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32화 (232/468)

232화. 아프니까 병원이다 (2)

“전하께서 곧 나오실 겁니다.”

“…….”

꿀꺽.

별궁 한의원 당직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귀족원장 에스토크는 무의식중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내심 한편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 별궁 한의원의 응급실이라고 하였던가. 말 그대로 야심한 시각에도 응급한 환자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한 장소라고 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본격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렇게 덜컥 별궁에 와 버리다니.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자신은 이런 판단을 하였을까.

너무 아파서?

그냥 아프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발목을 통째로 자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론 그랬다.

사실은 지금도 아팠다. 남들의 보는 시선 때문에 필사적으로 참고 있지만, 그럼에도 힘들었다. 발끝에 바람만 스쳐도 온몸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안 그러면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으니까. 귀족으로서의 긍지를 잃게 될 테니까.

게다가 생각해보면, 고통에 몸부림치던 내내 황태자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연회장에서…….’

자신의 아픈 증상을 족집게처럼 짚어내던 황태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치의조차도 몇 년째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던 아픔인데. 그런데 황태자는 그 원인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술술 말했던가.

그 말은 즉, 치료법도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후우. 어떤 얼굴로 황태자를 뵈어야 하는 것인가, 나는.’

귀족원장 에스토크는 아픔과 초조함이 버무려진 심정 속에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대로 기다리며 황태자에게 치료를 받자는 생각과,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수시로 교차했다.

물론 그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에 황태자가 응급실로 왔다.

“환자는?”

“저쪽에 있습니다.”

조금은 졸음이 덜 가신 목소리. 당직 의사의 안내를 받으며 반쯤 뛰어오던 황태자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이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공작님?”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젠 다 끝났다.

도망칠(?) 타이밍도 놓쳤다.

에스토크 공작은 내심 눈을 질끈 감으며 예를 표했다. 그리고 두 가지 염원을 품었다. 첫 번째 염원은 자신이 오늘 내린 판단이 부디 훗날의 정치적 곤경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염원은…… 뜻밖에도 곧바로 이루어졌다.

“괜찮습니다. 너무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황태자가 뜻밖의 말을 건네어 왔다.

공작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예?”

“이런 새벽에 별궁을, 예고도 없이 덜컥 방문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민폐를 끼쳤다는 기색을 너무 가감 없이 드러내고 계셔서 말입니다.”

“아…….”

내가 그랬던가.

한데, 이게 민폐인 건 맞지 않는가. 그래서 이번 일로 황태자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를 내심 염원하고 있었는데. 에스토크 공작은 더욱 불안함을 느꼈다.

라키엘은 싱긋 웃고 말았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공작님은 귀족원장으로서 황태자를 만나러 온 것입니까? 아닐 텐데요.”

“아, 예. 저는…….”

“압니다. 많이 아파 보이는군요.”

“…….”

“그러니 자책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민폐를 끼친 것도, 무례를 범한 것도 아니니까요. 지금은 그저 한 사람의 환자로서 의료인을 찾아온 것이니까 말입니다.”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은 정말로 당연한 일이었다. 환자가 아픈 것은 어떤 경우라도 의료인에게 민폐가 아니다. 그걸 민폐로 여기는 의료인은 환자를 대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일부러 아픈 사람은 없으니까.

그것이 라키엘이 평소부터 지니고 있던 생각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작을 최상위의 귀족이 아닌, 그저 아파서 병원으로 찾아온 환자로서 대하였다. 그 첫 번째는 환자가 느끼고 있을 민망함과 두려움, 불안함을 다독이는 것이었다.

“아프니까 의사를 찾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설령 그게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전하…….”

“그러니 괜찮습니다. 뭐, 한밤중에 저를 깨운 일이 그렇게 마음이 쓰이시면, 나중에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해 주시죠.”

“아,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이제 아픈 곳을 좀 살펴볼까요. 이쪽 발이 아픈 거죠?”

“예…… 예, 전하.”

본격적인 진료의 시간이다.

에스토크 공작은 살짝 긴장했다.

