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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253화 (253/468)

253화. 뱀파이어 변이증 (1)

“아욱!”

이곳은 황도 마젠타의 광장. 저녁노을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시간. 한적한 광장 한쪽 구석에서 엄살 섞인 앳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별궁 한의원의 의사, 발렌티노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어린아이가 입가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 앞에선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싱글벙글이었다.

“욘석아, 엄살은. 자, 여깄다. 시원하게 쑥 빠졌지?”

“우으…… 엄마?”

“응?”

“그거 송곳니 아닌 거 같은데.”

“으응?”

“송곳니 말고 옆에꺼 뽑은 거 같은데.”

“…….”

잠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엄마가 실을 잘못 끼웠니 어쩌니. 에그머니 내 정신 좀 어쩌고 저쩌고.

그 모습에 발렌티노는 싱긋 웃고 말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어제 저녁이었던가. 길었던 하루의 진료를 모두 마치고 쉬려는데 황태자가 자신을 불러서 말하기를…….

“무슨 생각해?”

“……어?”

생각에 젖어 있던 발렌티노는 흠칫 놀랐다. 그는 자신을 째릿 쳐다보는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함께 미래를 약속한 약혼녀의 샐쭉한 눈빛이었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방긋방긋 웃어?”

“아, 그게…….”

발렌티노는 멋쩍은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어제 전하께서 나와 상의하신 일이 있어서.”

“또 한의원 이야기?”

“어, 응. 미안. 모처럼 오랜만에 만났는데 혼자 딴생각만 하고.”

“괜찮아. 원래 그랬잖아. 말해봐요. 무슨 일이었는데?”

“그게, 전하께서 치과를 개설하고 싶다 하시더라고.”

“치과?”

“으음. 치아와 잇몸 같이 입속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과라고 해야 하나.”

“썩은 이를 막 뽑아내고 그러는?”

“응.”

“혹시 그걸 당신한테 맡겨보시려는 걸까?”

“정확해.”

발렌티노는 다시금 빙긋.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내가 원래 의료대학 시절부터 환자들의 치아 상태나 관리에 관심이 좀 있었잖아. 아마 전하께서도 그걸 눈여겨보셨던 듯해.”

“그럼…… 설마, 맡을 거야?”

“왜? 싫어?”

“고문 기술자 같아서.”

“응?”

발렌티노는 깜짝 놀랐다.

약혼녀가 난감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당신, 이는 잘 뽑아줄 거 같긴 해.”

“그, 그런가.”

“응. 확실히.”

약혼녀의 말에 발렌티노도 웃고 말았다.

“뽑을 때는 뽑아야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라.”

“그럼?”

“제일 좋은 건 애초에 뽑을 일이 생기지 않게 관리를 하는 거지. 치석이 쌓이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섬세하게 긁어낸다든가. 혹은 충치가 생기는 초기에 그 부분만 갈아서 제거를 하고 그 위에 뭔가 단단한 물질을 씌워서 이후의 오염을 방지한다든가.”

“하지만 당신, 의료대학에서 그런 이론을 주장했다가 비웃음만 받았었잖아?”

“맞아. 그런데 전하께서는 내 생각을 알아 주시는 것 같아.”

“정말로?”

“응.”

사실이었다.

지난 저녁, 황태자가 자신을 부른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노라 했다. 의료대학 시절에 제출했던 논문을 봤다면서. 치아 관리에 관한 그 논문의 내용이 인상적이었다면서. 그러니 별궁에 치과를 개설하면, 그곳의 과장이 되어 주지 않겠느냐 의견을 물었더랬다.

하여 자신은…….

“생각 좀 해보겠다고 했어. 그래서 오늘 하루 휴가를 요청한 거고.”

“그랬구나.”

“응, 미안.”

“왜?”

“내 고민만 잔뜩 늘어놓은 거 같아서?”

“무슨 소리야. 당신 고민이 내 고민인데. 안 그래요? 발렌티노 예비 치과장님?”

“치과장……이라…….”

발렌티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오래전에 잠시 꾸었다가 포기했던 꿈이 문득 떠올랐다. 사람의 치아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분야를 개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의료대학 교수 중에 치아 관리라는 분야에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었다.

하여 포기해야 했다. 좋은 성적과 졸업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꿈을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그러다가 황태자와 엮이고, 어찌어찌 별궁 한의원에 취직하게 되었던가.

‘그리고 황태자 전하에게…… 엄청나게 혼이 나고…….’

한 번은 자신을 찾아왔던 치매 할머니와 그 아들 환자를 냉랭하게 대하다가 황태자에게 딱 걸린 적이 있었다. 당시 얼마나 식겁했던지. 그리고 얼마나 반성하였던지.

그 후로 나름 열심히 지냈다.

환자를 성심껏 대하려 노력했다.

물론 그럼에도 오랜 꿈을 실현할 거라는 기대를 품은 적은 없었다.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치아 관리였으니까. 비현실적인 꿈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게 달라졌다.

지난 저녁 황태자에게 받은 제안 덕분이었다.

