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41화 (241/468)

241화. 무시무시한 환자 (1)

“리한…… 군의관…….”

작은 속삭임. 그 사이에서 명멸하는 기억의 조각. 쟈빌론은 흐리멍덩해진 눈을 가늘게 뜨며 필사적으로 기억의 서랍을 뒤적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랍이 망가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다. 리한 군의관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째서? 방금, 저 노래를 들었기에.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기이하던 노랫가락. 어쩐지 흥겹게도 들리던 박자와 후렴. 그걸 들으면 편안했다. 아프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도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행복의 형태를 닮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평생 누리고 싶었다.

언제나 곁에 두고 싶었다.

절대로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그런데.

‘나는…….’

어째서 그를 잃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으며 애를 써도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다. 기억의 서랍이 망가져서 그렇다. 마치 머릿속 어느 부분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 구멍으로 중요한 기억들이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숨만 쉬어도 아팠다. 평생을 두통에 시달린 그였지만, 지금의 아픔은 예전보다 더했다. 차원이 달라졌다. 자비 없는 마법 실험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나쁜 사람들…….’

마법 실험실.

그곳을 떠올리자마자 쟈빌론은 건장한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다시는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받아야 했던 수많은 마법 실험도 끔찍했지만, 실험을 진행하는 내내 무표정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더욱 무서웠다.

‘나는…….’

그런 꼴을 겪고 싶지 않았는데. 딱히 크게 잘못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온종일 사람을 얼음 구덩이에 밀어 넣고.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굉음 속에 던져넣고. 갖가지 약을 억지로 먹이고. 어둠 속에 구겨 넣고. 그렇게 생각을 파먹고.

“……흐읍.”

숨이 막혔다.

아니, 호흡이 과도하게 빨라졌다.

한 번 들이마신 호흡을 도저히 뱉을 수가 없었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숨을 내쉴 수가 없다. 죽을 것 같다. 이대로 공기 속에서 질식할 것 같다. 살려줘. 살려줘. 누가 좀 살려줘!

“……그아아아악! 쿨룩! 콜록! 커흐, 쿨룩!”

간신히 비명처럼 내뱉은 숨결.

그 서슬에 골목 어귀를 어슬렁거리던 고양이 두어 마리가 놀라서 달아났다. 달아나는 뒷모습을 보자니, 잃어버린 기억 속의 어느 순간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달아나던 뒷모습.

날 버리고 뛰어가던 뒷모습.

누가?

리한 군의관이.

날 배신하고. 떠나고. 마지막에는…….

‘나와 맞서고.’

그랬다.

맞섰던 것 같다. 냉기 풀풀 나는 방패를 앞세우고 대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검은 머리칼 놈이 나타났지. 무감정한 눈빛으로 내 앞을 막아서고. 그래. 난 무감정한 눈빛이 싫어. 날 괴롭히고. 실험을 가하고. 차갑게 쳐다보고.

“…….”

죽이고 싶다.

보고 싶다.

그런데 내가 누굴 떠올리고 있었더라. 어쩌다가 내가 그 끔찍한 정신 실험실을 떠올리게 됐지.

그나저나 나는…… 누구지?

“쟈빌론.”

그래.

나는 앙부아즈의 위대한 반란자.

잠깐 제정신을 차린 쟈빌론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아주 잠깐 되찾은 이성의 틈새에서, 그는 자신이 어쩌다가 이름 모를 이곳 소도시의 골목까지 흘러왔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탈출했다.

끔찍했던 마법 실험실에서.

그 과정에서 거의 반쯤 죽을 뻔했지만, 끝끝내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물론 대가 또한 치러야 했다. 지독한 후유증을 앓게 됐다. 며칠에 겨우 한 번, 이렇듯 잠깐 이성을 찾는 시간 외에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채로 지내게 됐…….

“리한……이 누구였지……?”

그의 눈이 다시금 흐려졌다.

하지만 어느새 몸은 천천히 자리를 털며 일어나고 있었다. 흐려진 눈빛과는 달리, 나름의 명확한 목적을 지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리한…… 군의관…….”

그를 찾아야 한다.

내 것이니까.

내 것이어야 하니까.

영원히 곁에 잡아두고서 날 치료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황도…… 마젠타로…….”

그가 있다는 곳으로 가야지.

물론 황도 마젠타가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걷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할 테니까. 그때에는, 리한 군의관을 찾아내면,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놓치지 않아.’

저벅, 저벅…….

몰락한 반란자 쟈빌론의 걸음이 비틀비틀, 황도 마젠타를 향한 맹목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의사 선생님? 저는 전하께 진료를 받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습니다.”

“아, 그건 좀…….”

“예? 안 됩니까?”

“아니, 안 된다기보다는요.”

이곳은 이른 아침의 별궁 한의원.

그곳의 내과 진료실에서 의사, 발렌티노는 하루의 첫 환자를 맞이하며 난감한 웃음을 짓고야 말았다. 요즘 종종 이런 식이다.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황태자 전하께 진료를 받고 싶다며 애원하는 상황이 말이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적절한 치료가 필요한, 심각하거나 위중한 환자만 받고 계십니다. 그러니 일단 환자분의 증상부터 좀 살펴보는 게 우선일 것 같은데요.”

