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만년필의 위력 (1)
‘찾았다. 내 한의원용 온열 찜질 치료기.’
라키엘의 눈이 탐욕으로 반짝 물들었다. 그는 진열대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적당한 길이의 뭉툭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바로 만년설과 짝을 이룬다는 1+1 세트(?) 무구, ‘만년필’이었다.
“…….”
이거, 작명 센스 진짜.
라키엘은 잠시 흔들리려는 멘탈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차분해진 시선으로 만년필의 모양을 살폈다.
‘전체적으로는…… XL 사이즈 유성매직 같은 느낌이네.’
길이는 15센티 정도. 두께는 배드민턴 라켓 손잡이와 비슷했다. 한쪽은 뭉툭하고, 한쪽은 볼펜 앞머리처럼 뾰족했다. 뾰족한 쪽은 유리로 세공된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저쪽이 바로…….
‘화염의 잉크가 분사되는 쪽이란 거지?’
딱 보니까 알겠다. 크기도, 작동 방식도 모두, 그냥 화염 잉크를 뿜어내는 유성매직인 거다. 한데 그 모습이 데미안 녀석에겐 생소하게 느껴진 걸까.
“이게 전하께서 찾으시던 물건입니까?”
“어.”
“한데…… 모양이 좀…… 볼품이 없군요.”
“그래?”
“예. 전하.”
데미안 녀석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손잡이만 덜렁 있어서 굉장히 허전해 보입니다. 안내 문구를 살펴보자면 한쪽으로 화염이 분사되는 것 같기는 한데, 손잡이를 보호하는 가드도 없고, 무게중심이 잘 맞을지도 걱정이고, 전하께서도…….”
“나? 내가 왜?”
“검을 제대로 사용하시는 걸 좀처럼 보질 못해서 말입니다.”
“아하. 내 검을 다루는 능력이 허섭해서 그냥 칼도 아닌, 이런 화염 뿜어대는 검을 다루다가 다칠 거 같다, 이 말씀이지?”
“예, 정확하십니다. 만일 그러한 불행한 일이 생기고, 심지어 전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내가 잘못되면?”
“저는 직업을 잃겠지요?”
“…….”
“호위할 대상이 죽어서 사라지는 거니까, 특근대원들도 전부 실업자가 될 거고.”
“…….”
“요즘 몇몇은 이성과 교제를 시작한 이들도 있던데 말입니다. 누구는 벌써 결혼 계획까지 꾸리고 있고요.”
“…….”
“그런 이들마저 실업자가 된다면…… 후우, 그거 참.”
“어이.”
“예, 전하.”
“내가 댁들 직업 셔틀이야?”
“셔틀이 뭡니까?”
“……쯧, 됐다.”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데미안 녀석이 말은 저렇게 하지만, 실제 마음은 다르다는 걸 안다. 그저 ‘전하가 걱정됩니다’라는 말을 그대로 하기에 낯이 뜨거워서, 어쩐지 민망해서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것 또한 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내가 걱정되면 그렇다고 하면 되잖아?”
“……글쎄요?”
“어?”
“저는 전하가 걱정된다는 말씀은 드린 적이 없고, 드릴 생각도 딱히는…….”
“…….”
“어쨌건, 전하께서 이 무구를 제대로 안전하게 다루실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거라면 괜찮아.”
“어떻게 말입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쪽을 돌아보는 데미안. 좀처럼 이해가 안 된다는 투였다. 물론 그렇겠지. 내가 생각해도 화염의 검을 능숙하게 다루는 내 모습이 잘 상상이 안 되니까.
하지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당연하다.
“검으로 안 쓸 거야.”
“예? 그럼……?”
“온열 찜질기로 쓸 거거든.”
“…….”
“한의원이니까 찜질기가 있어야지. 만년설로 냉찜질, 만년필로 온찜질. 딱 좋네. 이제 좀 구색이 갖춰지네. 어오 속이 후련해진다, 진짜.”
라키엘은 만면에 진심 가득한 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그동안 별궁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내내 아쉽고 불만인 점이 있었다. 바로, 물리치료 기구가 부실하다는 점이었다.
별궁 한의원도 나름 한의원인데. 한데 어째서 제대로 된 찜질 기구가 없는가. 이게 말이 되는가.
한의원 하면 물리치료.
물리치료 하면 한의원.
그게 보편타당한 상식인의 국룰(?)일진대.
