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인증샷은 보상을 싣고 (1)
인증샷은 중요하다.
특히 유명인사의 인증샷은 더욱 중요하다. 누구나 최소 한 번쯤은 이런 식당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연예인, 유명인 등이 남긴 인증샷과 사인 수십 개를 한쪽 벽면에 완전히 도배해놓은 곳을 말이다.
그건 은근 중요하다.
처음 와보는 사람에게도 ‘오, 여기 유명한 맛집인가 봐’라는 인상을 은연중에 꽝 찍어주게 된다. 첫인상부터 좋게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또한, 그렇게 입소문이 시작되는 셈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라키엘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별궁 한의원 로비 한쪽 벽면. 그곳에 방금 내걸린 액자가 있었다. 자신과 귀족원장 에스토크 공작이 나란히 정답게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진 액자였다.
액자 아래에는 에스토크 공작의 친필 서명과 후기도 야물딱지게 새겨져 있었다.
[별점 : 10.0]
[원장님이 친절하고 탕약이 맛있습니다. 재방문 의사 있음.]
그림이 완성된 직후였던가.
후기를 써달라는 말에 공작이 내보이던 반응이 떠올랐다. 뜻밖에도 공작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의 뜻을 단번에 간파한 듯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어 왔다.
“전하께서는…… 허공에 한 번 울려 퍼지고 끝날 지지선언이 아닌, 오래도록 박제처럼 새겨질 형태의 선언을 원하시는 것이로군요. 잘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던 공작의 모습.
내심 놀라웠다. 과연 오랜 시간 귀족계 정치판에서 구른 짬밥(?)이 어디 가지 않는구나 싶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남길 후기가 발휘할 영향력, 파급력을 꿰뚫어본 것이겠지. 이를테면 지금, 별궁 한의원 로비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 같은 것들을 말이다.
수군수군…….
전에는 그저 사람들이 지나치기만 하던 한의원 로비였다. 진료를 위해 방문한 사람들이 접수를 하고, 진료과를 배정받고, 병동으로 안내받아 떠나는, 집의 현관 역할을 하는 장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사람들이 그저 생각 없이 지나치지 않았다. 로비로 들어오는 순간 일단 발길을 멈추었다. 정면에 내걸린 인증샷 때문이었다. 당연했다. 일부러 눈길이 제일 먼저 닿는 자리에 액자를 내걸었으니까.
다음으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수군거림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 묘한 눈초리로 인증샷을 구경하다가 옆 사람과 문답을 나누곤 했다.
저거 황태자 전하 아니시냐. 전하와 나란히 있는 인물은 누구냐. 암만 봐도 귀족원장인데. 그럼 설마 귀족원장도 여기서 진료를 받은 거냐. 그만큼 여기가 엄청난 곳이었구나. 숙덕숙덕. 와글와글. 블라블라. 기타 등등.
‘좋아. 딱 좋아.’
라키엘은 방긋 웃었다. 딱 기대했던 반응이었다. 이래서 인증샷을 남기게 한 거다. 귀족원장의 공식적 지지선언이라는 메가톤급 이벤트가 1회성으로 끝나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걸 단순히 귀족원 회의에서 말로 하는 선언으로 끝내? 물론 의사록이야 남겠지. 기록의 형태로도 남겠지. 하지만 기록으로 남겨봤자 대중이 그걸 피부로 체감을 해주나? 아니. 관심을 많이 가지는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잘 모를걸.’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살던 시절을 생각해도 그러했다. 말로 하는 선언, 이벤트는 효과가 오래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순간에야 사람들이 우와아, 뜨겁게 반응을 보이다가도, 금방 터지는 다른 이슈에 순식간에 묻히기 일쑤였다.
그래서였다.
불특정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쉽게, 매일, 눈으로 체감하며 볼 수 있는 곳에 공작의 지지선언을 박제(?)하여 버렸다.
물론 라키엘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귀족원장의 공식적 지지선언?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또한 구실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톨레도 집정관님? 통풍 발작이 완전히 가라앉았습니다. 축하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는 뭘요. 저는 집정관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아주 작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였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전하.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하의 치료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도 여전히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제게 해주신 그…….”
