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아버지의 노심초사 (2)
두두두두두두……!
지축이 울린다. 땅이 몸을 떨고, 공기가 바운스바운스 가슴을 때린다. 얻어맞은 갈빗대 안쪽에서 심장이 탭댄스를 춘다. 그렇게, 소리가 온몸을 때린다.
“……와아아아-!”
지축을 울리는 북소리.
터지는 함성.
쏘아지는 축포.
흩날리는 꽃잎.
그 속에서 라키엘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널따란 대로였다. 드넓은 길이 직선으로 쭉 뻗어 있었다. 그 너비가 어느 정도냐면, 서울 광화문 앞 도로쯤 되는 것 같았다.
한데 그 길이 모조리 화려한 의장대와 군대로 채워져 있었다. 숫자만 대략 수천은 될 것 같다. 그러니까 이건 의장대를 앞세운 군대의 정연한 퍼레이드였다. 아니, 개선식이었다. 바로 크라노스로 달려갔던 황제 직속 친위군의 개선식 말이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것이다.”
곁에서 흘러오는 묵직한 목소리. 그걸 귀에 담는 순간,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삐거덕거리는 동작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황제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눈이 마주쳤다. 얼른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황제의 입은 어김없이 다시금 열리고야 말았다. 물론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엄숙한 훈계였다.
“제아무리 황태자가 멍청하기 짝이 없어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날뛰어 댔다고는 하지만, 그런 황태자에게도 정치적인 입지 정도는 챙겨 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바로 짐의 할 일이기도 하고.”
“…….”
또 시작이다.
크라노스 외곽에서 황제와 만나 버렸던 20일 전이 떠올랐다. 그때 이후부터 계속 이런 식이다. 황제는 얼굴만 마주치면 신랄한 말로 이쪽을 훈계하곤 했다. 오직 이쪽을 디스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짐이 너를 위해 준비하였다. 보거라. 저 시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황태자가 변경의 도시 크라노스를 구했다는 표면적인 사실 하나에만 환호하며 너를 반기고 있지 않느냐.”
“…….”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 제국 황실의 후계자가 자신의 지위와 그 중요성은 망각한 채, 변경의 도시 하나를 위하여 목숨을 거는 도박을 감행하였다는 사실을 저들에게 어찌 설명할까. 그 멍청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던 행동을 저들에게 어찌 변명할까.”
“…….”
“하지만 안심하거라. 오늘은 그 일로 저들에게 비난을 받을 일은 없을 터이니. 이 또한 너를 위한 짐의 배려가 아니겠느냐.”
“…….”
“어떠하더냐. 너는 어찌하여 대답이 없는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라키엘은 재빨리 무난한 정석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 그런 알량한 대답은 황제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딱히 망극하지도 않을 그따위 성은.”
“…….”
아오, 이 양반이 진짜.
‘혹시 즐기는 건가.’
어쩌면 황제는 이쪽을 갈구는 데에서 인생의 보람과 참맛을 야물딱지게 느끼는 건 아닐까. 라키엘은 내심 투덜거리며, 황도 마젠타의 중심 거리에서 진행되는 개선식 퍼레이드를 바라보았다.
물론, 투덜거리는 마음이 진심인 건 아니긴 했다.
‘황제의 그 표정을…… 봐 버렸으니까.’
20일 전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에 크라노스를 향해 달려오던 황제의 표정 또한 떠올랐다. 사실은 그 얼굴과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저 깐깐하고 냉정하며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양반이 다 무너진 표정으로 달려오던 모습이라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기대해 본 적도 없었다. 물론 이쪽이 무사하다는 걸 보자마자 그 표정이 싹 사라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황제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안심하고 있구나, 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구나, 라고.
‘그래서 지금도, 날 훈계하는 척하면서도 이런 성대한 개선식을 준비해 준 거겠지. 크라노스에서 벌어졌던 일을 구실로 삼아 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주려고.’
