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천기누설의 보따리 (1)
“조금 전부터 전하의 몸속에서 떠들어대는 너희는…… 누구지?”
데미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상했다.
분명 이 침실에는 다른 이가 없다. 오직 자신과 황태자뿐이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기이한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청각을 자극해 왔다.
처음엔 착각인 줄로만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계속해서 거슬렸다. 귀를 기울이고, 집중력을 높였다. 그러자 차츰 명확하게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떠드는 말소리였다. 한데 소리가 들려오는 지점이 괴상하기가 짝이 없었다. 황태자의 몸속이었다. 배와 가슴, 곳곳에서 작은 난쟁이들이 수다를 떠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
설마 이것도 각성이 중단된 후유증일까. 혹은 마계왕이 뿌린 고약한 씨앗의 여파인 걸까. 아니, 어쩌면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유지되고 있는 마나 역행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감각이 지나치게 날카로워져 버렸으니까.
‘착각이 아니야.’
그는 확신했다.
증거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의 몸속에서 와글와글 떠들어대던 목소리들이, 자신의 물음을 받자마자 단숨에 조용해져 버린 것이 가장 명확한 증거였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발각당한 좀도둑처럼. 혹은 적진에 숨어들었다가 들킨 첩자처럼. 시끄럽던 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뚝 끊겨 버렸다.
그래서 더 티가 났다.
“말해. 이제 와서 입을 닫고 있어 봐야 그 안에 있다는 거, 다 안다.”
혹시 흑마법사가 아무도 모르게 황태자의 몸속에 저주의 씨앗을 남긴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데미안의 눈길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덕분에 심장과 오장육부는 기겁하고 말았다.
[심장 : 쉿, 다들 조용.]
[허파 : ……흡, 프흡, 콜록!]
[대장 : …….]
[간장 : …….]
[위장 : ……꼬르륵?]
[콩팥 : ……주르륵?]
“방금 누구야.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데미안의 눈빛이 한결 살벌해졌다.
[허파 : ……허픕, 픕!]
“이제 와서 아닌 척해도 소용없다.”
[심장 : 아, 씨.]
데미안의 한결 서늘해진 눈빛을 보며 심장과 오장육부는 깨달았다. 실수했다. 차라리 처음 덜미를 잡혔을 때 그대로 태연한 척 수다를 이어갔어야 했다. 그랬으면 티가 나지 않았을 텐데. 너무나 놀란 나머지 합죽이가 되어 버린 게 잘못이었다.
한편으로 오장육부는 다들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의문에 잠겼다. 저 흑발의 호위가 대체 어떤 수로 자신들의 말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식 밖의 사태였다.
일단은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자신들의 몸뚱이가 저 흑발의 호위에게 이상한 의심을 받을 것 같았으니까.
심장과 오장육부는 순식간에 눈짓을 교환하며 작전을 짰다. 목표는 자신들의 주인인 몸뚱이가 쓸데없는 의심을 사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곧 답이 나왔다.
다들 목청을 가다듬었다.
[심장 : 크흠흠! 그곳에 있는 인간이여,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허파 : 허프흠! 흠흠! 프흠!]
[대장 : 우리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니, 인간치고는 제법이지 말입니다.]
[간장 : 그러게 말이지요. 수호천사의 존재감을 감지하는 하계의 인간이라니.]
[위장 : 놀랍습니다. 기나긴 필멸자의 역사에서 이런 일을 해내는 인간과의 조우를 겪을 줄이야.]
[콩팥 :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천사장께서 얼마나 놀라실까요.]
……그러했다.
다들 목소리를 성스럽고도 근엄하게 꾸몄다. 혼신의 성대모사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를 한껏 코스프레 했다.
오장육부의 대답을 들은 데미안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수호천사?”
방금, 저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을 분명 그렇게 들은 것 같았다. 수호천사라니. 뜻밖의 정체였다. 한편으로는 의심이 들었다. 과연 저 말이 맞을까. 그의 눈길이 한결 신중해졌다.
“설마, 그쪽들이 전하에게 깃들어 있는 수호천사라는 말인가?”