소문으로 들은 바로는 황태자는 기존의 의사들과 판이한, 굉장히 독특한 진단과 치료법을 지니고 있다던데. 과연 그게 뭘까. 혹시 엄청나게 아프거나 한 건 아닐까.

그의 불안감 서린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역시. 통풍이 맞군요.”

“그, 그렇습니까?”

“전형적인 통풍 발작입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었지요?”

“아, 예…… 전하.”

“요산의 과도한 생성과 축적 때문입니다. 아마도 평소에 섭취해 왔던 음식이 지나치게 풍족했겠지요. 필요 이상으로 섭취한 단백질이 대사되는 과정에서 퓨린(Purine)의 농도가 높아졌고, 그 결과 요산염 결정체가 이곳, 발가락의 관절에 사이토카인(Cytokine)과 단백질 분해효소(Proteolytic enzymes)에 의한 염증 손상을 발생시킨 것이지요. 그게 지금 공작님이 느끼는 통증의 원인입니다.”

“…….”

공작은 대답할 말을 잃었다.

대신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제대로 진단을 한 게…… 맞나?’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았다. 황태자의 말이 복잡하고 현란해서 더욱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황태자는 청진기를 들지도, 자신의 입속을 빤히 들여다보지도, 귓구멍 속의 귓밥을 닦아내어 관찰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황태자는 그저, 한 손으로 자신의 발등과 발목을 살짝 매만졌을 뿐이었다. 그것도 겨우 몇 초 정도만!

‘그런 걸로 저런 자세한 내용과 원인을 알 수 있다고?’

너무 건성으로 빠르게 진찰한 것에 비해서, 나오는 내용이 상세하니까 오히려 더욱 미심쩍게 느껴졌다.

물론 라키엘은 그런 공작의 심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역시나. 잘 믿질 못하는구만.’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사실 자신은 제대로 진단을 했다. 공작과 대면하는 순간부터 이미 경혈 스캐닝을 돌리고 있었다. 거기에 공작의 발목을 슬쩍슬쩍 매만지고 살피면서 진맥 스킬도 사용했다. 덕분에 자신의 오장육부가 공작의 오장육부와 상담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딩동!

[종합 소견 : 전반적으로 각종 영양이 과도하여 문제가 되는 신체입니다. 대량의 내장지방이 관찰되는 복부비만 상태입니다. 특히, 무분별하고 불규칙한 식습관이 불러온 고요산혈증(Hyperuricacidemia)과 그에 따른 전형적인 간헐기 통풍이 감지되었습니다. 또한, 현재 상태로 미루어 향후 고혈압과 심각한 지질이상증, 당뇨 등의 합병증 발생 확률이 대단히 높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가급적 적극적인 치료 및 식단 관리를 통한 체질 개선이 시급합니다.]

일단 종합 소견 결과는 제법 암울했다. 오장육부의 상담 결과는? 더했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에스토크 공작의 엉망진창인 신체 상태에 놀라움을 드러냅니다.]

[심장 : 이야. 저게 사람 몸이냐ㅋㅋㅋ]

[허파 : 허프핳하핳ㅋㅋㅋㅋㅋ]

[대장 : 저는 보았지 말입니다. 부럽지 말입니다.]

[간장 : 지금까지 본 진료 대상 중에 제일 폭신한 내장지방에 감싸인 저쪽 대장? 뭐 다른 건 모르겠고 쿠션감 하나는 쩔겠더만ㅋㅋ]

[위장 : 야, 그래도 진료 대상인데 너무 비웃는 건 자제하자. 원래 사람이든 뭐든 겉모습보다는 내면이 중요한 거임.]

[콩팥 : 예를 들자면?]

[비장 : 냉장고?]

[심장 : 올ㅋ]

[오장육부 리포트 : 고요산혈증 때문에 콩팥 상태가 특히 폐급임. 요로결석 발생 위험성 개상타ㅋ 간도 엉망이고 심장도 허파도 만신창이임. 제발 식단 관리 좀 시켜라. 뒈지기 전에.]

