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아버지의 노심초사 (1)
툴룬 상단장이 모두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의 외손녀인 네일라는 말할 것도 없고, 상단의 모든 일꾼과 하인들이 그의 놀라운 귀환을 반겼다. 그 어떤 이도 그가 좀비의 몸이라는 사실에 반감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몸으로도 용기를 내어 성벽을 사수한 행동에 찬사를 보내었다.
다행히 그건 긴뿌리 감초 농장의 일꾼들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보는 바와 같이 말이다.
“그는 비록 좀비의 몸이 되었으되, 인간이었던 시절의 용기와 결단을 잃지 않았다. 타인을 향한 미덕 또한 지켜냈다. 자신의 몸을 던지는 각오로 크라노스의 성벽을 지켜내는 데에 크게 일조하였으며, 그러한 공훈을 세웠음에도 어떠한 칭송조차 바라지 않고서 기꺼이 초야에 묻히는 삶을 선택하려 하였다.”
라키엘은 잠시 숨을 골랐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전의 농장. 파종을 앞두고서 흙냄새 가득한 드넓은 밭을 뒤로하고서,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이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최근 긴뿌리 감초 농장에 고용된 일꾼들이었다. 또한,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툴룬 상단장을 잘 아는, 크라노스의 토박이들이기도 하였다.
라키엘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하여 나는 툴룬 상단장의 용기와 희생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에게 특별한 보상을 내리려 한다. 바로 이곳, 긴뿌리 감초 농장의 감독관의 지위이다. 툴룬? 이쪽으로.”
툴룬 상단장이 수줍은(?) 표정으로 나섰다. 조금은 살벌한 좀비의 안색임에도 그의 눈빛과 몸짓은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즉, 자신이 감히 이런 직위를 맡아도 되나 싶은 얼떨떨함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를 옆에 세운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자, 여기 일꾼들과는 이미 구면일 테니 딱히 어색하진 않겠지? 모처럼 감독관의 직위를 맡았으니 소감이라도 한마디 해보면 어떨까?”
“어, 음, 제가 그래도 됩니까, 전하?”
“물론.”
당연한 일이다.
긴뿌리 감초 농장의 감독관으로 툴룬만큼 적합한 인물은 제국 전체를 뒤져봐도 없을 것이다. 오직 그만이 감초의 싹을 틔우고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인재인 까닭이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그가 마셨다가 내뱉는 물이 감초 성장의 핵심 비료가 될 줄은 몰랐지.’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열흘 만에 의식을 되찾은 후였던가. 침실 한쪽에 놓인 긴뿌리 감초 샘플 화분 중에 새싹을 틔운 화분이 있음을 발견했다. 동시에 깨달았더랬다. 저거, 좀비 툴룬이 물을 게워냈던 그 화분이었노라고.
그걸 깨달은 때부터였다. 작정하고 툴룬의 복귀를 위한 작전을 펼쳤다. 다행히 성공했다. 적극적인 언론 플레이 덕분에 좀비 툴룬은 크라노스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외손녀와도 감동적인 해후를 치러냈다.
그 후에 자신은? 툴룬을 따로 불러서 며칠 동안 실험을 진행했다. 그가 마셨다가 뱉어낸 물이 정말로 긴뿌리 감초의 발아와 생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예측이 맞았다. 툴룬이 마셨다가 뱉은 물이 특제 비료의 역할을 해 주었다. 이유나 원리는 아직도 상세하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점이 하나 있긴 했다. 툴룬이 긴뿌리 감초 농장의 운영에 핵심이 될 것이란 사실이었다.
그래서였다.
“오직 그쪽만이 농장을 원활히 운영할 수 있어. 그건 이제 스스로도 잘 알 텐데? 그러니 내가 두둑한 급여와 지위를 보장해준 것이고.”
사실이었다.