‘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솔직히 막상 해보려니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길이 있지 않을까.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약혼녀를 집에 바래다준 이후에도 계속 그러했다.

‘후우. 조금 더 걸을까.’

괜히 들뜨는 기분. 뭔가 싱숭생숭한 느낌. 밤공기마저 훈훈하여 썩 나쁘지 않았다.

하여 발렌티노는 황도의 저녁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어제 받은 제안과 자신의 오랜 꿈, 앞으로의 계획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다져보았다.

한데 그렇듯 너무 생각에 몰두하며 걸은 탓일까.

터억!

그는 앞에서 걸어오던 사람을 미처 보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어깨빵(?)을 놓게 되었다.

“어엇? 죄송합니다.”

황급히 사과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부딪친 사람이 이쪽을 보며 소리 없이 웃는데…… 소름이 돋았다.

왜일까. 알 수 없었다. 어째서 눈이 마주치자 다리가 풀리는 건지. 기분이 멍해져서 저 사람을 따라 걸어가는 건지. 아무도 없을 골목으로 걷게 되는 건지. 나도 모르게 셔츠 목덜미 깃을 풀어놓게 되는 건지.

그리고 어째서…….

“싱싱한 놈이로군. 내 주군의 권속이 되기에 충분함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라.”

저렇게 말하는 상대의 송곳니가 유독 길고 날카롭게 번득이는 건지.

‘왜?’

알 수 없다고 멍하니 생각하는 순간. 상대가 입을 벌리고 다가왔다. 나, 설마 깨물리는 걸까. 저릿하고 뜨거운 통증. 섬뜩한 소리가 목덜미에서 울렸다.

……콰즉!

섬뜩한 소리가 방패에서 울렸다. 저릿하고 뻑뻑한 통증. 나, 설마 얻어맞은 걸까. 황제가 검을 옆으로 돌리며 다가왔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

“방어를 잊은 것이더냐.”

황제의 준엄한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콕 쑤셔왔다.

“……!”

반사적으로 방패를 고쳐 들었다.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뿌려오는 황제.

콰작!

‘거억.’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방패를 지탱하는 팔뚝이 다시금 찌르르 울렸다. 이거, 혹시 팔뚝이 부러진 건 아닐까. 최소한 손목은 나간 거 같은데.

‘만년설만 쓰다가…… 오랜만에 그냥 방패를 써서 이런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이런 빡쎈 방어는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쪽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드래곤을 입원시킨 것도, 드래곤의 치료에 황실 대장간 백년장의 도움을 받은 것도, 짐은 모두 묵인하였도다. 수많은 대신들이 너의 안전과 황도의 안위를 염려하는 뜻을 내비쳤지만, 그 또한 모두 묵살하였도다.”

담담한 말투.

그렇지 못한 검격.

쿼즉!

“……긋!”

다시금 방패를 타고서 팔뚝을 후려쳐 오는 충격. 그 사이로 계속 들려오는 황제의 질책. 아니, 대련을 빙자한 갈굼.

“짐이 왜 그러하였겠느냐. 너는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

“그, 그건…….”

쿠작!

“……겍!”

“고작 이 정도에 호흡이 끊기어 변명조차 끝맺음을 못 할 정도였더냐?”

“그건 아니옵고……!”

“아니면, 짐의 검격이 지나치게 무겁더냐?”

“아, 아마도…….”

“너의 어깨에 짊어지워진 책임은 더욱 무겁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느냐?”

“…….”

와 씨.

진짜 할 말 없게 만드네.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 황제가 이렇듯 대련을 빙자하며 일방적 구타를 선물(?)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짐은 네가 정말로 잘못된 줄로만 알았도다. 한밤에 별궁이 있는 방향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던 때에는 말이다.”

“…….”

“그것뿐이었을까. 폭음에 뒤이어 거대한 버섯구름도 치솟았지. 심지어 지축까지 흔들렸도다. 오죽하면 짐의 침실 샹들리에마저 난데없이 몸을 떨어대었을까.”

“저기, 그것은…….”

“영락없는 대참사로 느껴지더구나. 심장이 떨어질 듯 날뛰고, 식은땀이 샘솟듯이 나고, 손아귀가 떨릴 정도로 두려웠도다, 짐은, 너를 잃어버린 것인가 하여.”

콰앙-!

“……걱!”

저기, 계속 이러다간 지금 저를 잃으실 것 같은데요.

라키엘은 진심으로 외치고 싶었다. 한 번만 더 방금 같은 검격을 막다간 자신의 팔뚝, 혹은 손목 연골 어딘가쯤이 저세상으로 사출될 것 같다고.

하지만 차마 대꾸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보는 황제의 눈빛 때문이었다.

“다시는, 그런 걱정을 시키지 말거라. 알겠느냐.”

“…….”

“대답. 안 하겠느냐.”

“저는…….”

“그런 대답 말고.”

황제가 검을 비스듬히 세워 자세를 잡았다. 날카로워진 그의 눈빛이 이쪽의 오른손을 향하였다. 정확히는 오른손에 쥔 검을 향한 것이겠지.