“…….”

뭐, 일단 전반적으로 안 좋다는 건 충분히 알겠다. 더불어 공작이 본인의 심각한 상태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겠다.

그러니 이제는, 적극적인 치료와 관리가 필요하겠다.

“일단 입원을 하시죠.”

“……예?”

눈을 동그랗게 뜨는 공작.

하지만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리 길게까지 입원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선 지금 통증 발작부터 완전히 가라앉혀야겠지요. 그 후에는 통원하면서 진료와 처방을 받아서 관리를 하면 되실 거고.”

“그럼 얼마나…….”

“길면 열흘쯤 걸릴 겁니다.”

“열흘 말입니까? 하면, 그 안에 이 통증이 가라앉을까요?”

“일단 열심히 치료를 해봐야겠지요.”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장담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 명쾌하게 딱 나을 거다, 라고 잘라서 말할 수 있으면 자신도 참 좋겠다.

물론 마음 같아선 당장 내손약손 스킬을 써서 통증부터 가라앉혀 주고 싶긴 하지만……섣불리 그랬다간 그 뒤의 치료에 지장이 생길 것이 염려가 되었다.

‘아마도 그럴 거야. 너무 초장부터 통증만 확 없애 버리면, 그 뒤로 이어질 꾸준하고도 빡센 치료를 받겠다는 의지가 금방 사라질 거거든. 내손약손만 받으면 금방 편해지니까. 점점 거기에만 의존해서 근본적인 치료를 멀리하게 될 거고.’

그러니 내손약손은 치료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로 미루자. 지금은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주지 말자.

그렇듯 확답을 해 주지 않아서였을까.

공작의 표정이 흐려졌다.

“하면…… 정말로 입원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전하?”

역시나 흔들린다. 이쪽에 대한 믿음이 두텁지 않은 까닭이겠지. 라키엘은 공작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런 새벽에, 여기까지 오신 걸 보면 달리 의지할 다른 곳은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

“이대로 돌아가면 따로 뾰족한 수가 있습니까?”

“그건…….”

없다.

공작은 단언할 수 있었다.

이곳을 떠나면 자신에게 남는 치료 수단이라고는 주치의뿐인데, 그 작자는 이제 별로 신뢰가 가질 않는다. 게다가 이미 별궁까지 와서 황태자를 깨워 버린 마당이 아닌가.

이제 돌아가기엔 늦었다.

결국,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대신 부탁이…….”

“입원 사실을 외부에 숨기고, 다른 이들이 공작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해 달라는 거겠지요? 물론 가능합니다. 이런 때를 대비한 VIP 병실이 있으니까요.”

“그게 정말입니까?”

“아무렴요. 일단 그럼 앞으로의 치료에 동의한 것으로 보고, 지금 바로 치료부터 시작하도록 하지요.”

“지금…… 말입니까?”

“예. 혹시 문제라도?”

“…….”

아직 마음의 준비가…….

꿀꺽.

공작은 병원 치료를 앞둔 대부분의 사람들이 품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에 불과했다. 당장 발가락이 너무나 아팠다. 한데 곧바로 치료부터 해 주겠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가 말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예, 그래 주면 저야 고맙지요. 그럼 이제부터…….”

나는 어떤 치료를 받게 되는 걸까. 소문에 따르자면 황태자는 굉장히 독특한 치료법을 쓴다던데.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아픔에서 해방되어 황태자를 칭송하기도 한다던데. 그럼 나도 혹시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부디 그러면 좋겠다.

제발 그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어떤 치료라도 기꺼이, 달게 받겠다.

……라고 공작이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이걸로 공작님을 좀 여러 번 찌르겠습니다.”

황태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손가락보다 기다란 하얀색 가시를 치켜들더니 아픈 발가락을 정조준으로 겨누었다.

“……예에?”

그걸로요?

저를요?

왜요?

본격적인 한방 치료 체험(?)을 예감한 공작이 흠칫했다. 라키엘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 끝나면 돈까스 드릴게요.”

“…….”

공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사라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