복귀한 툴룬은 이제 돈방석에 앉을 일만 남았다. 농장의 감독관에 기존의 상단까지 그대로 쥐고 있으니, 그는 이곳 크라노스크 지방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 될 것이다.
“덩달아 네일라도 자네 덕분에 금수저…… 아니, 더욱 풍족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고. 게다가.”
턱, 툴룬의 어깨를 짚었다. 은근한 목소리로 그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사실은 말이야. 자네의 농장 운영 실적이 괜찮게 나오면, 네일라에게 황도 아카데미의 입학과 전액 장학금 혜택까지 보장해 주고 싶은데.”
“……!”
확 커지는 툴룬의 눈매.
역시나 사람을 움직이는 데에는 풍족한 보상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 게다가 그 보상이 본인이 아닌, 자식 손주에게 주어지는 거라면 사람 눈은 더더욱 확 돌아간다. 그건 좀비도 예외가 아니다. 그게 부모이고 할아버지이며 혈육인 법이니까.
그런 덕분이었다.
좀비 툴룬의 움츠러들어 있던 어깨가 쫙 펴졌다. 자신이 좀비 신세라는 자괴감과 위축감은 순식간에 머나먼 은하수 너머로 사라졌다. 대신 그의 눈빛 가득 단호한 의지가 깃들었다. 손녀의 수도권(?) 진학을 이루어내리라는 각오였다.
“흠흠! 다들 반갑소. 다들 구면이라 아시겠지만, 툴룬이오.”
한때 3대 700을 달성했던 의지의 사나이, 자신감을 되찾은 툴룬의 당당하고 걸걸한 인사가 농장 일꾼들을 향했다.
그걸 보는 라키엘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확신이 들었다. 국밥처럼 든든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겠다.
♣
“저는 여러분을 믿었습니다. 재난과 참사가 모두를 덮쳤던 그날, 크라노스를 향한 급속 회군을 감행하는 내내 말입니다.”
마법 구슬을 통해 광장 가득 번지는 목소리. 어쩐지 내 목소리와 약간 다른 것 같아서 어색하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빽빽하게 모인 시민들의 저 눈빛도 부담스럽다. 어째서 다들 저렇게 반짝반짝거리는 눈빛인 걸까. 심지어 날 보며 울먹이는 사람마저 있다.
덕분에 의문이 든다.
내가 저런 존경으로 가득한 시선을 받을 만큼, 훌륭한 사람인가.
‘아니.’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이제 크라노스를 떠나는 순간이라고 해도. 그 출발에 앞서 황태자로서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는 지금 이런 자리라고 하여도. 나는 그렇게까지 훌륭한 사람은 아닌 거 같다. 대체적으로는 말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기에 여러분에게 고맙습니다. 힘겨운 순간을 잘 이겨내 주어서. 다들 잘 버텨 주어서. 그리고 이렇듯, 자격 없는 이에게 과분한 환호성을 보내 주어서 말입니다.”
잠시 호흡을 위해 말을 멈추었다.
광장 가득한 인파가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우레성 같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박수 소리라는 것이 이렇듯 압도적일 수 있는 거였나. 새삼스러운 발견이었다. 저렇듯 거대한 환호성과 박수가 모두 나를 향한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잠시 옆을 돌아보았다. 연단 주위에 늘어선 익숙한 이들이 보였다. 언제나 내 곁을 말없이 지켜주는 사람들이었다.
그 모습을 본 덕분이었을까.
문득, 생각지 못했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또한, 그렇기에 저는, 마젠타노 황실의 황태자로서, 경애하는 크라노스의 여러분에게 진정한 영웅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손을 뻗었다.
세르지오를 지목했다.
내 손길에 움찔하는 특근대의 최고참. 흉터와 수염 자국 가득한 우락부락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연설을 이어갔다.
