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본체 현신 (2)
“아난샤. 당신은 정말 그걸 바라는 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마젠타노 황실은 강하오.”
“알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여 우리의 세가 한 줌도 되지 않음 또한?”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끝내 뜻을 관철하겠다는 것이오?”
“물론.”
아난샤라 불린 젊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묵직하고도 진중한 동작으로. 자신을 향해 모인 5인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었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웃기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이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는 상황이 말입니다.”
사내, 아난샤가 잔을 들었다. 잔에 담긴 맑고 향긋한 차가 한낮의 햇살을 일렁이며 반사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사이로 어린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흘러왔다.
소도시의 아름다운 정오.
봄날의 잔디밭과 피크닉 바구니.
조금 까슬거리지만 푹신한 돗자리.
거기에 삶은 달걀과 빵, 따스한 차가 곁들여진 회합을 나누는 여섯 명의 흑마법사라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어쩔 수 없소.”
“알고 있습니다.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이게 최선이라는 것쯤은 말입니다.”
사실이다.
흑마법사라고 하여 자정의 음침한 지하실에 검은 후드를 눌러쓰고서 모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 식의 티 나는 회합은 주의의 눈길을 끌기 십상이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한낮에 모인 한량들의 야유회로 보이는 게 낫다.
“그걸 다 알고 있을 텐데, 뭐가 웃긴다는 거요.”
“우리가 모여 있는 이 상황 자체가 말입니다.”
아난샤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쓰리게 변하였다. 그가 차를 홀짝이고는 말했다.
“300년입니다.”
“…….”
“익히 알고 계시겠지요? 300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론이오. 그걸 모를 수는 없겠지. 우리 중의 어느 누구라도.”
“예. 마젠타노의 대토벌이 있었지요. 당시 열두 지파 중에 다섯의 맥이 끊겼고, 남은 일곱은 간신히 지하에 숨어 명맥을 남겨 우리에게 이어졌고 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그중에 또 하나의 맥이 이번에 끊겼습니다. 다들 크라노스에서 전해진 소식을 들으셨겠지요?”
“황태자에게 토벌당한 강령술의 카르투 말이오?”
“예.”
“그래서, 정말로 마젠타노에 맞서겠다는 거요?”
“예.”
아난샤가 담백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 번 일어난 사건은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두 번은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
“왕국 시절에 한 번, 제국에 이르러 두 번째입니다. 마젠타노에게 두 번이나 토벌을 당했으면 이제는 우리도 슬슬 감을 잡아야겠지요. 우리와 마젠타노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지낼 수 없는 관계라는 걸 말입니다. 아니, 이 경우엔 다들 알고는 있었음에도 애써 무시해 왔던 진실이라 말해야 더 정확하겠군요.”
“하지만 아난샤. 아까도 말했지만 마젠타노는 강성하오.”
“압니다.”
“…….”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이도 아닌 황실이 직접 나선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황족의 중심이자 미래인 황태자가 친히 나서서 카르투를 토벌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과연, 다음 차례의 토벌이 없으리란 보장이 있을까요?”
“그건…….”
“당장 다음 차례의 목표가 당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즈단.”
“…….”
하즈단이라 불린 흑마법사가 입을 다물었다. 아난샤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압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카르투, 그 작자는 홀로 지냈으니 당한 것이라 말하고 싶겠지요. 사실이긴 합니다. 그의 지파는 대대로 우리와 담을 쌓고서 지냈으니까. 그의 스승도, 스승의 스승 또한.”
“맞소. 아난샤. 반면에 우리는…….”
“예. 오늘처럼 아주 가끔 교류를 나누긴 하지요. 그렇다고 뭐 카르투와 다를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뜻에 동참하라는 것이오? 정녕, 마젠타노를 함께 치자고?”
“예.”
“…….”
“두려우십니까?”
아무도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나 두려운 거다. 부담스럽겠지. 아난샤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제안을 하나 하지요.”
“제안……?”
“예. 제가 먼저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무슨 시범을 말이오?”
