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기적 같은 기연 (2)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소에는 믿지 않지만, 결정적이고도 간절한 순간에는 잠깐이나마 진심으로 갈구하게 되는, 그런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지금, 이곳 크라노스 시가지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그런 기적을 바라는 중이었다.
“자네 들었나? 황태자 전하께서 아직도 눈을 못 뜨고 계시다던데?”
“당연히 들었지요. 벌써 열흘째 의식을 못 찾고 계신다고……. 그러니까 제가 여기 나온 게 아니겠습니까?”
“허허. 자네도 기도를 올리려고?”
“예. 아마 어르신도 비슷하신가 봅니다?”
“물론일세. 내 아들이 전하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아, 그날 북문에서 싸웠던 아드님 말이지요? 다친 데는 좀 괜찮습니까?”
“괜찮다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엄살이 늘어서 큰일일세, 허허.”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은 무슨. 전하께서 눈을 뜨셔야 진짜 다행인 게지.”
“하긴…… 예.”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의 얼굴도 수심에 잠겼다. 그 곁의 아낙도 비슷한 표정으로 두 손을 꼭 모았다. 엄마를 따라 나온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어른들의 틈바구니 너머, 얼핏 보이는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았다.
툴룬 상단 본부 건물이었다.
“엄마, 저기서 황태자님이 코오 하는 거야?”
“그렇단다. 우리 전하께서 얼른 일어나시도록 기도를 드려볼까?”
“응! 기도!”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성벽 복구 작업에 동원된 인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민이 광장에 모였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상단 본부를 바라보며 기원했다. 황태자가 하루빨리 의식을 찾기를. 거룩한 용기와 용감한 희생으로 도시를 구원한 영웅이 눈을 떠 주기를.
그런 마음은 사람들의 틈바구니 한켠에 스며들어 있는 좀비, 툴룬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그나저나 큰일이로군.’
좀비 툴룬은 두툼한 후드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다행히 주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렇듯 태연히 광장을 거닐며 상단 건물을 바라볼 수가 있는 것이지만.
‘설마하니 황태자 전하께서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실 줄이야.’
문득, 열흘 전의 일이 떠올랐다.
언데드 군단의 침공이 벌어졌던 날이었다. 자신은 운이 좋게도 다치지 않았다. 전투의 막바지에 카르투의 자폭 명령이 전해져 오기도 했지만, 상큼하게 무시했다.
자신과 함께 혼신의 연기력(?)을 선보였던 북문 수비병들도 모두 무사했다. 다행이었다. 덕분에 미련 없이 잠적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줄곧 숨어서 지냈다.
좀비의 몰골 때문이었다.
몇 차례인가, 상단 건물로 들어가려는 시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만두었다. 황태자가 머물고 있기 때문인지, 경계가 너무나 삼엄했다. 몰래 들어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쪽의 정체를 아는 황태자의 호위들에게 사정을 밝히고 들어가자니,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상단 건물 내에 상주하는 눈과 귀가 너무 많은 까닭이었다.
만약 하인이나 일꾼 중의 누군가가 호위에게 부탁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그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외손녀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낮은 가능성이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런 시도는 꺼려졌다. 아이가 충격을 받는 것만큼은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하여 그날 이후 걸인으로 위장하였다. 일이 좀 더 잠잠해지면 거취를 정하리라 다짐하였다. 한데 좀처럼 일이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가 열흘째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좀비 툴룬은 그 며칠 동안 변화한 도시의 분위기를 돌이켜보았다.
‘처음엔 다들…… 환호했더랬지.’
한꺼번에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 언데드 군단. 놈들을 유도하고, 무너지는 협곡 속에서도 크게 다친 곳 없이 생환한 황태자. 영웅의 희생과 업적에 도시의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다. 환호하고, 찬사를 머금었다.
한편으로 기다렸다.
영웅이 눈을 떠 주기를.
하지만 기대는 곧 걱정으로 바뀌어야 했다. 혼절한 지 열흘이 지나고 있음에도, 황태자는 소생의 어떠한 기색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난감했다.
설마 이대로 황태자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자신의 은인이자 도시를 구원한 영웅의 마지막이 이런 식은 아니었으면 싶었다.
