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인증샷은 보상을 싣고 (2)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또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폐하와의 내기에 승리한 보상으로 황실 비고 상위 구역의 열람권을 요구하고자 하옵니다.”
거두절미하고 질렀다.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하면 안 된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섞었다간 황제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딱 좋다. 황제 저 양반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뭔가를 요구하려면 딱 그것부터 꺼내야 한다.
이게 바로 선빵필승 아니겠는가.
‘됐다.’
라키엘은 내심 주먹을 쥐었다. 황제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덕분에 느낄 수 있었다. 황제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흠칫. 눈썹이 꿈틀. 당황하는 게 보였다. 경혈 스캐닝으로도 관찰할 수 있었다.
키이이잉-!
경혈 스캐닝을 발동한 시야 속. 황제의 기혈 흐름이 쿵더덕쿵덕 16비트의 급격한 엇박을 타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이쪽이 내지른 요구에 내심 크게 당황한 탓이겠지.
그런데 황제의 표정만큼은 여전히 포커페이스 일변도로 태연했다.
“허. 황실 비고 상위 구역의 열람권이라. 짐이 하나 묻겠도다. 황태자여, 그대는 그 권한을 짐에게 일찌감치 맡겨둔 적이 있었더냐?”
“맡겨둔 적은 없사옵니다.”
“한데 너는 어찌하여 그 권리를 이토록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더냐?”
“제게 그 권리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옵니다.”
“근거가 무엇이더냐?”
“이미 말씀을 드렸지 않사옵니까?”
“짐과의 내기에서 승리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더냐?”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라키엘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다른 이와도 아닌, 무려 황제와의 내기였다. 3개월 안에 귀족원 구성원 과반수의 공식적 지지선언을 얻어내겠노라 하였다. 당시 황제의 반응은 어떠하였던가.
“당시, 폐하께서는 제가 그 일을 해낼 수 없으리라 확신한 듯이 코웃음을 치셨사옵니다. 이미 당신께서 승리한 내기라 여기시는 듯하시었지요. 하오나 보시다시피 저는 그 말도 안 되는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현실로 일구어 내었사옵니다.”
“그래서 짐이 축하의 뜻을 담은 서한을 내렸지 않았더냐. 혹여 아직 받지 못한 것이더냐?”
“서한은 잘 받았사옵니다.”
“한데 무엇이 문제인가.”
“서한‘만’ 받은 것이 문제이옵니다.”
“칭찬의 말로만 입을 닦고 끝내지 말라는 뜻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노골적이로구나.”
“제가 이렇게 나오지 않으면 폐하께서 끝내 저의 마음을 몰라 주실까 우려가 되어 한달음에 달려왔기 때문이옵니다.”
“뻔뻔하기까지.”
“송구하옵니다, 폐하.”
“진심으로 송구하긴 하더냐?”
“그 역시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
황제는 헛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사실 요즘 들어서 매일 흐뭇함에 흠뻑 빠져 있던 터였다. 연일 전해져 오는 별궁 소식 덕분이었다.
어제는 귀족 누구누구가 별궁 한의원을 찾았고. 또 오늘 아침엔 어떤 귀족이 퇴원을 하면서 인증샷이라는 이름의 액자를 별궁 로비에 걸었고. 오후에는 별로 아프지도 않은 귀족들 여럿이 감기 핑계를 대면서 별궁으로 모여들었고. 등등, 등등.
별궁에 심어둔 정보원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올리는 보고에 아빠 미소가 절로 연달아 터졌더랬다. 물론 신하들 앞에서는 근엄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였지만, 그 와중에도 희미하게 실룩거리는 왼쪽 오른쪽 콧구멍은 멈출 수가 없었더랬다.
들을 때마다 흐뭇했다.
접할 때마다 짜릿했다.
오랜 시간 앓던 이가 확 빠진 듯이 시원하기도 하였다.
이유는 달리 없었다.
‘그동안 이 녀석의 입지는 매우 불안정하였지. 딛고 선 바닥은 황태자라는 이름이되, 실상 그 바닥의 얇기가 그지없어서 살얼음 위에 겨우 서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했다.