“내 손은 약손 시술요?”
“예, 전하. 그게 또 얼마나 신묘하고 신기한지. 저는 그런 기적은 처음 느꼈습니다. 그러니…….”
“인증샷을 남겨주시겠다고요?”
“예, 전하.”
“이런이런. 제가 먼저 요청을 하지도 않았는데. 고마우셔라.”
“그야…… 에스토크 공작께서 좋은 선례를 남겨주었으니 말입니다. 허허허.”
귀족원의 집정관, 톨레도 후작이 사람 좋게 웃었다. 그는 라키엘을 향해 은근슬쩍한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전하, 제가 인증샷이라는 걸 남기는 두 번째 귀족이…… 맞습니까?”
“그렇지요. 에스토크 공작에 이어 아주 훌륭한 선례를 남기게 되셨군요. 축하합니다.”
“아, 역시 그렇군요. 실로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하면 별점은…… 알지요?”
“물론 10점을 드려야겠지요?”
“하하하. 이래서 제가 집정관님을 좋아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저도 10점을 새기게 되어서 기쁘기가 그지없습니다, 전하.”
당연하게도 별점은 무조건 10점.
그렇게 또 한 폭의 인증샷이 한의원 로비에 내걸렸다.
[별점 : 10.0]
[여기 로비 너머에 행복 있다. 내 손은 약손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귀족원장의 첫 인증샷.
집정관의 두 번째 인증샷.
그걸로 게임(?)은 터졌, 아니, 끝났다.
귀족원에서 가장 영향력이 커다란 주요인사 쌍두마차가 퇴원을 하며 기념으로 인증샷과 낭낭한 별점을 남겼다. 그런 선례가 생기니, 다른 귀족들도 자연스럽게 인증샷의 행렬에 동참했다.
즉, 귀족이 별궁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고 퇴원을 하면 인증샷과 후기를 남겨야 함이 당연한 암묵적 매너이자 필수 코스가 되었다.
인증샷이 인증샷을 불렀다. 대세와 유행이 귀족들의 발길을 불렀다.
더욱 많은 귀족이 별궁 한의원의 원장실을 방문하고, 진료실에서 침을 맞고, 내손 약손 스킬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탕약의 맛을 온몸으로 체감했으며, 또 하나의 인증샷을 남겼다.
그렇게 2개월이 지났다. 100번째의 인증샷이 한의원 로비에 내걸렸다. 마침내 귀족원 과반수의 지지선언을 받아낸 것이었다.
그걸 보는 별궁 식구들은 새삼스러운 감회에 휩싸였다.
‘우리 전하께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예전의 별궁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었는데.’
그러했다.
항상 파리만 날리는 곳이 별궁이었다.
황태자가 기거하고 있음에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 그 어떤 귀족도 친밀하게 다가오지 않던 권력의 외딴 섬.
황도 내에서의 별궁은 그런 곳이었다. 별궁에서 최소 5년 이상 근무한 이곳의 시종, 시녀들은 그러했던 과거를 너무나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마음으로 외쳤다.
‘……그때가 편했는데!’
역시 그러했다.
장사가 안 되는 가게에서 근무해본 사람은 안다. 시급은 꼬박꼬박 받으면서 꿀을 빠는 그 느낌! 시간을 때우며 파리만 날리는데 그냥 돈이 통장에 촵촵 꽂히는 그 느낌!
한때 이 별궁이 그러한 꿀보직(?)이었다. 물론 병약한 황태자의 히스테리를 감당하는 순간은 고역이긴 했지만, 그것만 빼면 대체적으로 근무하기에 정말로 널널한 곳이 여기였다.
황태자가 병약하니까 연회를 열지 않았다. 사냥도 즐기지 않았다. 외부 행사 같은 것도 없었다. 방문자도 없었다. 덕분에 청소와 황태자 수발만 열심히 들면 되었다.
한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바빠서…… 미칠 것 같아.’
‘내 원래 업무는 그냥…… 황태자 전하의 침구를 세탁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입원 병동에서 나오는 침구 전체를 떠맡게 됐지?’
‘난 그냥…… 황태자 전하의 식사에 쓰이는 식기만 닦으면 됐는데! 어째서! 왜! 100개가 넘는 환자들 식판을 다 정리해야 하는 거냐고!’
