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35화 (235/468)

235화. 자발적인 지지 선언 (2)

이틀이 지났다.

그사이, 황도 마젠타의 귀족가에는 요상한 소문 한 가지가 물잔에 떨어뜨린 잉크 한 방울처럼 알음알음 번져나갔다.

“들으셨어요? 귀족원장님이 말여요, 글쎄…… 속닥속닥…….”

“들었어요. 귀족원장님이 별궁 한의원에서…… 숙덕숙덕…….”

“들었소. 귀족원장님이 그곳에 입원을…… 소곤소곤…….”

“들었다네. 귀족원장님이…….”

“……그만해, 미친 자들아.”

이곳은 별궁 한의원 원장실.

그곳에서 라키엘이 일침했다. 그에게 속닥속닥, 숙덕숙덕, 소문을 재현하면서 전달하던 가르딘 경과 특근대원들이 목을 움츠렸다.

“아니, 그게, 전하? 저희는 그저 소문의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전하께 전달해 드리려는 일념이었지 말입니다.”

가르딘 경이 자라처럼 움츠린 목으로 꿍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의 가녀린 항변은 황태자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됐고. 수염 숭숭 난 아저씨들이 귀부인 성대모사하는 꼴을 더 듣다간 내가 소름이 돋아서 입원할 거 같거든.”

“하지만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어휴.”

“…….”

“어쨌건 요점만 말해 보도록.”

“어, 흠흠! 알겠습니다. 일단, 요약을 하자면 전하께서 의도하신 내용의 소문이 착실하게 퍼지는 중입니다.”

“귀족원장이 별궁 한의원에 입원해 있다는 내용의 소문?”

“그렇습니다, 전하.”

가르딘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전하께서 철저하게 당부하신 그대로, 저희가 일부러 소문을 퍼뜨리진 않았습니다. 환자의 개인정보는 소중하게 지켜주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던가요. 어쨌건, 현재 황도 귀족가에 퍼져 있는 소문은 모두 자연적으로 퍼진 것입니다.”

“그렇겠지. 이틀 전부터 귀족원장이 입원실 밖으로 조금씩 돌아다니기 시작했으니까.”

사실이었다.

귀족원장 에스토크 공작.

아마도 통풍 발작이 지속되는 내내 병실에만 갇혀 지내다 보니 답답했던 듯했다. 통증이 가라앉기가 무섭게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나름 자신의 모습이 평소와 제법 다르니까,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안심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한의원에 내원하는 일반 환자들이야 평민이 대다수니까 귀족원장을 알아볼 사람이 드물다고 해도, 별궁에서 일하는 시종과 시녀들은 전혀 아니거든.’

그러했다.

귀족원장의 모습은 당연하게도 시종과 시녀들의 눈에 띄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조금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그걸 모를 귀족원장이 아닐 텐데. 어쩌면 소문이 퍼지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 걸까.

어쨌건 그때부터였다. 황도 곳곳에 귀족원장의 별궁 한의원 입원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럼 소문의 분위기는? 좀 어떻지?”

“생각보다 더 술렁이는 느낌입니다.”

“술렁여?”

“예, 전하.”

“더 자세히.”

라키엘이 채근했다.

가르딘 경이 답하였다.

“정확히 말씀을 드리자면 소문을 접한 제법 많은 수의 귀족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이미 통풍을 지니고 있는 이들로 보입니다.”

“흐음, 좋아.”

“그럼 곧…… 그들도 전하를 찾아오겠지요?”

“아마도?”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는 다들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귀족원장이 그 분위기를 깨는 총대를 멨으니까?”

“총대……라뇨?”

“그런 게 있어. 다들 꺼리던 일의 첫 스타트를 열었다고.”

“아, 예.”

“아무튼, 전에는 다들 마음 편히 한의원에 올 수가 없었을 거야. 한의원에 오려면 별궁을 들락거려야 하고, 그 방문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정치적 줄을 대는 행동으로 보이기 십상일 테니까.”

“그랬을 겁니다. 귀족들은 대부분 적이 많으니까요.”

“그렇지. 별궁을 출입한 사실이 훗날의 정적에게 어떤 빌미로 쓰일지 모르니까. 그런 불안요소를 일부러 떠맡기는 싫었겠지. 그래서 연회장에서 내가 통풍에 대한 이야기를 대놓고 꺼냈음에도 애써 못 들은 척했을 거고.”

“하지만 사실은 다들 속으로 혹하진 않았을까요?”

“그랬으니까 지금 귀족원장의 소식을 들으며 동요하고 있는 거겠지.”

라키엘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슬슬 확신이 들었다.

계획대로다.