황태자 영웅 만들기. 이것만큼 좋은 정치적 선전 수단이 있을까. 그리고, 황제 이 사람만큼 자신의 본심을 못 감추는 사람이 또 있을까.
‘너무…… 티가 난단 말이지.’
이쪽을 훈계하는 내내 보이는 눈빛도. 언뜻언뜻 철가면 같은 무표정 아래로 비치는 진짜 표정도.
사실은 온화하기 짝이 없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조금 알겠다.
‘어휴. 츤데레. 아니, 권력데레.’
저도 모를 한숨이 살짝 흘러나왔다. 사실 그런 라키엘의 진단(?)은 정확했다. 지금 이 순간, 황제의 콧구멍은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벌렁거리고 있었다. 너무나 기쁘고 흐뭇해서였다.
‘허허, 허허허.’
황제 아스테리온은 행복했다. 절로 웃음이 덩실덩실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걸 티 내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간 자신의 큰아들이 방심할 테니까. 자칫 풀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건 싫었다. 아들은 아직 더 발전해야 한다. 그러니 자신은 엄한 아비로 남아 주어야 한다. 설령 욕을 먹더라도 그리하여야 한다. 그러한 일념 때문이었다. 황제는 덩실덩실 트월킹을 추려는 안면근육을 혼신의 힘으로 꽉 억눌렀다.
한편으로 그는 한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급보를 받았던가. 크라노스에서 일어났다는 변란. 흑마법사와 언데드 군단.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는 황태자. 전투. 협곡에서의 폭발. 그리고…….
‘그때 짐은 너를 잃는 줄로만 알았다.’
황제는 라키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성대한 개선식에 어쩐지 어색해하는 황태자. 자신의 큰아들. 한때는 실망만 안겨 주었던 존재. 하여 매일을 탄식하게 만들었던 혈육.
그러나 막상 정말로 아들이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때부터 자신이 어떤 정신으로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몰랐을 지경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친위대를 이끌고 달려가고 있었다. 크라노스를 향하여. 전력으로. 아들의 안위를 직접 살피기 위하여.
그렇게 열흘을 꼬박 달렸던가. 마침내 크라노스의 외곽에서 아들의 모습을 발견했던가. 아마 그때만큼 안심했던 적이 평생 없었던 것 같다.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였던 때? 그때조차도 아들의 무사함을 확인했던 때만큼 기쁘진 않았던 것 같다.
얼떨떨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리던 라키엘. 큰아들 녀석의 그 모습이 어찌나 반갑던지. 또한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무너져 내리던 하늘이 메꾸어지고, 나락으로 추락하던 영혼이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눈물이 왈칵 나오려 했던 것도 같다. 간신히 그걸 참아냈던 것도 같다. 냉큼 달려가서 아들을 안아 주려다가…… 가까스로 스스로를 억눌렀던 것도 같다. 그리하여 격정적인 포옹 대신에 훈계부터 늘어놓았던 것도 같다.
당시에 내가 무어라 하였더라.
“…….”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덕분에 떠올릴 수 있었다.
‘너는 어찌하여 지닌바 지위의 중요성을 망각하여 사안의 경중을 파악지 아니하고 함부로 경거망동하여 황실의 존폐를 위태롭게 하였는가…… 라고 일갈부터 내렸더랬지, 아마.’
생각하자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사실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더없이 기쁘기 그지없다고. 짐은, 아니, 이 아비는 너에게 고맙다고.
실은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는데.
‘참으로 어렵단 말이지.’
낯뜨거운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가 않았다. 그래 본 적이 없으니까. 어색했다. 생각해 보면 실로 기이하고도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의 나는 어찌하여…… 이 아이를 그저 야박하게만 대하였을까.’
다시금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항상 아쉬운 아들이었다. 매번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쩌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모습 때문이었던 걸까. 자신은 항상 아들을 내몰기만 했던 것 같다.