“먼저 마젠타노의 중심부를 치겠습니다.”
“설마.”
“예. 황도부터 시작해 볼까 합니다.”
“…….”
“만약 제가 거사에 성공하면, 그 후에도 살아남아 우리의 힘을 증명한다면, 그때에는 다들 제 뜻에 동참하시리라 믿겠습니다.”
“알겠소.”
5인의 흑마법사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난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 평화로운 어느 소도시의 잔디밭. 이곳에서, 라키엘이 행한 크라노스에서의 토벌에 의하여, 원작 마검황에선 발생한 적이 없었던 작은 눈덩이가 구르기 시작하였다.
♣
쑥쓰럽다.
민망하다.
차라리 미친놈처럼 눈밭에서 알몸으로 데굴데굴 구르는 게 낫겠다.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드래곤, 등갑룡 포르티스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작고 은밀한 자괴감에 휩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왕 모습을 드러낸 거, 위엄이 넘치는 상황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했다.
드래곤으로서의 자부심. 자신의 어마어마한 본체가 뿜어내는 위용!
그 앞에 두려워하는 미물들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짜릿했다. 해도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3,600년이 넘는 기나긴 용생 내내 그러하였다.
한데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신의 강림이라며 엎드리고 경배하는 초창기 농경 시대의 부족도, 난폭한 용에 맞서 고향을 지키겠노라 버둥거리는 고대의 전사도, 긴장된 몸짓으로 진형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군대의 모습도, 굴욕감을 참으며 보물을 바치는 드워프 왕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사방에서 들려오는 쑥덕거림이라고는…….
‘봐봐, 저게 드래곤이래.’
‘우와, 크구만.’
‘그런데 날개는 왜 없지?’
‘대신 등껍질이 있는데? 거북이인가?’
‘거북이는 개뿔. 드래곤이라잖아.’
‘아니 그런데 왜 날개 대신 등딱지가 있냐고. 아 게딱지에 보리밥 비벼 먹고 싶네.’
“…….”
다 밟아 죽이고 싶다.
포르티스는 다시금 한숨을 집어삼켰다.
드넓은 별궁 정원에서 본체의 모습으로 현신한 자신. 그런 자신을 구경하는 별궁의 시종, 시녀와 근위대원들. 저들의 이쪽을 향한 시선에는 놀람은 있을지언정, 공포와 경외의 감정은 별로 엿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 저놈이 미리 뿌린 공문 때문이겠지.’
포르티스는 자신의 앞쪽에서 알짱거리고 있는 자그마한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은발의 왜소한청년. 제국의 황태자 라키엘.
저 인간이 공문을 사방팔방 뿌려댄 까닭이다. 모월 모일 정오, 별궁 정원에서 드래곤이 본체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니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놀라지도 말고,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하던 그 공문 말이다.
“…….”
쯧.
그 공문 내용 때문에 김이 빠져 버렸다. 대저 인간이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뭔가를 확 접해야 놀라고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들인데. 한데 이쪽의 존재를 미리 다 알아 버렸으니, 공포보다는 호기심과 흥미를 더 내보이고 있는 것이겠지.
‘그게 황태자 저놈이 바란 상황일 테지만.’
본체 현신에 따른 소란을 최소화하는 것. 아마 그게 황태자가 바란 바겠지. 그래도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굴욕적이었다. 마치 구경거리가 된 듯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저기, 포르티스 님? 죄송한데 진맥하는 동안에는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계속 이렇게 가만히만 있어야 하나?”
“예.”
“어째서?”
“저 아직 깔려 죽기 싫어서요.”
“……알았다.”
하여간 작고 나약한 인간이란.
포르티스는 라키엘의 진심이 서린 엄살(?)에 혀를 차고 말았다. 하지만 라키엘의 당부를 지켜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덕분에 라키엘의 드래곤 진맥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후아. 덩치가 커서 그런가. 이거, 진맥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라키엘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드래곤이 클 거라고 상상은 했다. 예상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동물원의 코끼리? 영화에 나오는 공룡? 그것들 ‘따위’는 눈앞의 드래곤에 비하면 벼룩 수준일 것 같았다.
