어오는 브라쉬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긴, 나는…… 아니 그보다, 전하는 무사하십니까?”
오직 그것만이 가장 궁금하였다.
황태자 당신은 무사할까.
나름 기억을 짚어보려 애를 써도 정작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었다. 흐릿한 기억의 편린 속에 점점이 박힌 짤막한 순간들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내 팔꿈치에 가시를 꽂던 황태자. 황태자를 향해 호통을 치던 마계왕. 대답 대신 가시를 더욱 지그시 누르던 황태자.
그 끝에 당신은 쓰러졌지, 아마.
그리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던가.’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황태자의 목을 조르던 손을 풀고서, 손을 뻗어 허물어지던 그의 몸을 받아 안았던 것도 같다. 그 직후에 마계왕이 되뇌던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이제 걸음은 멈출 수 없게 되었노라고. 오늘이 단지 시작일 뿐이라고.
“…….”
그 비웃음 섞인 말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나도 황태자를 받아 안은 채로 의식의 끈을 놓치고 말았으니까.
그러니까…….
“전하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브라쉬는 선뜻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에 저도 모르게 가슴 한쪽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아니겠지.
브라쉬의 커다란 입이 열린 것은, 불길한 예감이 뇌리에 들러붙어 오려던 무렵이었다.
“아, 인간의 황태자라면 무사하다, 꾸익!”
“그럼…….”
“아직 자는 중이다. 저녁에 뭐 먹을까 생각하다가 질문을 늦게 들었다. 미안하구만, 꾸익.”
“…….”
한 대 때릴까.
아니, 그건 몸이 좀 나은 다음에.
데미안은 슬며시 고개를 치켜드는 억하심정을 지그시 억눌렀다. 그 사이, 브라쉬가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오크 족장의 입가에는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흘 만에 깨어났으니 제법 얼떨떨하겠지. 궁금한 것도 많을 테고. 안 그런가, 꾸익?”
“물론입니다.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당연히. 흠흠, 꾸익!”
브라쉬가 목청을 풀며 빙긋 웃었다.
“우선 제일 궁금해하고 있을 인간의 황태자에 대한 소식부터. 그분은 무사하시네. 크게 다치지도 않았고. 다만 충격이 컸는지 아직 눈을 뜨지는 못했어. 자네보다 튼튼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만, 꾸익.”
“…….”
다행이다.
데미안이 안도하며 내뱉는 한숨 사이로 브라쉬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했던 미노타우로스도 멀쩡하네. 갈빗대가 서너 군데쯤 나가고 폐를 살짝 다치긴 했는데, 그건 본인 기준으로는 침 바르면 낫는 거라더구만, 꾸익.”
“…….”
그것도 다행.
워낙 튼튼한 우루스라면 그럴 법도 하다.
“거기에 자네까지. 도시를 구한 영웅 셋이 결과적으로 모두 무사해서 정말로 다행이야. 그날 인간의 황태자와 자네 등이 보여준 활약과 희생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도시는 쑥대밭이 되었겠지, 꾸익.”
“도시는…… 괜찮은 겁니까?”
“보시다시피, 꾸익.”
브라쉬가 건장한 어깨를 으쓱였다.
“거의 아무런 피해를 입지도 않았어. 그날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전장을 배회하던 모든 좀비가 황태자를 따라 뛰어가더군. 협곡 속에서 폭발했고. 만약 그 폭발이 전장에서 일어났다면…… 생각도 하기 싫군. 도시가 파괴되는 건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 테니까.”
“그 정도였습니까.”
“말도 말게. 폭발이 일어난 지점은 협곡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렸네. 그 주변은 절벽이 통째로 녹았다가 굳으면서 유리로 된 매끈한 벽이 만들어져 버렸고 말이지. 그뿐일까. 한참 떨어진 이곳 도시의 성벽마저도 우르르 흔들렸을 정도였네. 조금만 진동이 강했다면 무너졌을 걸세, 꾸익.”
“…….”
그랬구나.
새삼 그 난리통에서 살아남았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았다. 아마도 그건 이쪽을 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심정이겠지.
“어쨌건- 꾸익.”
설명을 이어가던 브라쉬가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실은 이상한 점이 있네, 꾸익.”
“이상한 점이라시면?”
“인간의 황태자가 거의 매일, 매시간마다 잠꼬대를 심하게 하고 있지, 꾸익.”
“잠꼬대를 말입니까?”
데미안은 의아함을 느꼈다. 잠꼬대라니. 한데 그게 저렇듯 심각한 표정으로 이상하다고까지 말할 일이던가.
그 이유는 곧 돌아온 브라쉬의 대답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자네와 누군가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고 있다네. 알게스? 아가레스? 아케로스? 대략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혹시 아는 이름인가, 꾸익?”
“아뇨. 모릅니다.”
물론 안다.
마계왕의 이름이니까.
그러나 딱 잘라 거짓말을 했다. 아픈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안 되겠다. 내 눈으로 황태자를 살펴봐야겠다. 그러기 전에는 안심이 되지가 않을 것 같다.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지금 가보려고, 꾸익?”
“예.”
“그럼 곤란한데, 꾸익.”
“어째서입니까.”
“인간 데미안, 냄새 난다, 꾸익.”
“예에?”
“사흘 동안 누워만 있었다. 머리도 안 감고 양치도 세수도 안 했다. 어휴 더러워, 꾸익.”
“……그냥 안내나 해주시죠.”
다행히 황태자는 바로 옆방에 누워 있었다. 곤히 잠든 황태자의 모습에 다시금 안도의 한숨이 남몰래 흘러나왔다.
그러나 황태자의 목덜미에 새겨진 피멍을 보면서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
그날의 나는, 그 순간의 내 손아귀는, 저렇듯 피멍이 새겨질 정도로 독하게 황태자의 목을 졸랐던 거였다.
가능하다면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황태자에게 다가가면서도, 그의 곁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면서도, 잠든 그의 곁을 지키는 동안에도 내내 그러했다.
오직 황태자의 목덜미에만 시선이 갔다. 선명한 멍 자욱에만 눈길이 사로잡혔다.
미안해서? 혹은, 그날의 행동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스스로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모르겠다.
그저 바라건대, 황태자가 어서 눈을 떠주면 좋겠다.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당신의 곁을 지키고 싶노라 말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물어보고도 싶다.
‘당신은 언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던 걸까.’
마계왕.
역혈의 심법.
파멸적이던 각성까지.
그동안 혼자서만 그 모든 사실을 품듯이 알고서, 자신을 과잉보호하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황태자의 모습이 뒤늦게야 훤히 그려졌다.
그래서였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내게도 알려달라고. 한 번쯤 그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어서 눈을 뜨십시오, 전하.’
여전히 온몸이 아프고 쓰리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하는 당신의 모습이 더욱 아프고 쓰라리다.
그날, 데미안은 간절히 기원하며 황태자의 곁을 밤새도록 지켰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러하였다.
그동안 잠든 라키엘에게는 아무도 모를, 기적과도 같은 기연이 일어나고 있었다.
……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