더욱 성장하라는 구실에만 집중하였다. 새끼를 절벽으로 밀어내듯. 스스로 기어 올라오며 단단해지기만을 바라며. 그런 나날이 오히려 아들의 마음을 부스러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그걸 이제서야 조금은 알겠다.
크레모에 이어서 앙부아즈 내전, 이번의 크라노스까지. 아들을 잃을 뻔한 경험을 거듭 반복하며 수차례나 가슴이 철렁 무너지고서야 겨우, 조금은 알겠다.
내가 얼마나 못난 아비인지.
‘내 다시는 너를…… 위험에 처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마.’
황제는 내심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개선식 퍼레이드가 끝났다. 황실의 정해진 예법에 따라, 함께 황궁으로 들어왔다.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형식적인 황태자의 귀환 보고를 받았다.
그 후에는 또다시 정해진 예법에 따라, 황태자와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황제는 선대의 황제들에게 내심 크게 감사했다. 이런 훌륭한(?) 예법이 없었다면, 황태자는 귀환 보고를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별궁으로 돌아가 버렸을 테니까.
‘이 녀석은 짐을 항상 어렵게 생각하니까.’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쥐 잡듯이 아들을 대하였으니, 아들이 함께 숨쉬기도 부담스러워하며 학을 뗄 만도 하다. 그러니까, 아들의 저런 표정은 자신의 업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쁘다, 이 시간이.
“혹여 피로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더냐.”
황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맞은편의 라키엘을 슬쩍 떠보았다. 확실히 라키엘은 피곤한 모습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크라노스에서 여기까지 장장 20일의 여정이었다. 마차에 몸을 싣는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게다가 황도에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개선식을 치르랴, 반나절 가까이 억지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예법을 챙기랴, 제법 고단했을 것이다.
과연 돌아오는 큰아들의 반응도 그러하였다.
“예, 폐하. 솔직히 말씀드리옵자면 조금은…….”
“쯧. 한심하고 못난지고.”
“…….”
“…….”
아들의 침묵.
황제 또한 저도 모르게 침묵. 그는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닫고는 스스로 흠칫했다. 아들의 솔직한 대답에 또 타박부터 꺼내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아주 몹쓸 습관이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하였다.
“흠흠! 그래. 피곤할 수도 있지. 하지만 너는 지닌바 지위를 잊어선 아니 된다. 아무리 피곤하고 고단하다 한들, 그것을 남들 앞에서 함부로 내비쳐서는 아니 될 것이야.”
“그, 그렇사옵니까.”
“당연하다. 그것이 지배자가 마땅히 보여야 할 태도이니.”
“하면 폐하께서는 피곤하지 않으시옵니까?”
“짐은…… 멀쩡하도다.”
“흐음, 안색이 조금 칙칙해지셨사온데.”
“서북방의 거친 바람을 맞아서 그렇도다.”
“단지 그렇다고만 말씀하시기엔 다크써클도 생기셨사온데.”
“……크흠!”
고얀 녀석.
이게 누구 때문인데.
황제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다짐을 다시금 되새겼다. 이제 더는 아니 되겠다. 아들이 매번 위험해지는 것은 더 이상 못 보겠다. 크레모, 앙부아즈, 이번의 크라노스까지.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막아야겠다.
그래서였다.
황제는 라키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없이, 한참, 그 눈빛과 분위기의 부담감에 라키엘의 어깨가 긴장해서 굳을 무렵, 툭 내던지듯 선언하였다.
“근래 짐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았더니 말이다. 아무래도 너의 몹쓸 취미생활이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것 같구나.”
“……예?”
“별궁 한의원 말이다.”
바로 그것이다. 그 한의원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매번 아들이 위험에 휘말리는 것 같다. 확실하다. 그러니 이제는…….
“별궁 한의원인지 뭔지 하는, 그 소꿉장난 같은 병원 놀이는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후계자 수업에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아들을 더는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황제의 폭탄선언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