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자발적인 지지 선언 (1)
“으음…….”
이른 아침이었다.
갓 떠오른 햇살이 방금 구워낸 빵처럼 땅을 물들이는 시간, 에스토크 공작은 평소와 거의 똑같은 시간에 습관처럼 눈을 떴다. 그리고 평소처럼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얼굴부터 찡그렸다.
이유는 달리 없었다.
습관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발의 고통.
벌써 수차례 그런 경험을 해 오다 보니, 딱히 아프지 않은 날에도 얼굴부터 찡그리며 깨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혹시나 오늘도 아픈 걸까.
고통은 이제 그만 맛보고 싶은데.
그런 생각이 무의식 깊숙한 곳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매일 아침을 찡그린 얼굴로 맞이하게 만들었다.
물론 오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습관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떴고, 하품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으며, 최근 크게 말썽을 부린 자신의 오른발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오늘도 엄청나게 아프겠지. 어제도, 그제도 그랬으니까. 너무나 아파서 별궁 한의원에 입원까지 해 버렸으니까. 그러니 당연하지만 오늘도 마찬가지로…….
“……어?”
두 번째 하품을 하던 공작은 멈칫했다.
이상하다.
발이 아프지가 않았다.
물론 아예 안 아픈 건 아니었다. 약간 아릿하고 뻐근한 감각이 조금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까지 아프던 정도에 비하자면…… 이건 간지러운 수준도 되지 않았다.
‘왜 이러지?’
의아했다.
엄습해 올 고통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인데. 한데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도 하룻밤 사이에 통증이 싹 내려가 버린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공작은 문밖의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역시 내 기척을 들었나 보구만.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조용히 열리는 문. 이젠 익숙해진 얼굴의 간호사가 들어왔다. 아니스라고 불리는 수간호사. 사실은 웨어울프라고 하였던가.
“표정이 밝아지셨군요, 공작님?”
“아, 그래 보이는가?”
“네. 통증이 가라앉았나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으이.”
“킁킁. 킁. 냄새로 보아 확실히 그렇군요. 열도 제법 내려간 것 같고요.”
“그게 느껴지는가?”
“전 웨어울프니까요.”
아니스는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체취를 통해 상대의 대략적인 신체 상태를 파악하는 일은 그녀에겐 쉬운 일이었다.
웨어울프니까. 개코를 능가하는 개코니까. 미묘한 컨디션의 변화, 고통을 느끼는 정도, 심지어 감정의 기복까지.
“냄새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전해준답니다. 그럼 아침을 준비시키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 탕약, 오늘도 먹어야겠지?”
“어쩔 수가 없어요, 공작님.”
“알고 있네.”
아니스가 물러간 후, 공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발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발가락 뿌리 어름의 부기가 제법 빠진 것도 같았다. 전에는 벌겋게 퉁퉁 부어 있었는데.
신기했다.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그럼에도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이불만 스치면 아파서 죽을 것 같았는데. 이 또한 신기했다.
‘그 끔찍한 맛을 지닌 탕약이 효과가 있는 건가.’
정말로 그런 걸까.
아침 식사를 받고.
식후에 탕약을 마시고.
어김없이 미각을 파괴당했다.
한데 그 끔찍한 맛이 전과는 살짝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은 마실 만했다. 기분 탓일까. 혹은 오늘만 평소보다 아주 약간 덜 쓰게 달여진 걸까. 스스로의 변화가 새삼스러운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조금 걷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는가?”
“물론이에요, 공작님. 발에 과도한 자극이 가지 않는 선에서는 오히려 조금씩 움직여 주시는 게 도움이 될 거랍니다.”
“그렇군. 고맙네, 아니스 양.”
“별말씀을.”
공작은 조심스럽게 병상에서 내려왔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땅에 닿는 감촉. 그러고 보니 나흘 전의 새벽에 실려 온 이후로는 스스로 디뎌 보는 첫걸음이었다. 그동안은 너무나 아파서 제대로 걷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신중하게 한 걸음.
“…….”
썩 괜찮다. 조금 욱신거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겠다.
공작은 자신감을 얻었다.
두 걸음, 세 걸음, 천천히 걸음을 이어 갔다. 마치 어린 시절 걸음마를 처음 배우던 때가 이러했을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병실을 나섰다.
순간 잠깐이나마 흠칫했다.
복도로 나가면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텐데. 자신이 이곳 별궁 한의원에 입원한 사실은 아직 외부에 알리지 않았는데. 비밀인데.
“…….”
하지만 갑갑하다.
나흘 동안이나 병실에 갇혀 있었다. 이곳 병실만 아니라면 어디든 좀 나가 보고 싶다. 게다가 지금은 평소에 쓰고 다니던 가발도 벗고 있다. 한껏 꾸미지도 못한 환자복 차림이다. 하니 누군가가 자신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까.
‘아니겠지. 아닐 거야.’
부디 그러길 바란다.
이대로 병실에만 처박혀 있기엔 너무나 갑갑하니까. 이렇듯 조금은 무리한 소망이나마 변명으로 삼아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변명? 핑계? 아무래도 좋다.
“후우.”
복도로 나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간호사들. 모두가 웨어울프일 이들이 자신을 향해 목례하며 지나갔다.
그들을 지나치며 아무 곳으로나 걸었다. 목적지는 딱히 없었다. 그저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니까. 아무래도 좋았다.
천천히 걷는 내내 지난 며칠 동안 품고 있던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의 정체는 의구심이었다. 의구심의 대상은 황태자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태자의 치료법에 자꾸만 의문과 의심이 들었더랬다.
‘조금…… 많이 생소하고 특이한 치료법이었으니까.’
아니.
