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천기누설의 보따리 (2)
오이는 싫다.
먹으면 비린 맛이 너무 심하게 난다. 남들은 안 그렇다고 하는데.
시원하다고들 하는데. 어째서 나만 비리게 느끼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으니까.
덕분에 오이는 싫다.
먹으면 헛구역질이 난다. 엄마는 안 그렇다고 하셨는데. 왜 반찬 투정을 하냐고 하셨는데. 어째서 헛구역질이 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먹을 때마다 그랬으니까.
그래서 오이가 싫다.
자꾸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오이 무침이 싫어서 투정 부리다가 심하게 혼이 났던 날. 울던 나를 가만히 달래던 아빠 손길이 생각난다.
함께 손을 잡고 걷던, 조금은 시큼한 냄새가 나던 초여름 밤의 골목길이 떠오른다.
“우욱.”
라키엘은 헛구역질을 참았다. 처음엔 어째서 자신이 헛구역질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엄청나게 깊은 잠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사실은 꿈도 꾸고 있었는데. 그런데 왜.
그때였다.
……딩동.
온전히 깨어나지 못하여 멍한 의식 사이로, 맑은 알림음이 울렸다. 무슨 일일까. 눈길을 들었다.
너무 오래 눈을 감고 있었던 탓일까. 여전히 눈앞은 뿌옇게 흐렸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팝업 알림창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보상?’
팝업에 쓰여 있는 ‘보상’이라는 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덕분에 다시금 고개를 갸웃. 내가 뭘 했길래 보상을 준다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내가 잠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억을 더듬었다. 뿌연 안갯속을 더듬거리며 걷는 것처럼. 혹은 불이 꺼진 까만 방에서 서랍을 뒤적이는 것처럼. 의식의 손끝에 닿는 기억의 조각들을 매만졌다. 그제야 조금씩 떠올랐다.
‘아.’
자폭을 감행하던 언데드 군단. 무너지던 협곡. 추락한 자신. 함께 뛰어내린 데미안. 역혈의 마공. 각성. 마계왕. 그리고…….
‘깨어나던 마계왕과 눈이 마주쳤는데.’
끝내 그 눈길을 피해내지 못하였다. 거부할 수 없는 죽음과 맞닥뜨렸다. 그 마지막 순간에 뻗어오던 데미안의 손길도 떠올랐다.
그 손길이 날 받아냈던가. 혹은 착각이었던가. 알 수 없다. 그 뒤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어째서 데미안이 저런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녀석이 곁에 앉아 있다. 나는 누워 있다. 그러니까 내 침대 곁을 녀석이 지키고 있던 걸까. 그럼 난 무사한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한데 데미안 녀석은 왜 저러고 있는 걸까.
그러니까, 울먹이는 녀석의 모습은 처음이다.
착각인 줄 알았다.
잘못 본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점차 또렷해지는 눈길을 들었다. 차츰 선명하게 보였다.
미세하게 떨리는 데미안의 눈썹. 그 아래로 일렁이듯 젖어드는 눈매. 코끝은 숨기지 못하여 붉었다.
“너 왜 우냐.”
“아닙니다, 전하.”
“아니긴 뭐가. 맞는데.”
“……그야, 전하께서 마침내 눈을 뜨셨으니까요.”
“그럼 아주 아침마다 그렇게 울면서 기뻐하지 그러냐.”
“그런 아침이 열흘 만에 왔으니까요.”
“응?”
무의식중에 멈칫했다. 열흘이라니. 내가 그렇게 오래 누워 있었다는 걸까. 데미안 녀석은 농담을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지금 열흘 만에 눈을 뜨셨습니다.”
“……내가?”
“예.”
“그런데 너는?”
“예?”
“괜찮냐고.”
진심으로 물었다. 덜컥 걱정이 들었다. 협곡에서의 그 사건이 열흘 전의 일이라면, 그동안 녀석은 어떤 상태였던 걸까. 각성은, 마계왕은, 모두 어떻게 된 걸까.