한데 어째서, 별궁 한의원에는 제대로 갖춰진 찜질 기구가 없는 것인가…… 라는 근원적인 공허함과 아쉬움이 내내 마음 한쪽에 덜렁덜렁 걸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하.”
“응?”
“지금도 찜질기는 있지 않습니까?”
“데운 모래주머니를 천으로 감싸서 환부에 올려주는 거?”
“예, 전하.”
“그래도 그거 불편하잖아.”
“예?”
“일단 모래라서 무겁고. 게다가 은근히 잘 식거든.”
“잘 식다니요? 제가 느끼기로는 30분은 너끈히…….”
“그게 잘 식는 거지. 최소 한 시간은 온기가 가야지. 그래야 찜질하면서 잠도 푹 자고.”
당연한 이야기다. 자고로 물리치료 찜질을 받으면서 때리는(?) 낮잠만큼 꿀잠이 없다.
한데 지금 별궁 한의원의 찜질은? 그걸 제대로 충족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온기가 금방 식는 찜질 방식 때문에 모래주머니를 갈아줘야 하고, 그 어수선함 때문에 환자가 편히 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거, 호신용으로도 은근 쓸 만할 거야. 여차하면 최대 출력으로 화염을 뿜어낼 수도 있고. 그거 대놓고 화염방사기니까.’
오히려 어설픈 무기보다 훨씬 나으리라.
위급한 상황이 되면 만년필로 주위를 다 태우고, 그 와중에 자신은 만년설의 냉기로 안전하게 보호받고. 게다가 사용하기에 따라서 휴대용 라이터나 손난로, 횃불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서바이벌 용도로도 썩 괜찮은 셈이 아니겠는가.
‘생각할수록 괜찮은 멀티툴이거든.’
문득, 황궁 비고 관리관이었다는 리브라노 백작에게서 만년필에 대한 정보를 들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 이후부터 나름으로 틈틈이 했던 자료 조사도 떠올랐다.
“마침 리브라노 백작을 통해서 비고 소장 목록과 개별 안내서를 입수할 수 있었지. 황족만 열람이 가능하다는 조건이 있긴 했지만, 그건 나한테는 문제가 안 됐고. 어쨌건- 자료를 찾다 보니까 만년설과 만년필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더라고.”
“흥미로운 사실이라니요?”
“어. 이 세트 무구를 만든 존재가 드래곤이더라?”
사실이었다.
흥미로웠다.
게다가 그 드래곤의 정체는 더 흥미로웠다.
“플로레스? 라는 이름의 해츨링이래. 기록에 따르면 용왕 베르키스라는 드래곤의 아주 어린 동생이라나. 어쨌건, 플로레스라는 그 드래곤은 엄청난 마법적 재능을 지녔다더군. 덕분에 성체가 되지도 않은 시점에 마법 무구를 창조할 수준에 이르렀다고도 하고.”
“그게 전하의 만년설과 이 만년필인 겁니까.”
“어. 이게 그 해츨링의 첫 작품인 것 같아. 친구였던 샤를로트 대제에게 선물한.”
“샤를로트 대제…….”
“너도 알지?”
“예, 조금은요.”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도 당연히 모를 수가 없겠지. 샤를로트 대제는 마젠타노 황가의 천 년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군주니까. 이전엔 왕국이었던 마젠타노가, 그녀의 대에 이르러 마침내 제국으로 성장을 하였으니까 말이다.
‘딱 그거지. 고구려에 광개토대왕, 조선에 세종대왕이 계신다면…… 여기 마젠타노에는 샤를로트 대제가 있다는 거. 그만큼 길이길이 존경을 받는 위대한 군주라는 거지.’
샤를로트 대제의 이곳에서의 포지션이 딱 그러했다. 게다가 소설 마검황에 나왔던 설정을 돌이켜보자면…….
‘그녀는 그녀 못지않게 성군이었던 어머니와, 잔머리가 엄청나게 비상했다는 아버지의 장점을 두루 물려받았다지. 게다가 검술 스승은 그 유명한 공전절후의 그랜드 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이라고 했고. 드래곤을 친구로 두었고. 스펙 보소.’
생각할수록 감탄이 나왔다.
그 후로 이어진 마젠타노 황가의 계보 또한 그러했다. 세월이 지나며 그랜드 마스터 하비엘 아스라한의 손녀가 샤를로트 대제의 아들과 결혼을 하였다던가.