자신의 맏아들, 황태자 라키엘. 녀석의 입지는 탄탄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20년간 이어왔던 투병 생활 때문이었다.
비록 근래에는 그 인식을 제법 바꾸어놓고 있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아직 많은 이들이 황태자의 앞날에 물음표를 달아두곤 했다. 언제 다시금 건강이 악화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특히나 상위 귀족들이 그런 경향이 강했다. 그들만큼 정치적 줄타기에 민감한 이들이 없으니까. 행여나 섣불리 황태자에게 줄을 댔다가, 황태자의 건강이 악화되면 자신의 입지 또한 줄어들 테니까.
‘그런 사태를 우려하여 아직 이 녀석과 거리를 두는 귀족이 대다수였지. 한데…….’
이 녀석은 그걸 바꾸어 보겠노라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것도 단 3개월 안에 해낼 수 있노라 가슴을 탕탕 쳤다.
솔직히 기도 차지 않았다. 근래 이 녀석이 놀라운 성과를 연이어 보이긴 하였으나, 거기까지는 무리라고 여겼다.
한데 그럼에도 기이한 기대감을 한편에 품고는 있었다. 혹시나 이번에도 또, 어쩌면 이 녀석이 다시, 라는 묘한 기대감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설마하니 이 정도로 해낼 줄은 몰랐다. 생각할수록 흐뭇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녀석에게 서한을 보냈다. 내용에서 일부러 알맹이를 쏙 뺐다. 그걸 통해 이 녀석을 다시금 시험하였다.
그 결과 또한 대성공이었다.
‘그렇다고 서한을 받자마자 짐을 만나러 이렇게 달려올 줄이야. 허허허. 허헛!’
지배자가 될 이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 이득, 무형의 모든 자산, 그것들이 보이는 순간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 움켜쥐어야 한다. 설령 놓치더라도, 움켜쥐기 위해 손이라도 뻗어야 한다.
라키엘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한 황제였다. 하여 일부러 칭찬으로만 퉁치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그였다. 하여 오늘 부리나케 달려온 라키엘의 모습을 보자니 더없이 기쁘고 행복하였다.
라키엘을 향해 건네는 그의 목소리에도 흐뭇함이 배어났다.
“그래. 이토록 뻔뻔하고 무엄하며 경우조차 모르는 황태자여. 정리를 하자면, 너는 지금, 내기를 제안하던 당시에 협의하지도 않았던 내용의 보상을 짐에게 요구하겠다는 것이더냐?”
“예, 폐하.”
“쯧쯧, 실로 두꺼운 안면이로다. 대관절 누구를 닮아서 이런 것인지.”
“알고 계시리라 믿사옵니다, 폐하.”
“버릇이 없기까지.”
“하오나 저의 요구가 무리하지는 않은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폐하.”
“어찌하여 감히 그렇게 장담하는 것이더냐.”
“제가 이렇게 찾아올 것을 폐하께서 기대하고 계셨지 않사옵니까?”
“헛소리가 길구나.”
“하온데 어찌하여 조금 전부터 계속하여 웃음을 짓고 계신 것이시온지.”
“하도 가당찮기에 나오는 비웃음이로다. 너는 이런 것도 못 알아보느냐?”
“제 눈에는 오직 황태자의 적절한 요청에 흐뭇해하시는 인자한 폐하의 모습만 보이옵니다.”
“감히 감언이설로 짐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려 드는구나.”
“저의 솔직한 마음이 감언이설로 들리시었다면 그 또한 저의 책임이자 부족함의 소치이오니, 실로 송구하옵니다, 폐하.”
“……허.”
기쁘다.
너무 기뻐서 당장 공중제비라도 돌고 싶다.
황제는 함부로 실룩거리려는 입꼬리와 수염을 애써 붙들어 당겼다. 후계자 앞에서 기쁜 모습을 쉽게 보이는 것은 경망하고도 헤픈 일이니까.
그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잘라내듯 말하였다.