차라리 이상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공작은 쓴웃음과 함께 나흘 동안 받았던 치료의 과정을 떠올렸다. 아침마다 발이 가시투성이가 되어야 했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끔찍한 맛의 탕약을 마셔대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반강제로 매일 엄청난 양의 물을 마셨다. 하루에 거의 3리터는 마신 것 같다. 그것 또한 익숙하지 않아서 고역이었다. 덕분에 소변은 또 얼마나 자주 마렵던지. 병실에 딸린 화장실로 부축을 받으며 갈 때마다 또 어찌나 괴롭던지.
한데 나흘 내내 아픔은 좀처럼 가시지가 않았다. 그럴 기미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제까지는 분명 그랬다. 하여 의구심만 잔뜩 들었더랬다.
‘과연…… 황태자의 치료법이 효과가 있을지…… 믿음이 가질 않았지.’
솔직히 그랬다.
헛짓거리 같았다.
때로는 황태자의 모든 진료 행위가 돌팔이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 의구심을 떨쳐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제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어쩌면 방금까지도, 조금은 그렇게 여기고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여기가 아직 욱신거린다고?”
“예, 전하.”
“흐음. 생각보다 뭉친 게 오래 가네.”
“죄송합니다, 전하.”
“죄송하긴 무슨.”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도착한 어느 장소. 복도의 끝. 멍하니 상념에 잠긴 채 걷던 공작은 앞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복도가 끝나는 막다른 지점에 출입문이 있었다. 출입문 위에 걸린 ‘물리치료실’이라는 생소한 문패가 보였다.
말소리는 물리치료실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혹시 요즘에도 계속 무리해서 근육을 쓰고 있나? 원래 한번 뭉친 자리는 약해져. 충분히 풀어 주지 않고 무리를 하게 되면 금방 또 뭉칠 테니까, 당분간은 훈련의 강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게 좋겠는데.”
“하지만, 전하? 제가 마음대로 그렇게 하기에는…….”
“왜? 프란델 경이 뭐라고 해?”
“예, 전하…….”
“쯧. 그럼 내가 말해 두도록 하지.”
“예?”
“근위기사 단체 훈련에서 경을 당분간 열외시키라고 말이야. 그렇게 말해 두면 되겠지?”
“그게……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이지, 그럼 거짓말을 할까. 프란델 경이 얼마나 쇠고집인데. 그나마 내가 말을 해야 씨알이라도 먹히지.”
“하지만 전하…….”
“조용히 해. 가시 빗나간다.”
“……끱!”
조금은 까칠한 말투. 그럼에도 상대를 묘하게 배려하는 듯한 어조. 최근 나흘 동안 매일 들어서 익숙해진 목소리.
‘황태자 전하?’
공작은 문가에서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물리치료실 안쪽, 몇 개의 침상을 건장한 사내들이 차지하고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등판이며 다리 등등에 꽂힌 가시도 보였다.
황태자는 그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상태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세르지오? 여기는 어떻지?”
“으윽…… 괜찮습니다, 전하.”
“괜찮기는 개뿔.”
“…….”
“그때 시체 폭발의 충격파에 제대로 당한 자리가 벌써 나았을 리가 없지. 자, 이렇게 하면?”
“……그아악!”
“역시. 그대도 당분간 좀 쉬어. 호위근무 일정도 조절하고.”
“하지만 전하?”
“말 들어. 무리하지 말고. 누구는 그쪽만 좋으라고 이러는 줄 알어?”
“……예?”
“빨리 나아서 나를 더 잘 지켜줘야지. 그대들의 건강이 내 안전이고 건강인 거야. 따지고 보면 이거 전부 나를 위한 투자라니깐? 그러니까 딴생각 말고 당분간은 회복에만 집중하도록 해.”
“전하…….”
수염 숭숭한 근육질 사내가 울먹였다. 황태자가 까칠한 타박으로 응수했다. 그럼에도 사내의 젖은 눈가는 마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주위의 다른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근위대 기사들. 특근대라고 불리던 사내들. 그들 모두가 황태자의 까칠한 말을 들으며 정성껏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공작은 내심 크게 놀랐다.
아니,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황족이.
존귀한 핏줄이.
심지어 황태자인 분이.
그저 칼받이 호위에 불과한 이들을 위해 손수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다.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보살피고 있다. 그럼에도 어떠한 요구도 없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희미하게 웃고 있다.
마치, 자신의 타고난 일인 듯.
저들의 치유가 자신의 기쁨인 듯.
‘저런 일이 가능한 분이…… 그런 황족이…… 계셨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한데 그렇듯 놀라운 행위를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는 사람이 저기에 있다. 이 황실의 미래이며, 황제가 될 분이 그러하시다.
‘내가 지금까지 전하를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저 병약하여 후계자 구도가 불안정한 황족이라고만 여겼다. 최근 벼락치기를 하듯 세운 공적 몇 가지로 으스댄다고도 여겼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원놀이라는, 괴악한 취미를 지닌 자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
지금 저곳에 있는 황태자는 그렇듯 단순하게 치부할 인물이 아닌 듯했다.
후계자 구도가 불안정하다고? 벼락치기를 하듯이 공적 몇 가지를 세웠다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원놀이 취미라고?
‘그게 전부…… 섣부른 생각이었구나.’
내가 어리석었구나.
어리석어 보는 눈이 없었구나.
그렇기에 어쩌면, 마젠타노 황가를 역사상 가장 찬란한 반석 위로 올려놓게 될 수도 있을, 저러한 성군의 씨앗을 지금까지 몰라보았던 것이로구나.
‘나는…….’
공작은 굳은 다짐을 하였다.
이제부터, 귀족원장의 이름과 직책, 그리고 모든 권한을 걸고서, 황태자를 평생 지지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