“세르지오. 그대는 언제나 말없이, 내 곁을 지키며 헌신하였지.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전장에서 기습적인 폭발이 일어났던 순간, 그대는 누구보다도 먼저 몸을 날려 나를 감쌌지. 고맙다. 덕분에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게 되었다.”
“……전하?”
“나는 나머지 특근대원들의 희생 또한 보았다. 파멸적인 폭발과 폭풍 앞에서도 누구 하나 몸을 움츠리지 않았지. 오히려 방패를 앞세우며 나섰고, 모두가 앞다투어 나보다 앞서 충격을 받아 내려 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모두 보았다.”
특근대원들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그러했다.
처음 언데드들이 폭발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분명히 보았다. 폭발을 온몸으로 막아내려 들었던 특근대원들. 날 바닥으로 내리누르며 몸으로 덮어 주던 세르지오. 그들의 다급하고도 절실했던 표정과 눈빛. 그걸 어떻게 잊을까.
다음은 근위대였다.
“프란델 경. 그대와 대원들의 노고와 희생 또한 나는 보았다. 내가 좀비들을 유인하며 달리는 내내, 그대들이 긴박하게 움직이며 좀비들의 포위망이 완성되는 것을 지연시켰지. 고맙다. 덕분에 무사히 협곡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
근위대원들의 눈빛이 뭉클해졌다.
다음 차례는 우루스였다.
“또한, 나의 듬직한 미노타우로스 친구여. 그대의 온몸을 던진 헌신과 보호 덕분에 내가 무너지는 협곡 속에서 끝까지 무사할 수 있었지. 그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어찌 이렇듯 건재할 수 있었을까.”
부러진 갈빗대 때문에 다소 구부정하게 있던 우루스가 자랑스러운 콧김을 풍, 내뿜었다. 그렇듯,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눈길이 특근대와 근위대, 우루스를 향하였다. 비로소 숨통이 조금은 트였다. 부담감이 덜해졌다.
그러니 이쯤에서 마무리.
조금은 뻔하지만.
내 곁을 지킨 이들과, 이곳의 시민들과, 그날의 재난을 이겨낸 모두가 영웅이라는, 너무 뻔하디뻔한 멘트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게 내 마음인데.’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부담스러운 칭송은 다른 곳으로 돌리고. 수행원들의 더욱 드높아진 충성심을 얻고.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연설을 마무리하고 크라노스를 떠나는 내내 만족감이 들었다.
“후우.”
배웅하는 시민들의 환호성. 열렬한 외침. 눈물 젖은 감사. 그 모든 마음을 뒤로하고 마차에 오르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역시 나는 관심을 너무 받는 건 체질이 아닌 거 같다. 맞은편에 앉은 데미안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잘하셨습니다. 전하.”
“그랬나.”
“예. 어차피 전하께서 공을 아무리 다른 곳으로 돌리셔도, 사람들은 전하를 가장 우러르며 칭송할 테니까요.”
“……그런가.”
“물론입니다.”
데미안 녀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전하께서 저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안겨 주셨으니까 말입니다. 흑마법사의 침공을 저지한 것뿐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도시를 괴롭히던 백일해 풍토병마저 해결해 주셨으니까요.”
“어차피 그건 내가 잘되려고 한 일인데, 뭐.”
“하지만 사람들은 다르게 받아들이겠지요.”
“뭐, 그렇겠지.”
“예, 아마도.”
덜그럭거리는 마차 안에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도 먼저 그 침묵을 걷어낸 건 데미안이었다.
“그나저나 전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마계왕?”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 네가 나한테 궁금할 게 그것밖에 없잖냐. 앞으로 마계왕의 각성을 어떻게 저지할 계획일지가 궁금한 거겠지?”
“예, 전하.”
“그거라면, 음. 너 제법 아프게 될 거다.”
“……예?”
데미안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반응에 개의치 않고 말해 주었다.
“주기적으로 말이다. 굵직한 불치병이 하나씩 도지게 될 거야. 단계별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설마…….”