‘그러니 전하. 부디, 모쪼록, 눈을 뜨고서 건재함을 알려주소서.’
좀비 툴룬은 고개를 숙이고서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 곁의 무수한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마음으로 머금은 기도와 염원의 숨결이 황야의 바람에 실렸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누군가의 옷깃에 묻은 고양이털 한 가닥을 흔들었다.
미미한 고양이털이 바람결에 두둥실 떠올랐다. 날려갔다. 상단 본부 건물을 향해.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창가에 놓인 침대 머리맡으로. 마침내 침대에 누운 라키엘의 이마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라키엘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속에서는 기적 같은 작은 기연이 생겨나고 있었다. 열흘 내내. 한시도 멈추지 않고서.
♣
딩동!
[오장육부가 긴급회의를 소집합니다.]
[오장육부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씁니다.]
[심장 : 야. 큰일 났다. 진심 비상사태임. 이거 어떡하냐?]
오장육부의 리더, 심장은 미간을 찡그렸다.
난감했다. 설마 이런 사태가 벌어질 줄은 몰랐는데. 막막한 심정에 나머지 오장육부를 돌아보았다.
[허파 : 흐프헙…… ㅜㅜ]
[대장 : 후우…… 괄약근이 안 풀려 ㅠㅠ]
[간장 : 여기도 마찬가지임. 클났다 ㄹㅇ]
[위장 : 배고파 밥 줘 응애!]
[콩팥 : 이 사태에도 밥이 넘어가냐 ㅉㅉ]
역시나 다른 녀석들의 반응도 매한가지였다. 몸뚱이가 열흘째 눈을 못 뜨고 있으니 하나같이 의기소침해진 모습들이었다.
심장은 애써 모두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려 애를 썼다.
[심장 : 쯧. 우리 이럴수록 대책을 논의해봐야지, 응? 그래도 우리가 그 괴물 눈깔 앞에서도 의연하게 대처를 했잖냐.]
[허파 : ……흐픕!]
[대장 : ㅋㅋㅋ 허파 형님 경기 일으켰지 말입니다ㅋㅋㅋ]
[간장 : 근데 마계왕인가? 그놈 눈빛 진심 장난 아니긴 했음ㄹㅇ]
[위장 : ㄹㅇㅇㅈ. 융털돌기 쪼그라들더라.]
[콩팥 : 난 살짝 지렸음!]
[심장 : 그래도 너희가 그때 모두 나서줘서 우리가 산 거임. 나 진짜…… 그때 처음으로 멈출 뻔했다?]
심장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이었다. 열흘 전, 마계왕과 눈이 마주쳤던 마지막 순간. 라키엘이 마계왕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하던 그 순간이었던가.
실로 엄청난 타격이 신체에 가해졌다. 단순한 물리적 타격과는 차원이 달랐다. 영혼 자체를 근원에서부터 말살하는 종류의 충격이었다.
그 결과, 심장마비가 왔다. 즉사의 절차가 시작되었다. 신화적 존재와 감히 눈을 마주친 필멸자가 치러야 할, 피할 수 없는 대가였다.
[심장 : 그때 너희가 전부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서 나 지켜줬잖냐. 다들 막 간절하게 응급 마사지 해주고. 나 그때 좀 감동받았음.]
[허파 : 흐픕……ㅋㅋㅋ 흐프픜ㅋㅋ]
[대장 : 사실은 ㅈㄴ 밟았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지 말입니다ㅋㅋ]
[간장 : 그때 조금만 더 밟았으면 엘○스크롤에서 랜덤 커스터마이징 누른 거처럼 대충 생겨먹게 만들 수 있었는데 아ㅋㅋㅋㅋㅋ]
[위장 : 지금도 성의 없게 생겼는데?]
[콩팥 : 몸뚱이 닮아서 그런 듯ㅋㅋㅋ]
그렇듯 모두가 나서준 덕분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감지한 오장육부가 모조리 나서서 대응을 했다. 흔들리던 마나써클을 강제로 회전시켰다. 신체의 모든 마나를 심장으로 응축했다.