그러니까, 마젠타노 황가에는 엄청난 능력자들의 핏줄이 야물딱지게 비빈 짬짜면처럼 꼼꼼하게 얽혀 있는 셈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내 몸뚱이라는 거지. 근데 이 몸은 왜 이런 거냐, 대체.’
상념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터져 나오는 때아닌 탄식!
라키엘, 아니, 이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찌어찌 자신이 차지하게 된 황태자 라키엘의 몸 상태를 떠올리자니, 불량품(?)을 잘못 받은 기분이 든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런 탄식과는 별개로, 데미안의 의문에 잠긴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여기, 이 무구의 안내문에는 입수처가 ‘불명’이라고 쓰여 있는데 말입니다.”
“아 그거? 구라…… 아니, 위장이야.”
“위장이요?”
“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군가가 비고에 숨어들어 무구를 훔치는 사태에 대비한 조치야. 무구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볼 수 없도록 말이지. 원래는 세트인 두 무구가 상급과 하급 구역에 나뉘어서 비치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고.”
“그렇군요. 어쨌건 드래곤이 창조한 무구…… 샤를로트 대제…… 그럼 전하의 만년설과 이 만년필 모두가 아스라한 심법 사용자를 위해 만들어진 최적의 무구라는 뜻이겠군요.”
“어, 정답.”
데미안의 짐작대로였다.
아스라한 심법은 마젠타노 황가에 대대로 전해진 고유의 심법. 만년설과 만년필은 그 심법의 사용자만이 진가를 끌어낼 수 있는, 딱 그런 사용 방식의 무구였다.
“그러니까 너는 사용 못 해. 미안.”
“……딱히 부럽진 않습니다.”
“그런데 왜 침은 꼴깍 삼키지?”
“그냥 목이 말라서요.”
“그냥?”
“예.”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전혀 아닙니다.”
“아프면 말해야 해. 알지?”
“……알고 있습니다.”
물론이다. 전에 황태자가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마계왕. 그의 각성 방식이 아주 고약할 거라고 했던가. 치유할 수 없는 치명적인 병을 일으키며 자신의 육신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을 것이라 하였던가.
“아마도 마계왕은 지금도 널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고 싶어서 안달일 거야. 그런데 외부적으로는 그걸 할 방법이 없으니까, 네 몸에 불치병을 일으킬 거고.”
“그럼 그 위기 때문에 제 몸이 더욱 각성의 길에 가까워지는 거겠지요?”
“어. 그러니 뭔가 몸이 불편하다, 어디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알려줘. 그래야 최대한 일찍 치료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어쨌건 지금은 딱히 불편한 곳은…… 딱 하나 있긴 합니다.”
“어딘데?”
“아까부터 계속 귀에 걸려 있는 전하의 싱글벙글 입매가 좀 불편하고 거슬리는군요.”
“……내 입매가 어때서?”
“못생기셔서요.”
“…….”
“죄송합니다.”
“아, 잠깐 역모죄 선고 마려웠네.”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비고 관리인을 불렀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만년필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 이 확인 서류, 저 서약 각서, 여러 문서를 작성한 후에야 비고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별궁으로 돌아온 라키엘은 곧바로 안뜰 연무장으로 향했다. 사방이 트인 모래 바닥이라 불장난(?)을 치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만년필과 만년설을 꺼냈다.
웅웅웅-!
두 무구를 양손에 쥐자마자, 녀석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는지 가늘게 떨며 공명음을 토해냈다. 마치,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 상봉한 형제 무구에게 기쁨을 표현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좋아.”
라키엘은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였다.
……키이이잉!
익숙한 감각. 거칠게 날뛰는 써클의 포효. 증폭된 마나를 세심하게 조절하였다. 우선 왼손의 만년설에 마나를 투입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츠즈즈즈!
냉기의 실드가 전개되었다.
그다음은 만년필 차례였다.
‘후우. 처음이니까 조심스럽게. 아주 약하게.’
어느 정도의 마나를 투입해야 화염 잉크가 분사되는지, 그 화염을 찜질에 맞도록 약하게 하려면 마나를 얼마큼 조절해야 하는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최소한의 강도로, 엄청나게 축소한 마나를 밀어 넣었다.
곧 반응이 왔다.
후우욱?
‘어?’
생각보다 반응이 좀 쎈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퍼엉-!
앞으로 내민 만년필 끄트머리에서, 화염방사기를 아득하게 능가하는 기세의 화염이 화산폭발처럼 분출하며 연무장의 20% 면적을 날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