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만년필의 위력 (2)
퍼어엉-!
“……!”
앞으로 내밀고 있던 만년필 끄트머리에서, 화염방사기를 아득하게 능가하는 기세의 화염이 터져 나왔다. 마치 화산폭발을 초근거리에서 직관(?)하는 것 같았다. 결과 또한 그러했다.
투확!
화염 방사를 맞은 연무장 일부가 송두리째 날아갔다. 지면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파였다. 열기에 의해 만들어진 구름이 버섯 모양으로 치솟았다. 주위의 모든 공기가 충격파로 터져 나갔고, 연무장과 맞닿은 별궁 별채의 건물 창문이 모조리…….
와장창-!
깨졌다.
물론 이쪽이라고 완전히 무사하지는 못했다.
“……어억!”
폭발의 반동 때문에 뒤로 넘어졌다. 아니, 아예 날아갔다. 몇 바퀴를 구른 걸까. 데굴데굴 한참을 하늘과 땅이 자리바꿈했다. 만일, 때마침 뻗어온 데미안의 손이 아니었다면, 연무장 반대편 끝까지 굴러갔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터억!
“컥!”
갑작스러운 급정거(?).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진짜로 큰일이 날 뻔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헉, 허억…….’
눈길을 들었다.
비로소 즉석에서 뚝딱 만들어진 결과물을 볼 수 있었다.
연무장 한쪽 귀퉁이에 반질반질한 구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방금 만년필로 겨누었던 방향이었다. 끔찍한 열기에 녹은 지면이 유리처럼 매끈해졌다. 아니. 유리처럼이 아니라…….
‘진짜 유리가 만들어졌네.’
그 면적의 길이와 폭이 각각 20미터는 되어 보였다. 주위라고 멀쩡할 리는 물론 없었다. 엉망이었다. 마치 라면 10인분이 담긴 솥을 거실 바닥에 떨어뜨리면 만들어질 결말을 보는 듯했다.
그만큼 엉망이었다. 온통 그슬리고, 파편으로 헤집어지고, 뒤집히고. 솔직히 당장 씨앗을 뿌리면 딱 좋을 정도로 연무장 한쪽을 발칵 뒤집어놓았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괜찮으십니까?”
“응 아니.”
데미안 녀석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막이 웅웅거렸다. 만약 만년필 사용에 앞서서 만년설을 발동하고 있지 않았다면? 냉기의 실드가 보호를 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폭발 순간의 끔찍한 열기에 고스란히 노출됐을 것이다. 화염을 정면으로 받지 않았더라도, 순간적인 복사열 때문에 전신화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 생각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비로소, 어찌하여 만년설과 만년필이 세트 무구인지를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사용하면서 찜닭 신세가 되지 말라는 깊은 뜻이 있었구만!’
거참 이거 만든 그 해츨링, 사상 한번 화끈하구나. 라키엘은 새삼스럽게 새록새록 돋아나는 소름을 툴툴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별궁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비상! 비상!”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연무장 방향입니다!”
야밤에 잠들어 있던 근위대, 특근대 모두가 다 깨어나서 현란한 비상사태 대응 지침을 온몸으로 구현하며 달려왔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누우우? 누우!”
정원에서 자다 깼는지, 우루스가 기겁한 기색으로 쿵쿵쿵 달려왔다. 야간 근무 중이던 웨어울프 간호사들마저도 모조리 변신한 모습으로 몰려왔다. 심지어 별채에서 잘 자다가 창문이 깨지는 날벼락을 겪은 시종, 시녀들도 산발이 된 채로 뛰쳐나왔다.
즉, 별궁 식구 대부분이 때아닌 공습경보(?)에 다들 간덩이가 철렁 떨어진 몰골이 되어 버렸다.
“전하아아아! 괜찮으십니까아!”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오다가 이쪽을 딱 본 가르딘 경마저도 울부짖듯 외치며 달려왔다. 그 모습에 결국, 라키엘은 자신의 죄(?)를 자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 다들 미안.”
어찌할 수 없는 민망한 쓴웃음만 자꾸 흘러나왔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하게 알겠다.
만년필 이거, 쉬운 물건이 아니구나.
♣
“후우. 이거 장난이 아니네…….”
그날 밤, 사고를 대강 수습한 후.