[심장 : 그러하다네, 인간이여.]
[허파 : 허프흠흠! 흠!]
[대장 : 우리의 존재감을 느낀 것도 모자라 의심까지 하다니, 확실히 걸출한 인간인 듯하지 말입니다.]
[간장 : 동시에 건방지기도 하군요.]
[위장 : 당황스럽습니다. 수호천사로서의 기나긴 세월을 지나며 이렇듯 필멸자의 의심을 받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콩팥 : 천사장님께서 이 일을 들으면 얼마나 웃으실지 벌써 눈에 훤하군요. 하하핫.]
“…….”
오장육부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천사들이여.’ 따위의 순박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욱 짙은 의심의 눈길을 번득였다.
“증거부터.”
모든 믿음에는 최소한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특히 황태자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오장육부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즉석에서 짜낸 증거들을 회전초밥 접시 내밀듯 뻔뻔하게 촵촵 꺼내놓았다.
[심장 : 그대가 우리를 의심하는 것도 이해는 되는군. 그래,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여 줄 증거가 필요하다고? 쉽군, 쉬워.]
[허파 : 허…… 파하하하…….]
[대장 : 우리의 수호 대상인 라키엘이 그대와 처음 만난 때를 말해볼까 싶은데…….]
[간장 : 그때 라키엘이 그대를 보자마자 이런 말을 하였더랬지? 쯧쯧. 안타깝네. 이런 싸구려 진통제를 왜 먹지? 이런 거 먹고 잠이 오나? 라고 말이야.]
[위장 : 당시에 그대는 이렇게 대답하였지. 뭐? 누구냐, 넌. 이라고.]
[콩팥 : 그러자 라키엘이 말했지. 그쪽이 필요로 할 사람, 이라고.]
[심장 : 거기에 그대는 이렇게 대꾸하였지. 혹시 약 팔러 온 놈인가? 라고. 기억이 나는가?]
심장을 비롯한 오장육부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라키엘과 데미안이 처음 만났던 때 나누었던 첫 대화의 내용 그대로였다.
물론 당시엔 위장이나 콩팥 등은 아직 눈을 뜨기 전이었다. 하지만 단지 눈만 뜨지 않았을 뿐, 라키엘의 신체의 일부로서 모든 활동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데미안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
정확하다. 저들이 저 대화 내용을 어떻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도록 알고 있는 걸까. 이상했다. 한편으로는 정말로 황태자의 수호천사인 건가 싶었다.
‘적어도…… 흑마법사의 농간으로 생겨난 놈들은 아닌 듯한데.’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놈들이라면, 그때 당시의 일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럼 뭘까. 정말로 황태자의 수호천사가 맞단 말인가.
데미안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오장육부가 증언의 쐐기를 박았다.
[심장 : 데미안 카이엔. 그대는 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를 지키기 위하여 온몸을 던졌다.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에 맞아 죽을 뻔했던 나를 밀어내고, 대신 잔해에 깔려 다리를 다쳤지. 또한, 그대는 내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하여 단신으로 미노타우로스에 맞서 싸우는 용맹과 헌신을 보였도다.]
“…….”
듣는 순간 데미안은 깨달을 수 있었다. 황태자가 언젠가 자신에게 해준 말이었다. 어디서? 크레모에서. 언제? 심문관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던 때에. 자신을 구하러 왔던 당시에 모두의 앞에서 꺼냈던 말이었다.
그때 저 말을 들으며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처음으로 자신을 알아보아 준 사람의 말이었다.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던 자신의 헌신을 황태자가 말해준 순간이었다. 어쩌면, 저 날의 저 말이 아직껏 자신을 황태자의 곁에 남겨두었을지도 모를, 그런 말이었다.
“당신들은, 정말로 전하의 수호천사인 겁니까?”
[심장 : 그러하도다, 필멸자여. 그리고 우리는 그대에게 긴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피치 못하게 목소리를 내게 되었지.]
“긴급한 상황이라니요?”
데미안은 긴장했다. 긴급한 상황이라니. 그 말이 황태자의 수호천사일지도 모를 존재에게서 나오니 절로 덜컥 걱정이 되었다.