……그러했다.
어느새 별궁 한의원의 훌륭한 역군(?)으로 거듭나게 되어 버린 시종과 시녀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겉으로는 투덜거렸으되,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금 상황을 딱히 비관하지는 않았다.
황태자의 달라진 모습과 위상 덕분이었다.
귀족원장의 지지를 받는 황태자. 귀족들의 발길로 북적이는 별궁. 이런 장소에서 근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본인과 가족에 대한 주위의 인식과 대접이 달라졌다. 더불어 자부심도 함께 느끼게 되었다.
예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전에는 황가의 시종, 시녀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무시를 당하곤 했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비슷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내가 전보다 조금 바빠지고 피곤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차라리 이게 좋아.’
물론 정신적인 만족감뿐만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실제로도 별궁 식구들에게 두둑한 특별수당, 보너스를 챙겨 주곤 했다. 마음과 주머니가 모두 빵빵해지니, 전보다 고단해진 업무를 감당하면서도 절로 힘이 났다.
모두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게 예전과 너무나 달라진 황태자 전하 덕분이라고. 이제 더는 예전의 병약하고 무능했던 황태자 전하가 아니시라고.
‘……라는 눈빛으로 다들 나를 쳐다보긴 하는데, 어째서 황제 이 양반한테서는 소식이 없냐.’
100번째의 인증샷이 로비에 걸린 날.
바빴던 하루 진료를 모두 마치며 라키엘은 쓰린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낮보다 한산해진 로비를 돌아보았다.
드넓은 로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인증샷 액자. 이미 이 소식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지금쯤은 황제도 자신이 내기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 소식이 영 없었다.
‘이 양반 혹시 모른 체하면서 은근슬쩍 넘기려는 거 아니야?’
덜컥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매번 잘도 들어맞는 건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다 끝내지 못한 이른 밤, 황궁에서 사람이 왔다. 황제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온 칙사였다.
‘흐음, 과연?’
황제는 서한에 어떤 내용을 담아 두었을까. 라키엘은 서한의 내용을 살폈다. 안쪽에 쓰인 글귀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네가 짐에게 호언장담하였던 일을 마침내 현실로 이루었구나. 실로 장하도다. 또한, 매우 축하하는 바로다. 이로써 너는 짐과의 내기에서 승리하였으니, 충분히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것이로다.]
……라는 내용이었다.
‘에계? 이걸로 끝?’
라키엘은 서한을 후루룩 읽자마자 미간을 콱 찡그렸다. 서한 내용이 생각보다 너무 심플하고 알맹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뭔가 더 있어야 할 내용이 좀 빠진 거 같은데?’
혹시 황제가 숨겨둔 기믹(?)이나 이스터에그가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였다. 서한을 김 굽듯이 촛불에 살랑살랑 그슬려 보았다. 한데도 따로 생겨나는 글자가 없었다. 식초를 뿌려 보기도 했다. 결과는 역시나였다.
‘뭔데 이거. 기껏 내기로 사람 애쓰게 만들어놓고, 자기가 졌으니까 칭찬만 하고 끝이라고? 지금 장난해?’
빠직, 혈압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즉시 시종장을 불렀다.
“마차를 준비해줘.”
“전하?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가시려 함이십니까?”
시종장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황궁.”
“예에?”
“지금 당장 폐하를 좀 뵈어야겠다.”
그렇게 마차에 올랐다. 빛의 속도로 입궁을 감행했다. 다행히 황제는 아직 침소에 들지 않았노라 했다. 덕분에 알현까지의 모든 과정이 프리패스였다.
“너는 어찌하여 이런 시간에 무턱대고 짐을 찾아온 것이더냐.”
살짝 졸린 걸까. 알현실로 들어오는 황제의 모습은 평소보다 다소 노곤해 보였다. 그러나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부탁을 하러 온 게 아니니까. 따지고, 권리를 찾으러 온 것이니까.
그러니까 거두절미하고.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또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폐하와의 내기에 승리한 보상으로 황실 비고 상위 구역의 열람권을 요구하고자 하옵니다.”
질렀다.
황제가 흠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