연회장에서 던졌던 떡밥이 드디어 결실을 맺어 가는 게 보였다. 며칠 남지 않았다. 이제 곧, 더욱 부풀려질 소문이 무수한 귀족 통풍 환자들의 마음속 억제기(?)를 해제할 것이다.

그러면 그 후엔?

‘다들 내게 와서 비는 거지. 제발 통풍을 치료해 달라고. 크하하하!’

곧 다가올 미래가 훤히 그려졌다. 절로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러한 라키엘의 예상은 고스란히 들어맞았다. 딱히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가르딘 경에게서 소문에 대한 보고를 받은 그날 밤, 마침내 새로운 통풍 환자가 별궁 한의원 응급실 문을 두드렸다.

“이, 이보시오! 의사…… 전하를…… 제발!”

무슨 뭐시기 자작인지 뭔지 하는 중년의 사내가 하인에게 업혀 와서는 눈물 콧물을 흘려 가며 고통을 호소했다.

물론 라키엘은 귀족원장 때와 똑같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자다가 깼음에도 싫거나 귀찮은 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서 진료를 시작하였다.

그날부터였다.

매일 밤마다 새로운 응급환자가 꼬박꼬박 찾아왔다. 대부분이 통풍을 앓는 귀족들이었다. 덕분에 라키엘은 며칠 내내 자다가 불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오. 왜들 밤에만 찾아오는 건데!’

불평을 하면서도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다들 여전히 주위의 눈치를 보는 거다. 그래서 남들의 눈을 피해서, 일부러 한밤중에 별궁을 방문하는 거다.

하지만 그런 귀족들의 꼼수(?)도 곧 박살이 났다. 이유는 달리 없었다. 통풍을 호소하며 밤에 찾아오는 귀족들의 숫자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저, 전하……! 한밤중에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감히 바라건대 제 아픔을…… 어?”

“으으윽, 저도 전하…… 전하를 뵙고자 이곳까지…… 어?”

어느 밤, 두 귀족 남성이 응급실에서 딱 마주쳤다. 공교롭게도 똑같이 왼발을 부여잡고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하인에게 업히다시피 하고서였다.

한데 더욱 공교로운 점은, 두 남자가 평소부터 으르렁거리는 철천지원수 라이벌 가문의 귀족이라는 사실이었다.

“……베네토?”

“페르모?”

“허, 그대가 이곳엔 어쩐 일이지?”

“내가 물을 소리. 그대는 여기에 무슨 일로 온 것이지?”

“나, 나는 산책을 나온 것일세.”

“하!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하인에게 업혀서 산책을? 그것도 이곳 별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는 베네토 그대도 나와 똑같은 모습인 것 같은데?”

“나, 나는 별 구경을 나온 것일 뿐일세.”

“하!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하인에게 업혀서 별 구경을? 그것도 이곳 별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대는 지금 내가 했던 말을 일부러 따라 하는 것인가?”

“그대가 내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겠지.”

“나는 그대처럼 아파서 꼴사납게 쩔쩔매거나 하진 않고 있는데?”

“나도 전혀 아픈 곳이 없다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다만?”

“그쪽이야말로?”

“증명할 수 있겠나?”

“어디 한번 덤벼 보시지.”

두 귀족 남성은 응급실 병상에 나란히 눕는 와중에도 당장 결투를 치를 것처럼 설전을 이어 갔다. 오늘도 여전히 불면의 밤을 투덜거리며 가운을 챙겨입고 나오던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응급실에서는 결투 금지. 어기면 둘 다 쫓아낼 거야.”

“…….”

“뻔하네. 둘 다 통풍이지?”

“저, 저는 산책을…….”

“저는 그저 별 구경을…….”

“응급실에서는 거짓말 금지. 어기면 둘 다 쫓아낼 거야.”

“……전하아! 통풍이 맞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전하!”

“제가 먼저 왔습니다, 저부터 치료를!”

“아닙니다! 진료 접수는 제 하인이 먼저 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부터!”

“아니, 그대는 별 구경을 나왔다며?”

“그대야말로 산책이라고 했으면서!”

“……그만하라고, 이 미친놈들아.”

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며 응급실에서, 병실에서, 혹은 입원 병동 복도에서 마주치는 귀족들이 늘어갔다.

그런 까닭일까.

차츰 귀족들이 대담해졌다.

‘저 작자도 별궁에 버젓이 입원해 있는데, 나라고 문제 될 게 있겠어?’

‘귀족원장님도 입원해 계시는데 나도 괜찮겠지!’

……라는 식의 심리였다.

덕분에 별궁 출입 자체를 눈치 보던 행동이 점점 사라져 갔다. 다들 차츰 떳떳해졌다.

분위기의 힘이었다.