“짐은 황태자의 요구를 거절한다.”
“예?”
“대신 특별히 명하노니, 황태자는 짐의 명에 따라, 현시점으로부터 자정까지, 황실 비고 상위 구역을 열람하고 한 가지 물건에 한하여 자유로운 취득을 하도록 하여라.”
“……그게 그거 아니옵니까?”
“엄연히 다르도다.”
“대체 어디가…….”
“짐이 너의 요구를 헤프게 들어주는 쉬운 사람으로 보이더냐? 착각하지 말지어다. 이것은 단지 짐의 명일 뿐이니라.”
“아, 예…….”
“하면 어서 물러가 보거라. 더는 짐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지 말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물러가라 하였거늘.”
“명을 받드옵니다, 폐하.”
라키엘이 샤샤샥 물러났다.
그렇게 황제는 알현실에 홀로 남겨졌다. 덕분에, 그때부터 은밀하게 흔들어 재낀 황제의 기쁨의 실룩실룩 댄스타임은 누구도 모를 역사의 비밀로 남게 되었다.
♣
“전하, 솔직히 조금 궁금합니다.”
“뭐가?”
마침내 황제의 허락을 얻어 황궁비고로 향하는 길이었다. 호위로 동행하던 데미안 녀석이 의문을 표했다.
“전하께서 폐하와의 내기에서 이기신 것도, 확실한 보상을 얻고자 하심도 알겠는데…… 어째서 굳이 황궁비고를 콕 짚어 언급하신 건지가 말입니다.”
“아하. 내가 찍어놓은 물건이 있는 것 같다?”
“예. 꼭 그렇게 보입니다, 전하.”
“정답이야.”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노리는 물건이 있었다. 언제부터? 최근부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궁비고 관리를 도맡았던 어느 고위 귀족에게서 지지선언을 받은 뒤부터였다.
“리브라노 백작이라고 알지?”
“예, 압니다. 통풍 때문에 유난히 남들보다 더 아파했던 귀족이었지요?”
“어. 유난히 통증이 심했지. 내손 약손을 해줘도 은근하게 계속 아파했을 정도였으니까. 어쨌건, 그자가 인증샷을 그리는 도중에 내 만년설을 보더니 슬쩍 알려주더라고. 황궁 비고 상위 구역에 내 만년설과 짝이 되는 무구가 보관되어 있다고.”
“만년설과 짝이 되는 무구 말입니까?”
“어.”
사실이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기도 했다.
리브라노 백작이 알려준 말에 따르자면, 만년설과 그 무구는 짝을 이룰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하였다. 물론 까다로운 사용 조건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건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만년설도 사용하기가 쉬운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어쨌건, 들어가자.”
두 사람은 비고 입구에서 절차를 밟았다. 하급 구역에만 들어가며 아쉬움을 느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상급 구역으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상급 구역의 구조도 하급과 비슷했다.
‘딱 마트네, 마트.’
드넓은 공간에 카테고리로 나누어진 수많은 진열대가 있었다. 그러나 하급 구역을 헤맸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의 라키엘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물건의 정확한 위치를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진열 번호가 JA-0928이라고 했는데. 그래, 이쪽인가.’
입구에 비치된 안내도를 통해 진열대 위치를 단숨에 짚었다. 그곳으로 갔다. 과연 찾고자 하던 물건이 정확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마침내 찾아냈다. 만년설과 짝을 이루도록 만들어진 마법의 세트 무구.
그 앞에는 이런 안내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름 : 만년필]
[분류 : 도검류]
[입수처 : 불명]
[분류 등급 : 상급]
[용도 : 사용자가 마나를 주입할 시, 본체의 코어가 마나를 변환하여 펜촉을 통해 화염의 잉크를 방출 및 분사합니다.]
[특이사항 : 사용자의 마나 조절 능력이 지극히 섬세할 경우, 분출하는 화염 잉크의 온도를 큰 폭으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안내 문구를 읽은 라키엘의 눈이 탐욕으로 반짝였다.
‘찾았다. 내 한의원용 온열 찜질 치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