“저는 당연히…….”
데미안 카이엔은 황급히 콧등을 찡그렸다. 이유는 달리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렁그렁해진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주군 앞에서 감히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설령, 열흘 동안 혼수상태였던 주군이 깨어나자마자 일개 호위의 안위부터 물었을지라도. 그 마음에 감동하였을지라도.
감히 그런 티를 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했다.
자신은 호위로서 자격이 없으니까. 실격이니까. 넘어선 아니 될 선을 넘어 버렸으니까. 속죄하여야 함이 마땅하니까. 아니, 속죄조차도 허락을 구해야 할 입장이니까.
“괜찮습니다.”
당연히 괜찮아야 한다. 주군 앞에선 안 괜찮아도 끝까지 괜찮아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며, 최소한의 책임이다.
‘나는…… 감히 주군의 목을 졸랐으니까.’
데미안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날, 열흘 전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주군을 구하기 위해 협곡으로 뛰어내렸던 자신. 붕괴에 맞섰지만, 주군을 끝까지 지켜내지는 못하였다. 아니, 마지막에는 오히려 주군을 해하려 하였다.
각성.
마계왕.
뜻밖의 폭주까지.
자신의 의지 밖의 일이었다. 나름 애쓰며 맞섰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감에 짓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도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어쨌건 그때 주군의 목을 조른 건 자신의 손아귀였다. 주군을 거의 죽일 뻔했다.
아직도 미처 풀리지 않은, 주군의 목에 누렇게 남은 멍 자국이 그 증거였다.
“저보다도,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으음, 네 태도가 불편한데.”
“……예?”
“너 왜 이렇게 사근사근해졌냐.”
“그야…….”
이제 떠날 생각이니까요.
데미안은 뒷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솔직한 진심이었다. 주군을 죽일 뻔한 자신이었다.
이제는 주군의 곁을 지킬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동적인 기분? 절대로 아니었다. 주군이 누워 있던 지난 열흘 내내 품었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황태자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자격이 없는 자신은 이만 물러나겠노라고. 직접 주군께 밝히고 허락을 받은 뒤에 떠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동안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한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도 하였다.
그런데…….
“…….”
막상 말을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내키지가 않았다.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계속 주군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이런 자신이 뻔뻔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정말로 솔직한 진심은 그러하였다.
“너 진짜로 괜찮냐?”
“…….”
이쪽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황태자. 나의 주군이시여. 그동안 당신의 곁을 지켜드릴 수 있어서 진정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떠나야겠습니다. 저의 정체를 알아 버렸습니다. 역혈의 심법을 멈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또 언제 그런 일이 생겨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가 언제 또 깨어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저는 두렵습니다.
제 손으로…….
“날 해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지?”
“……!”
데미안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생각을 읽은 걸까.
라키엘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다 보인다, 다 보여.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이었다.
데미안 녀석이 왜 저러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오장육부 덕분이었다. 심장이 알려주었다.
지난 열흘 동안 저 흑발의 호위가 내내 곁을 지켰노라고. 그동안 몇 번인가, 탄식처럼 홀로 중얼거린 말이 있노라고.
심장이 그걸 들었고, 기억하고 있었으며,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덕분에 데미안 녀석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째서 저렇듯 서글픈 눈빛을 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철렁했다.
‘날 떠나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녀석은 무조건 내 곁을 지켜야 한다. 그것만이 녀석도 살고 나도 살 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옆에 있어야 마계왕의 강림을 막아줄 수 있으니까. 함께 막아내야 하니까.
‘그럼 일단은…… 퇴사(?) 결심부터 돌려놔야겠구만.’
가장 시급한 일이 보였다.
하여 보상 팝업창을 옆으로 치웠다. 물론 그 와중에도 팝업 내용을 슬쩍 살펴보는 건 잊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은 보상 알림 목록>
[마나하트 생성]
[비장(脾臟) 오픈]
[오장육부 - 오장(五臟) 수집 퀘스트 달성]
[오행(五行) 순환 시스템 오픈]
[GDP 획득]
[그 외 기타 등등, 이거저거, 이모저모, 블라블라……]
“…….”