인위적인 충격을 가했다. 전기로 심장을 마사지하듯이. 멈추려던 심장에 펌프질을 했다. 될 때까지 계속. 포기 없이 집요하게.
덕분에 간신히 심장마비를 모면할 수 있었다. 즉사를 막아냈다. 거기까진 좋았다. 한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심장 : 어쨌건, 일단 위기를 모면한 건 좋은데. 아, 이거 난감하네. 다들 지금 뭐가 문제인진 잘 알지?]
[허파 : 허파?]
[대장 : 땡이지 말입니다ㅋ]
[간장 : 그때 심장마비 막으려고 무리하게 모은 마나가 심장에 고여서 안 빠져나가는 게 문제 아님?]
[위장 : 바로 그거지. 이래서 고인물이 문제임 ㄹㅇ]
[콩팥 : 고여 있는 마나, 그거 잘하면 마나하트 되겠던데? 어쨌든 좋은 거 아니야?]
[심장 : 좋기는 개뿔.]
심장의 미간이 더욱 찡그려졌다.
[심장 : 마나하트가 생기는 것까진 좋은데, 그걸 생성하느라고 신체의 다른 마나까지 모조리 다 빨아들이고 있는 게 문제지. 그래서 우리 몸뚱이가 마나가 부족해서 못 깨어나고 있잖냐. 이러면 뭐가 되겠어.]
[허파 : 허파?]
[대장 : 또 땡ㅋㅋ 정답은 식물인간 아닙니까?]
[간장 : 식물이면 좋은 거 아님?]
[위장 : 녹색 혁명! 뻑 예!]
[콩팥 :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ㅋㅋㅋ]
[심장 : ……ㅅㅂ]
심장의 말투가 심각해졌다.
[심장 : 식물인간 되면 우리 몸뚱이 얼마 못 살고 죽을걸? 기대수명도 못 늘리잖냐.]
[허파 : 허…… 픕?!]
[대장 : 그럼 어떡합니까? 누가 깨워줘야 하나?]
[간장 : 괄약근 좀 풀어보면 어떻겠음?]
[위장 : 내가 꼬르륵 소리로 모스 부호 만들어서 주변에 알려볼까? 좀 흔들거나 때려서라도 깨워달라고?]
[콩팥 : 그런 걸로는 택도 없을 듯.]
[심장 : 맞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차라리 리버스 엔지니어링의 원리를 응용해서 기절할 때의 상황을 거꾸로 재현해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허파 : ……헢?]
[대장 : 리버스 엔지니어링이 뭡니까?]
[간장 : 개발자가 하는 일을 반대로 하는 거 아님?]
[위장 : 그럼 치킨집부터 차려?]
[콩팥 : 칰ㅋㅋ킨집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간장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놈앜ㅋㅋㅋ]
[심장 : …….]
심장은 쑴펑쑴펑 피어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큰일이다. 이놈들, 진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자각을 못 하고 있다. 이런 놈들을 데리고서 지옥에 발가락 한 짝 걸치려 들고 있는 몸뚱이를 살려야 한다니. 앞날이 막막해졌다.
차라리 외부에 어떻게든 이 사태를 알리면 좋을 텐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텐데. 한데대체 어찌해야 그게 가능해질까.
[심장 : 차라리 우리가 목소리라도 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럼 며칠째 우리 몸뚱이를 간호하는 저 흑발 호위한테 상황을 알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
심장은 진심으로 탄식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당장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막상 떠오르는 현실적인 방법이 좀처럼 없다. 생각할수록 막막해졌다.
한데 그때였다.
……스윽.
몸뚱이, 라키엘의 침대 곁에서 간호를 하던 흑발의 호위가 몸을 일으켰다. 어딜 다녀오려는 걸까. 아니었다. 이쪽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어쩐지 한참, 날카로운 눈길을 빤히 던져 왔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거기.”
흑발 호위의 입이 열렸다.
“조금 전부터 전하의 몸속에서 떠들어대는 너희는…… 누구지?”
[심장 : ……!]
데미안의 의혹에 찬 물음이 떨어져 내려오는 순간, 심장과 오장육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기겁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