“아…… 하지만…….”

“혹시 진료를 받는 데에 곤란한 점이 있으실까요?”

“아뇨, 그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의사 선생님?”

“예?”

“제가 이틀이나 걸려서 황도까지 왔는데 말입니다.”

“예.”

“전하께 진료를 꼭 받고 싶어서 말이지요.”

“……아하하. 저도 진료를 잘 해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제 능력이 닿지 못하는 질환을 지니고 계신 거라면 당연히 전하께 보내드릴 거고요.”

“그, 그렇습니까?”

“예.”

발렌티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쓴웃음이 자꾸만 짙어졌다. 요즘, 계속 이런 식이라서 이젠 익숙해져 버렸다. 그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는 중년의 환자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지난 며칠 동안 수없이 말해서 이젠 입에 착 달라붙어 버린 멘트를 십분 활용하며.

“환자분께서는 여기에 와서 저와 이렇게 마주앉아 계시는 걸 오히려 행운으로 여기셔야 합니다.”

“예? 어째서 말입니까?”

“그만큼 덜 심각한 병을 지니셨다는 뜻일 테니까요.”

“아…….”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전하의 진료실에는 심각하고 위중한 질환을 지닌 분들만 선택을 받아서 들어가십니다. 그만큼 많이 아픈 분들이라는 뜻이지요.”

“그럼…….”

“예, 일단 여기서 진찰부터 해보고요. 우선은 전하를 뵐 일이 없기를 바라시는 게 맞겠지 싶습니다?”

“아, 예…….”

그제야 겨우 수긍하는 환자.

그 모습에 입맛이 살포시 씁쓸해졌다.

이게 다 황태자의 명성이 지나치게 드높아진 까닭이었다. 특히 최근에 시행하기 시작한 통증 클리닉이 결정적이었다. 온열과 냉기 찜질. 거기에 황태자의 손길이 가미된 내 손은 약손까지.

그 구수하고 신비한(?) 노랫가락을 들으면 아픈 환자들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싹 가시곤 했다. 원리는 황태자 외엔 아무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덕분에 황도는 물론이고 제국 영토 구석까지, 심지어 국경 너머까지 소문이 퍼지고 말았다. 황도 마젠타의 황태자가 손만 대면 죽어가던 사람마저 낫는다고. 사제가 아닌데도 연일 기적을 행한다고.

그런 까닭에 최근의 별궁 한의원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됐다.

물론 한의원에 고용된 의사들도 죽을(?) 맛이었다.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 와중에 황태자에게 진료받기를 애원하는 환자들을 설득하고 달래는 일마저 종일 치러야 했으니 오죽할까.

‘후우.’

발렌티노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또 몇 명의 환자를 어르고 달래며 설득해야 할까. 제발 오늘은 고집스러운 환자가 안 걸리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일반 의사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별궁 한의원의 부원장이 된 가르딘 경 또한 나름의 고민에 빠져들게 됐다.

“저기, 전하?”

“응?”

“조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 점심 먹는 중인데?”

“이럴 때가 아니면 말씀을 드릴 틈이 없어서 말입니다.”

가르딘 경은 식탁 건너편의 황태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었다. 요즘 환자가 하도 몰려드는 통에 다들 너무 바빠졌다. 황태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가 아니면 말을 걸기도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다행히 라키엘도 그런 가르딘 경의 심정을 헤아려주었다.

“뭐, 중요한 일이니까 경이 이러는 거겠지?”

“감사합니다, 전하.”

“난 아직 허락 안 했는데?”

“그래도 들어주실 거 같은데 말입니다.”

“알았어. 무슨 일인데.”

“전하, 요즘 환자가 너무 심각하게 몰려들어서 말입니다. 조금…… 환자를 가려서 받는 건 어떠실지요?”

“응. 안 돼.”

“……예?”

“내가 환자 가려 받으려고 한의원을 열었나? 가려서 받을 생각이었으면 진즉 진료비부터 왕창 매겼겠지.”

“하지만 전하.”

가르딘 경의 어조가 간곡해졌다.

“전하께서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환자 예약이 하도 밀린 나머지, 아예 황도 여관에 닷새가 넘도록 투숙을 하면서 대기하는 환자들마저 있다고? 나도 알고 있어.”

“그럼…… 대책이 따로 있으신 겁니까?”

“물론.”

라키엘은 샐러드를 와삭 씹으며 말했다.

“예약을 받을 때부터 환자의 위급한 정도에 따라서 순위를 매길 거야. 위급한 환자가 예약이 밀려서 기다리다가 잘못되면 곤란해지니까. 대신 규칙을 세워야겠지. 위급하지 않은데 엄살로 허위기재를 하고 빠른 순번을 받은 것이 적발될 때에는 별궁 한의원에서 진료받을 자격을 박탈한다거나 하는.”

“그냥…… 처음부터 환자를 가려서 받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응. 안 된다니까.”

“어째서입니까?”

가르딘 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태자가 어째서 이토록 진료에 집착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황태자의 지위라면 원하는 환자만 얼마든지 골라서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아무도 비난하지 못할 텐데.