솔직히 당장 죄다 열어서 확인하고 싶은데. 일단 지금은 제멋대로 퇴사를 감행하려는 데미안 녀석을 붙잡는 일이 급선무니까 나중으로 패스.
‘나중에, 혼자 한적하게 있을 때 확인하자고.’
아쉬운 마음을 접어 한쪽으로 보관하였다. 눈길을 가다듬으며 데미안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을 곁에 잡아둘 멘트를 신중하게 준비했다.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계왕 때문이지?”
“…….”
스트레이트로 찔렀다. 흔들리는 녀석의 눈빛. 쉴 틈을 주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날, 너도 네 안의 존재를 느꼈을 테지. 덕분에 불안했겠지. 네가 벌인, 앞으로 벌일 수도 있을 일에 불안감과 죄책감을 느꼈겠지. 내 곁을 지킬 자격을 잃었노라 자책하고 있었겠지. 맞나?”
“……예, 전하. 한편으로는 궁금했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어떻게,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를?”
“예.”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내내 역혈의 마나 심법을 금지하셨던 이유가, 절 위험에 내던지길 주저하셨던 이유가 그…… 마계왕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끝내 알아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그래. 그랬겠지.”
덕분에 혼란스러웠겠지. 대부분의 사실을 깨달았겠지. 충격도 받았겠지. 자신이 살아오며 쌓은 기억 대부분이 만들어지고 조작된 것이었다는 진실을 알아 버렸으니까.
어린 시절의 기억도.
어머니와의 추억도.
그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하지만 애써 데미안을 토닥거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녀석도 바라지 않을 터다. 대신 녀석이 진정으로 알기를 원할 대답부터 돌려주었다.
“그럼 솔직하게 말하지.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었다. 너의 정체도. 너의 내면에 자리한 그 존재까지도. 모두.”
“모두…….”
“그래. 처음에 너를 곁에 둔 가장 큰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지. 열흘 전과 같은 사태를 어떻게든 막고 싶었으니까.”
“그럼 전하께서는…….”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간단해. 이미 내 수호천사들과 대화를 나누었을 텐데.”
태연하게 거짓말을 섞었다. 오장육부가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귓속말 제보를 참고했다.
침대 머리맡에 치워져 있는, 오이즙에 젖은 손수건을 눈짓했다.
“저것 말이다. 내 수호천사들이 알려준 대로 오이즙을 이용해서 날 깨웠잖아. 맞지?”
“예.”
“하면 이제는 그들의 존재를 믿겠군.”
“아직 조금은…… 다 이해가 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래. 그럴 테지.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그들이 너라는 존재를 알려주고, 미래에 너로 인하여 벌어질 재난을 경고하던 날에도 그러하였으니까.”
“재난…….”
데미안 녀석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됐다.
통한다.
흔들기가 먹혔을 때 그대로 쿡.
핵심을 찔렀다.
“그래서다. 데미안 카이엔. 네가 멋대로 내 곁을 떠나지 않길 바라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전하. 저는…….”
“안다. 위험하지. 언제 그 존재가 다시 눈을 뜨고 주위를 파괴할지 모를 테니까. 그래서 불안하겠지. 그렇지만 말이다. 네가 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그 재난을 막을 수 있는 거라면, 내가 널 붙잡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얼마든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점이?”
“전하께서는 지금, 그 어마어마한 존재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어. 잘 봤어. 자신 있으니까.”
“……방법이 있는 겁니까.”
“물론. 들려줘?”
“부탁드립니다.”
데미안은 앉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라키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좋아. 우선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말하지. 네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 신화적 존재의 자세한 정체와 목적부터.”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의 입에서 그동안 홀로 간직하고 있던, 천기누설의 보따리가 술술 펼쳐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