겨우 별궁 식구들을 달래고 침실로 올라온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온몸이 쑤셨다. 아까 때아닌 폭발에 뒤로 날아가며 데굴데굴 구른 탓일까. 전신에 2인분 같은 타박상을 낭낭하게 받아 버렸다.
‘생각보다 화력이 심각하게 화끈한데?’
그는 손에 쥔 만년필을 슬쩍 쳐다보았다. 고작 바나나 절반 크기의 유성 매직. 겨우 요만한 물건에서 나온 화력이 그 정도라니. 혹시나 해서 아무도 없고 탁 트인 연무장에서 사용해보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어쩌면 별궁을 홀라당 다 태워먹었을지도.’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한편으로는 심각한 고민이 쑴펑쑴펑 피어나서 미간에 칼주름을 만들었다.
‘이거, 어떻게 써먹지?’
아스라한 심법으로 마나를 가공해서 밀어 넣는 건 맞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작동에는 성공을 했으니까. 다만, 함부로 사용했다간 초가삼간 다 태워먹기 딱 좋다는 점이 너무나 크리티컬한 문제였다.
‘마나를 훨씬 약하게 넣어봐야 하나? 아닌데. 아까가 내가 투입할 수 있는 마나의 최소량이었는데.’
정말로 그러했다.
아무래도 화염을 사용하는 무구이다 보니, 사고가 날까 봐 염려가 되었다. 하여 시험 가동의 원칙을 떠올리며, 마나를 최소한으로 가장 약하게 해서 투입을 하였더랬다.
그런데 아까 같은 정신이 가출한 수준의 화력이 뿜어져 나왔다.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면 대전차 지뢰의 폭발을 능가할 위력인 거 같았다.
‘이러면 진짜 곤란한데.’
라키엘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제일 약하게 마나를 투입했더니 대전차 지뢰 수준의 위력이 퍼펑. 그럼 더 많은 마나를 넣으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걸까. 어쩌면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리는 건 아닐까.
어쨌건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다. 이대로는 안 된다. 환자를 찜질? 아니, 택도 없다. 그저 한 큐에 저세상으로 사출시켜 염라대왕 상담실로 총알배송 보내기 딱 좋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이거 분명히 마나를 조절하면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안내문에도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안내문의 기능 설명은 위장이 아니었다. 따로 해본 조사 결과 또한 그러했다.
‘쓰읍.’
[특이사항 : 사용자의 마나 조절 능력이 지극히 섬세할 경우, 분출하는 화염 잉크의 온도를 큰 폭으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분명 안내문에 쓰인 내용은 저랬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이 모르고 있을 뿐.
‘그게 대체 뭘까.’
라키엘은 밤이 깊도록 고민을 거듭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한 고민은 다음 날까지도 이어졌다. 황제의 호출을 받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짐이 방금, 너에게 괜찮으냐고 하문한 것을 듣지 못하였더냐?”
“아, 예?”
라키엘은 정신이 퍼뜩.
근엄한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묘한 눈빛을 보내오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어젯밤에 말이다. 별궁에서 큰 소란을 일으켰다고 들었노라.”
“아,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비고에서 가져간 무구로 폭발을 일으켰다지?”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니, 되었다.”
네가 무사하면 그걸로 충분하단다. 황제는 이어서 나오려던 뒷말을 삼켰다. 대신 엄격한 눈빛으로 라키엘을 일별하였다.
“혹여 어젯밤 비고에서 챙겨간 물건이, 화염을 내뿜는 물건이었더냐?”
“예. 그렇사옵니다, 폐하.”
“쯧쯧. 어설픈지고. 사용법조차 모르는 물건을 손에 넣고서 신을 내다가 사고나 치는 꼬락서니라니.”
“…….”
“나름으로 조심을 한다고 잔뜩 몸을 사리다가 그런 사단을 벌였겠지. 그 모습 또한 눈에 선하도다.”
“…….”
어쩐지 이번만큼은 변명할 말이 없다. 그러는 한편으로, 황제의 갈굼에 서린 묘한 어조 또한 은근슬쩍 느껴졌다.
마치, 만년필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혹여, 폐하께서는 만년필의 사용법을 알고 계신 것이시옵니까?”