“그래. 그게 마계왕이 단계별로 깨어나는 신호야. 그걸 치료하면서 놈의 각성을 틀어막아야 할 거고.”
“혹시 전하의 수호천사가 그걸 알려준 겁니까?”
“물론.”
“그래서 제가 떠나려던 걸 말리신 거고요?”
“당연하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물론 수호천사가 알려줬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이제부터 주기적으로 굵직한 불치병을 앓게 되리란 이야기는, 그것이 마계왕의 단계적 각성의 과정이라는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소설 속에서 그랬으니까.
“뭐, 어쨌건 그건 황도에 돌아가서 대책 세우자고. 그러기엔 아무래도 별궁 한의원이 제일 든든한 장소일 테니까.”
“……예, 전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동감입니다.”
이쪽의 말이 충격적인 걸까. 데미안 녀석의 안색이 약간 굳어 있었다. 물론 이쪽도 마음 한쪽이 버석거리며 굳어 가는 건 마찬가지다.
마계왕의 각성을 막을 일이 막막해서?
그건 아니었다.
그보다도 황도로 돌아가면 당장 몰아닥칠 후폭풍이 염려가 되어서였다.
‘황제 그 양반이 이번 일을 가지고 어떻게 반응하려나.’
나름 예측을 해 보았다.
그런데 솔직히, 이번에는 반응이 예측되지가 않았다. 변경에서 일어난 재난을 잘 해결했으니 칭찬을 받을 것인지, 혹은 그 과정에서 겪었던 위기를 지적하며 미숙함을 질타할 것인지. 어쩌면 둘 다일까.
물론 어떤 경우에라도 황제가 반드시 보일 딱 한 가지, 예상되는 반응이 있기는 하다.
‘내 걱정을 하는 경우는 없겠지.’
황제는 그런 사람이니까. 피도 눈물도 없는 타입이니까. 특히 자신의 자식에게 더더욱 가혹한 사내니까. 소설에 등장해서 죽음으로 퇴장하는 시점까지, 그 태도만큼은 절대로 바뀌지 않은 인물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에게서 인간적인 어떠한 걱정이나 염려, 관심은 바라지도 말아야겠지. 솔직히 그게 이쪽 입장에서는 부담이 덜 되기도 하고.
‘그 양반이 갑자기 태도 싹 바꿔서 날 걱정해 주고 챙겨 주고…… 으음, 그러면 오히려 소름 돋을 듯.’
생각하자니 절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데 그때였다.
덜컹!
“……억!”
잘 굴러가던 마차가 갑자기 급정거를 감행했다. 하마터면 허리가 삐끗할 뻔했다. 무슨 일일까. 마부석을 향해 묻기도 전에 바깥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전하? 전방, 동남쪽 방면에서 군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
군대?
동남쪽에서?
거기라면…… 제국 황도 방향인데?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아직 크라노스 시를 떠난 지 30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차는 여전히 크라노스크 지방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그런데 황도 마젠타가 있는 동남쪽에서부터 다가오는 군대라니.
뭘까.
“잠깐. 설마.”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차 문을 열었다. 고개를 내밀어 동남쪽을 쳐다보았다. 과연 그곳에 엄청난 규모의 흙먼지가 피어나고 있었다. 흙먼지를 만들며 진군해 오고 있는 군대도 보였다.
삼엄한 대열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연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숫자는 어림짐작으로도 수천 이상. 빽빽하게 서 있는 군기가 곳곳에서 웅장하게 펄럭였다.
한데 그 군기의 디자인이 눈에 익었다. 당연했다. 마젠타노 황실 직속군의 군기니까. 그중에서도 저건 특히 황제 친위대의 깃발이니까.
그리고 그 선두에서는…….
‘……황제?’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 그 양반이 말을 몰며 돌진해오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아파서 조퇴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차 쓰고 달려오는 부모님처럼 다급한 얼굴을 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