“그것으로 대답하거라.”

“괘, 괜찮으시겠사옵니까?”

“물론.”

대답을 듣자마자 움직였다. 검을 재빠르게 당겨 잡았다. 찌르기와 내리치기의 중간 궤도로 비스듬히 찍듯이 베었다. 누군가에게 배운 동작은 아니었다. 다만…….

‘복수다아!’

지금까지 두드려 맞은 울분(?)을 가득 담았다. 물론 검술에 숙련된 황제는 그걸 너무나 쉽게 막아냈다.

카캉-!

거대한 벽을 후려친 기분이었다. 검신을 타고 온 반탄력 때문에 순간 검을 놓칠 뻔했다. 동시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쪽을 향해 아주 잠깐 내비친, 황제의 희미한 미소를. 그 속에 담긴 거대한 기쁨과 흐뭇함을.

“…….”

아마 방금 일격을 통해, 내가 크라노스에서 얻은 마나하트를 느낀 거겠지. 그간 더욱 강력해진 마나써클의 존재 또한 느꼈겠지. 그렇기에 저토록 기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의 진짜 아들이 아닌데.’

이렇게 함부로 기쁨을 안겨 주어도 되는 것일까. 이것조차 기만이 아닐까. 일순간이었지만 양심이라는 이름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양심의 고통보다는 당장의 갈굼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였으니까.

하여 다소 뻔뻔하게 물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겠사옵니까?”

“한없이 부족하구나. 더욱 갈고 닦거라.”

“……예.”

“방패는 제법 다룬다만, 검격이 겨우 그따위여서야…….”

“…….”

“숙제라도 내어주어야 하겠느냐?”

“아니옵니다!”

당연히 절대 거절이다.

당장 별궁 한의원을 운영하는 것만도 바쁘니까. 모처럼 얻은 드래곤 맹장의 약성을 누그러뜨릴 방법을 궁리하는 것도 벅차니까.

‘게다가 유일하게 알아낸 그 방법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고위급 뱀파이어 송곳니를 얻어야 하는 거잖아?’

솔직히 막막했다. 그런데 거기에 검술 훈련 숙제라니.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다행히(?) 황제도 반쯤은 빈말이었는지, 정말로 숙제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더욱 다행스럽게도 대련을 빙자한 갈굼 또한 거기까지였다.

“하오면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사옵니다.”

“아니 물러가도 될 터인데.”

“공사가 다망하신 폐하의 시간을 더는 빼앗을 수 없사옵니다.”

“짐은 오늘 별로 바쁘지 않다만.”

“공사가 다망한 저의 시간을 더는 빼앗으실 순 없사옵니다.”

“…….”

“소, 송구하옵니다.”

“쯧. 되었다. 물러가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렇게 간신히 탈압박(?)에 성공했다. 도망치듯 황궁을 나섰다. 별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마차 안에서 고민에 휩싸였다.

‘그나저나, 고위급 뱀파이어 송곳니를 어디서 구하지?’

문득, 최근 드래곤 포르티스에게 들은 조언이 떠올랐다. 고위급 뱀파이어의 송곳니에는 자체 필터링, 독성 중화 기능이 있다고 하였다. 덕분에 드래곤 맹장의 지나치게 강한 약성을 중화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뱀파이어의 송곳니는커녕, 뱀파이어와 만나기도 쉽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만나는 건 고사하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거나 어깨빵 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거야. 그만큼 신비에 휩싸인 종족이니까. 소설 마검황에서조차 제대로 등장한 적이 없으니, 말 다 했지.’

난감했다.

이곳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가장 큰 무기가 소설 마검황을 읽었기에 지닌 ‘정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과제는 참으로 난해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발렌티노가 내 제의를 잘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별궁 한의원에 치과를 개설해보자고. 잘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제의했다. 혹시나 치과가 흥하게 되면 치아 관리를 위해 뱀파이어가 알아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은 발렌티노에게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그런데 마침…….

“음?”

별궁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리는데 낯익은 이가 건너편에 보였다. 별궁 한의원 로비로 휘적휘적 들어가고 있는 하얀 가운의 뒷모습.

“발렌티노?”

마침 잘 만났다. 불렀다.

이쪽의 부름을 들은 걸까.

발렌티노가 멈칫했다.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그 안색이 조금…… 이상했다. 창백했다. 눈가엔 팬더와 의형제 먹을 수준의 다크써클이 가득했다. 몸살일까. 혹은 독감이라도 걸린 건가.

‘뭐지?’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하루 이틀 사이에 확 수척해진 발렌티노의 모습을 보자마자, 오랜 시간 한의사로서 쌓아온 촉이 묘하게 꿈틀거렸다. 그 즉시 경혈 스캐닝을 발동해서 발렌티노를 관찰했다.

그런데 스캐닝 결과가…… 심히 엄청났다.

맹세코 처음 보는 증상이었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안구를 이태리타월로 박박 닦아보고 싶어지는 느낌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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