“짐이 말인가?”
“예, 폐하.”
확실하다.
황제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 이쪽을 굽어보는 눈빛도, 표정도, 말투의 뉘앙스도 모두 그렇다. 그러니까 이건…….
‘뭔가를 내놓으면 꿀팁을 알려주겠다는 느낌인데?’
라키엘은 황제의 의중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쪽에게서 뭔가를 받아내려는 거다. 지금 자신을 부른 것도 단순한 걱정이나 책망이 아닌, ‘거래’를 위한 거다.
‘뭐지.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슬쩍 황제를 살폈다. 여전한 포커페이스였다. 너무 엄격해서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
그 모습을 보자 절로 골치가 아파졌다.
‘설마 또 한의원 접고 후계자 수업을 받으라는 건 아니겠지?’
황제 저 양반의 성격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만약 정말로 그런 대가를 요구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방어를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한 라키엘은 입을 열었다.
“부디 청컨대, 폐하께서는 제게 원하는 것을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일단 요구 조건을 들어보자 싶었다.
다시금 정신무장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황제의 대답이 돌아왔다.
“근래에 듣자 하니, 네가 무수한 귀족들의 통증을 어루만져 달래어 주는 신묘한 의술을 발휘하였노라 들었다.”
“예, 그렇사옵니다.”
혹시 내손 약손 스킬을 말하는 건가. 그럼 혹시…… 그걸 사술이라며 비난하려는 걸까. 이쪽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표정이 더욱 엄격해졌다.
“그러해? 하면 참으로 실망이로다.”
“…….”
역시.
또 이러는 건가.
……라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황태자여. 너는 무수한 귀족들에게는 그런 신묘한 재주를 잘도 발휘하면서, 짐에게는 그걸 써볼 생각을 한 번도 아니하였더란 말인가?”
“예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놀라움은 시작일 뿐이었다.
“참으로 실망이로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로다. 참으로 개탄스러운지고.”
“…….”
“평생을 병상에 누워 제 몫도 못 해내던 녀석의 지위를 내내 보존하여 주었건만, 그 오랜 시간 내내 기대감을 놓지 아니하여 주었건만, 짐에게 돌아오는 보답이 고작 이런 따돌림이란 말이더냐?”
“……예에?”
“그렇지 않더냐. 짐이 틀린 말을 하였느냐? 아니면, 네가 그 통증을 삭여준다는 의술을 짐도 모르는 사이에 짐에게 사용하였는데, 그걸 하필이면 짐만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더냐? 그건 아니지 않느냐?”
“아, 예…… 하오면…….”
“하오면?”
“지금…… 폐하께선 아픈 곳이 있으신 것이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황제가 불쾌한 듯 눈살을 팍 찡그렸다.
“네가 이 나이가 되어 보거라. 몸이 멀쩡해도 아니 아픈 곳이 없는 법이니. 온종일 국정에 매달리느라 목은 굳고, 어깨는 결리고, 뒷목은 수시로 당기지 아니하는 순간이 없도다. 한데도 이런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황태자는 대체 무엇인가. 국정에 매달려 본 적이 없기에 그 고단함을 모르는 것이겠지?”
“저기, 저는…….”
“쯧쯧. 아직도 짐의 뜻을 모르겠느냐?”
“아…… 알겠사옵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큼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는 뭐가 그리도 못마땅한지 여전히 까칠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행동은 달랐다. 이쪽이 다가서기가 무섭게, 몸을 돌리고 등을 내밀었다.
“어깨부터.”
주물러 달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황제의 어깨를 주물러 준 적은 한 번도 없었구나 싶었다. 아니,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어깨를 주물러드린 게 언제였더라.
‘내심 서운했던 건가.’
이쪽이 자신만 쏙 빼놓고서 귀족들에게 내손 약손을 써줬던 일 때문이었나 보다. 그래서 오늘 황제의 심기가 내내 불편했던 것이었나 보다.
‘참나. 솔직하지 못해서 문제라니까, 이 양반은.’
황제의 뭉친 어깨를 주물러 주고 있자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이 사람의 진짜 아들이 아닌데.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그 감정은, 죄책감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간신히 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황제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덕분에 곧, 황제에게서 만년필의 진정한 사용법을 들을 수 있었다.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