“설마, 전하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못한 것입니까?”
그러잖아도 열흘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황태자였다. 필시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어쩌면 저들이 그걸 알려줄지도 모른다.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심장 : 그렇지. 이제야 우리의 뜻을 알았구나, 필멸자여. 장하도다.]
심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호천사 코스프레(?)가 통했음을 자축하며 나머지 오장육부와 몰래 하이파이브를 나누었다. 한편으로는 근엄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심장 : 하여 그대가 긴급히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를 도와야 할 듯하도다.]
“제가 말입니까?”
[심장 : 그러하다. 우리는 라키엘의 행운을 관장하는 수호천사일 뿐, 필멸자의 생사에 직접 관여할 수는 없음이니. 지금은 그대의 직접적인 조력이 필요한 순간이라 판단하였도다.]
“제가 어떤 조력을 하면 되는 겁니까. 그리고…… 전하께서는 어떤 상황이신 겁니까.”
[심장 : 라키엘은 그대의 각성을 저지하기 위하여 마계왕과 맞섰고, 당시 받은 큰 충격을 상쇄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지. 그 결과, 심장에 마나하트가 생성되는 중이긴 하나…… 그 때문에 신체의 다른 부분의 마나가 부족해진 까닭으로 의식을 찾지 못하는 중이도다.]
“하면…….”
[심장 : 그대가 적절하고도 강력한 자극을 가하여 강제로라도 라키엘을 깨워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데미안의 눈빛이 번득였다. 설마 뺨이라도 때려야 할까. 혹은 그보다 더한 짓이라도 벌여야 할까. 어쩌면 금기를 깨는 짓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비장한 각오가 절로 들었다.
한데 돌아오는 수호천사의 대답은…….
[심장 : 오이즙을 짜서 라키엘의 입에 흘려 넣도록 하라.]
“……예?”
[심장 : 어서.]
심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데미안은 난처함을 느꼈다.
“…….”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데없는 오이즙이라니. 농담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마냥 농담으로만 치부하기엔 수호천사의 목소리가 워낙 진중하고 근엄하였다.
결국, 데미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지요.”
일단 시도나 해보자 싶었다. 그는 금방 오이즙이 담긴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손수건에 오이즙을 흥건하게 적셨다. 그 한쪽 끄트머리를 라키엘의 입에 살포시 물렸다.
똑…… 똑…….
손수건에 배어든 오이즙이 천천히 라키엘의 입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이런 방법 따위로 열흘간 정신을 못 차리던 황태자의 의식을 깨울 수 있을까.
데미안이 일말의 의구심을 품는 순간, 오이즙의 효력이 직빵(?)으로 드러났다.
“……그읍?”
곤히 잠들어 있던 라키엘이 헛구역질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렸다. 구역질이 나올 만큼 비렸다!
“우웁, 쿨룩! 콜록!”
간혹 오이를 한 입도 못 먹는 사람들이 있다. 입에 물기만 해도 너무 비리게 느껴져서 그렇다. 그럴 때마다 남들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받는 서러움을 겪기도 한다. 이렇게 시원한 오이가 왜 비리냐고, 참 입맛 이상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느끼는 비린 맛은 엄연한 사실이고, 실화였다. 체질 때문이니까. 어쩔 수 없는 고충이었다.
라키엘이 바로 그러한 체질이었다. 그냥저냥 오이를 비리다고 느끼는 정도가 아니었다. 입에만 물어도 헛구역질을 할 정도였다. 그런 라키엘의 특성을 오장육부, 특히 위장은 일찌감치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덕분에…….
“그으읍!”
너무나 비려서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오애애액-”
참을 수가 없었다.
더는 기절해 있을 수도 없었다.
라키엘은 헛구역질을 게워내며 눈물 콧물을 흘렸다. 그러다가 문득,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는 팝업 알림을 발견했다.
딩동!
그것은, 용기와 재치를 겸한 희생으로 한 도시를 구원한 자에게 마땅하게 주어진, 막대하고도 묵직한 보상 꾸러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