학교에서 나만 조퇴를 하려면 살짝 눈치가 보인다. 그런데 다들 아폴로 눈병이든 뭐든 팍팍 걸려서 단체로 조퇴를 하게 되면 오히려 당당해진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나만 지각을 하면 때려죽일 몹쓸 놈이 된 것만 같다. 그런데 회사 근처 지하철 전체가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래서 대리님, 과장님, 부장님까지 다 함께 지각을 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런 덕분이었다.

차츰 황도 귀족들이 대놓고 별궁 한의원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는 별궁 한의원 로비가 귀족들의 인싸(?) 사교의 장이 되어 버렸다.

다들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아픈 곳이 없어도 일부러 별궁 한의원을 찾아왔다. 온 김에 평소 뻐근하던 곳을 찜질도 받고 하면서 수다와 교분을 나누었다.

“……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버렸군요. 이것도 귀족원장님 덕분일까요.”

“허허허. 송구합니다, 전하.”

“아닙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귀족원장님이 입원한 본인의 모습을 일부러 남들 앞에 보였다는 것도 말입니다.”

“들켰습니까?”

“너무 노골적이셔서요.”

라키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원장실 다탁 건너편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곳에 방금 퇴원수속을 마친 귀족원장, 에스토크 공작이 있었다.

“저는 그저…… 생각을 조금 바꾸었을 뿐입니다, 전하.”

“생각을요?”

“예, 전하.”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진료이니까 말입니다. 그 앞에 다른 정치적 이유나 구실이 굳이 필요할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귀족들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이곳으로 올 수 있을 계기를 만들어 주셨다는 말씀인가요.”

“계기라. 그리 거창하게 치장하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복도를 거닐었을 뿐입니다, 전하.”

“그게 고마운 겁니다.”

“아닙니다. 그저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여 퇴원하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저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시겠다고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작은 흠칫했다.

라키엘이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애초부터 그 정도 생각을 품지 않으셨으면, 다른 귀족들을 끌어들이지도 않으셨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또 들켰습니까?”

“역시나 너무 노골적이셔서 말입니다.”

라키엘은 다시금 싱긋 웃었다. 공작도 비슷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면, 전하? 제가 어떤 식으로 지지 선언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혹여 원하시는 방식이 있으시다면 제가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공작이 예의상 물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예상했다.

대략 귀족원 회의를 소집하고, 그곳에서 공식 선언을 하고 등등의 통상적인 지지 선언 절차가 떠올랐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되겠지.

그게 무난하겠지.

……라고 공작이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아, 방법이라면 준비해 둔 게 있습니다. 이봐? 딘라이어?”

딱!

황태자가 원장실 바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곱상한 차림의 앳된 귀족 남성이 냉큼 부름에 응답하며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응. 불렀지. 준비물은 잘 챙겨왔고?”

“물론입니다, 전하.”

“그럼 시작할까?”

“예, 전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딘라이어 영식이라고 불린 젊은 귀족이 주섬주섬 여러 물건을 원장실로 가지고 들어왔다.

한데 그 물건들이…….

“……저게 뭡니까, 전하?”

갑작스러운 상황의 급발진(?)에 얼떨떨해진 공작이 물었다. 라키엘이 뭘 그렇게 놀라느냐는 듯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보면 아실 텐데요. 캔버스, 물감, 붓, 기타 등등. 그림 그릴 준비를 하는 겁니다. 저 친구, 예전에 어머니를 치료받고 제 전담 화가로 취직했거든요.”

“전담 화가 말입니까? 그런데, 그림……이라니요?”

그림을?

지금?

여기서?

어째서?

공작의 머릿속에 물음표 백만 개가 떠올랐다. 라키엘이 더욱 싱글벙글 태연하게 웃었다.

“지지 선언을 제가 원하는 형태로 해 주겠노라 하셨지요?”

“예, 전하. 하온데…….”

“그러니까 박아야지요, 인증샷.”

“……예?”

“자자, 이쪽으로 와서 저와 나란히 앉으시죠. 이왕이면 엄지도 척. 미소도 지으시고.”

“이, 이렇게 말입니까?”

“에헤이. 좀 더 자연스럽게.”

“아, 예…….”

공작은 황망함에 허둥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황태자와 나란히 앉아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딘라이어 영식이 그런 황태자와 공작을 재빠르게 그렸다. 즉석 그림에 적합한 크로키 스타일로. 채색도 가능한 한 단순하게.

그리고 다음 날.

공작의 지지 선언을 겸한 입원 인증샷이 한의원 로비에 뙇 내걸렸다. 그 아래에는 공작의 친필로 쓰인 후기와 서명도 야물딱지게 새겨졌다.

[별점 : 10.0]

[원장님이 친절하고 탕약이 맛있습니다. 재방문 의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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