‘이건 그냥…… 생물체라기보다는 동네 뒷산 같은 느낌인데.’
실제로 그랬다.
진맥에 소요되는 시간 또한 그러했다.
딩동! 딩동동!
귓가에 계속해서 울리는 안내음.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모두 난리가 나고 있었다.
[진맥을 시행하는 중입니다.]
[스캔 중.]
[3……2…… 1…… 1의 반…… 1의 반의 반……반의 반의 반…….]
“…….”
느렸다.
느려도 너무 느렸다.
아마도 진맥 대상이 너무 크고 범위가 광활한 탓인 것 같았다. 덕분에 라키엘은 어린 시절 동네 학원 386 컴퓨터 A: 드라이브에 디스켓을 꽂아 넣고 게임 파일을 압축하던 시절 기다림의 미학과 향수(?)를 오랜만에 만끽해야 했다.
다행히 인내의 시간은 심하게까지 길진 않았다.
딩동!
마침내 결과가 나왔다.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등갑룡 포르티스]
[종족 : 드래곤]
[성별 : 남자]
[연령 : 3,610세]
[체장 : 122 m]
[체중 : 6,513 t]
[혈액형 : Dk- Ⅲ]
[종합 소견 : 모든 부분에서 이상적이며 완벽에 가까운 신체입니다. 다만, 전형적인 충수염(appendicitis) 증상이 감지됩니다. 충수돌기 개구부가 확연히 폐쇄되었으며, 점막 하 림프소포(lymphoid follicle)가 과증식을 반복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가급적 수술을 통한 신속한 절제로 증상의 진행을 막는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
역시나 충수염이 맞구나.
다행히 다른 합병증이나 주의할 질환은 없었다. 드래곤의 장기와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오장육부의 보고 또한 그러하였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초월적 대상과 만나며 현타를 느끼고 있습니다.]
[심장 : 와…… 씨…….]
[허파 : 허…… 파하…….]
[대장 : 살면서 본 제일 거대한 똥덩어리였지 말입니다…….]
[간장 : 나도…….]
[위장 : 그렇게 큰 융털돌기도 처음 봤음…….]
[콩팥 : 크고…… 아름다웠어…….]
[비장 : 막창자 꼬리도 탱탱하더만…… 후우.]
“…….”
아니, 진단을 하라고 미친놈들아.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어쨌건 진맥은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그는 개운해진 얼굴로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다 됐습니다, 포르티스 님.”
“진맥이 끝난 건가? 벌써?”
“예.”
“그럼 이제 뭘 하면 되지?”
“조심스럽게 뒤로 돌아 주시면 될 거 같은데요.”
“뒤로? 돌아? 왜?”
“사이즈를 측정해야 하니까요.”
“사이즈? 무엇의?”
“대장내시경이 들어갈 입구(?)의 사이즈요.”
“…….”
“그걸 대강이라도 알아야 포르티스 님을 위한 전용 대장내시경을 제작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
“괜찮습니다. 아무 일 없을 거니 너무 걱정은 마시고요.”
“…….”
아니, 전혀 안 괜찮을 거 같은데.
확 그냥 다 죽여 버릴까.
아니면 이대로 도망칠까.
‘내 위엄은…… 어디로?’
포르티스는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아냈다.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며 증발하는 자존감. 3,600년 용생을 통틀어 처음 느껴보는 굴욕감과 수치심을 만끽하며 그는 문득 생각했다.
세상에서 병원이 제일 싫다고.
그리고 다음 날.
라키엘이 고안하고 설계한 드래곤 전용 대장내시경의 제작 발주를 받은 황실의 드워프 장인들이 눈물을 좍좍 흘리며 환호하였다.
드래곤에게 핍박받았던 먼 고대의 조상님들. 드래곤을 원수로 여겼으나 힘이 부족하여 설욕하지 못하였던 조상님들.
저희 후손이 드디어 해냈습니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