‘그런데 어째서 굳이 험난한 일을 자처하시는 걸까.’

혹시 백성들을 조금이라도 더 보살피려는 마음 때문이신 걸까.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더욱 존경스러운 분인 것인지도.

……라고 가르딘 경이 멋대로 생각하는 사이,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당연히 보너스 수명 때문이지!’

환자를 골라서 받을 수는 있다. 솔직히 그래도 된다. 하지만 그렇게 걸러낸 환자 중에 정말로 위중한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환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건 싫었다.

게다가 문득, 한국에서 만났던 어떤 의사분도 떠올랐다. 우연히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된 암 전문의였다. 서울의 빅5 병원 중의 하나에 소속된 분이었다. 한 번은 그분에게서 인상 깊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다른 병원은 몰라도, 자기가 있는 병원에서는 다른 병원에서 이전해 오는 암 환자들을 절대로 가려 받거나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지. 환자를 거부하면 안 된다고. 자기가 있는 병원은 전국에서 갖가지 암 치료를 다 해보다가, 마지막으로 지푸라기 잡듯이 찾아오는 최후의 장소라고. 그런데 거부를 하면 그 환자들은 아무 곳에도 의지할 수 없게 된다고.’

그 이야기를 하던 때의 그 의사분이 정말로 멋져 보였다. 배우고 싶은 태도였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소문을 듣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사람들이야. 그런데 그걸 걸러서 받는 게 말이 될까. 안 돼. 설령 내가 더 바빠지는 한이 있어도 말이야.”

“그렇습니까…….”

“어.”

……물론 실제로 더 바빠지는 건 내가 아니라 한의원에 소속된 다른 의사들이겠지만.

라키엘은 애써 뒷말에 담긴 진실(?)을 삼켰다. 그러라고 고용을 한 거다. 각종 보너스와 복리후생을 빵빵하게 챙겨주는 거다.

‘받은 만큼 일을 해야지!’

……라는 철저한 기업가 마인드!

물론 그런 라키엘의 속내를 모르는 가르딘 경은 다시금 감동의 물결에 젖어 버렸다. 밀려드는 환자의 물결에 지쳐가던 의욕의 불길을 다시금 활활 태웠다. 오후 진료를 더욱 열심히 하리라 새삼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가르딘 경의 그러한 다짐은 오후 첫 환자를 만나는 순간 무참하게 박살이 나고야 말았다.

“뭐냐, 너 같은 나부랭이는.”

“…….”

뭘까, 이 환자는.

어째서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저따위 말을 꺼내는 걸까. 대관절 어찌하여 저런 오만한 눈으로 벌레 보듯이 날 쳐다보는 걸까.

게다가…….

“허허. 젊은 환자분께서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위중한 환자만 만나고 계시니, 일단은 이곳에서 진찰부터…….”

“위대한 이 몸께서는 이름도 모를 너 따위에게 진료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 당장 황태자를 불러와.”

“……예?”

“못 들었나? 황태자를 불러오라고.”

“저기, 환자분?”

가르딘 경은 정말로 힘껏 애써서 미소를 유지했다.

“환자분께서는 여기가 어디인지, 전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고 있나 본데 말입니다…….”

“잘 알고 있다. 황족이 머무는 별궁이며, 그 황족의 일원이자 제국 황가의 후계자가 될 황태자가 이곳 병원을 이끌고 있지. 그래서 이 위대한 몸께서는 황태자에게 직접 진료를 받으러 친히 이곳까지 온 것이다만.”

“…….”

이 x끼, 미친놈인가.

가르딘 경은 증발하려는 어처구니를 겨우 붙잡았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길로 눈앞의 진상 싸가지 환자를 쳐다보았다.

젊었다. 딱 보기에도 절대로 20대 중반은 넘지 않을 듯했다. 옷차림은 제법 화려했다. 그렇지만 그 외에 그 어떤 드높은 신분의 냄새나 건덕지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아무리 신분이 높아 봤자, 황태자보다 높을 수는 없을 텐데.

‘이 사람 대체 뭐지?’

진짜로 미친 걸까. 심각한 광증 때문에 한의원을 찾아온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잠깐 찾아왔던 분노가 사그러들었다. 대신 안타까운 심정이 장착되었다.

“후우, 환자분? 정신적인 고통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희망을 잃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 저와 차근차근 상담부터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뭐?”

“괜찮습니다. 불안해하지 마시고요.”

“네놈, 미쳤나?”

“예?”

“내가 정신병을 앓는 걸로 보여?”

“아, 딱히 그렇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병의 진료는 상태를 진단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니, 조금은 마음을 진정시키시고…….”

“이 위대한 드래곤, 등갑룡 포르티스께서 한낱 정신병 따위를 앓는 것 같다고?”

“예에?”

“죽고 싶나?”

“…….”

진짜로 답답해서 죽고 싶다.

뭐 이런 미친 x끼가 온 거지.

가르딘 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그는 까맣게 몰랐다.

눈앞의 진상 싸가지 환자의 자기소개(?)가 진심이고 실화이며 지극히 솔직담백한 트루라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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