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흉수 족집게 (2)
나의 아들아.
너는 과연, 내가 알던 그 아이가 맞는 것이더냐.
“…….”
황제, 아스테리온은 복잡해진 눈길을 보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라키엘이 있었다. 황태자. 자신의 후계자. 장차 제국의 모든 것을 두 어깨에 짊어질 아들.
그런데 문득 낯설었다.
어째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주 가끔씩,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종종, 정체불명의 이질적인 느낌이 들고는 했다. 눈앞의 아이가 어쩌면, 자신이 아는 존재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기이한 감각, 혹은 예감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심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지금처럼.
‘내가 또 무슨 생각을.’
황제는 자신을 사로잡으려 했던 기이한 생각을 얼른 털어내었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길로 자신의 아들, 라키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면, 네 추론에 따르자면 이번 뱀파이어 변이증 확산의 배후가 인간 흑마법사일 것이고, 그자의 목적이 사회적 공헌을 세우는 것이었을 터다, 이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추측일지언정 참으로 뻔뻔한 의도로다. 하면, 그를 통해 흑마법사가 얻을 이득이 있는가?”
“당연히 있사옵니다, 폐하.”
“말해 보라.”
황제는 새삼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감탄을 애써 숨겼다. 감탄의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황태자가 말하는 추론이, 최근에 자신이 따로 받았던 보고의 내용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정보부는…… 저 추측을 하기 위해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정보를 취합하고, 회의를 거듭하여야 했는데…….’
그런데 눈앞의 아들은?
혼자서 저걸 추론하여 말하고 있다.
대체 어떻게?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추론 이후가 궁금해졌다. 과연 자신의 아들은 황실의 정보부와 똑같은 결론을 내릴 것인가. 황제는 궁금해하며, 한편으로는 기대하며 라키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감히 말씀을 드리옵자면, 흑마법사는 이번 일을 통하여 사회의 양지로 나오는 것을 원하는 듯하옵니다.”
“사회의 양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조금 더 자세히.”
……정말로 비슷하다. 정보부가 내린 결론과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황제는 굳은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물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보다 자세히 아뢰옵자면, 현재 모든 종류의 흑마법은 제국 황실의 법으로 금지가 되어 있사옵니다.”
“그렇지.”
“하여 흑마법은 어떤 경우에든 사용은 물론이고, 전수하는 것조차 금지가 되어 있는 실정이옵니다.”
“물론이다. 그런데?”
“아마도 흑마법사는 그러한 황실의 법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 같사옵니다.”
“……설마, 사회적 공훈을 세우고 인정을 받음으로써?”
“예, 폐하.”
라키엘은 자신의 추론을 이어갔다.
“누구에게나 박수를 받을 공훈을 세우고, 사회적 인정을 받고, 그를 통해 흑마법이 금지될 만큼 해롭지 않다는 인식을 만인에게 주어 활동의 자유를 얻으려는 것이 그의 목적일 것이옵니다.”
딱 그거였다.
생각해 보니 간단했다.
실제로 마젠타노 황가는 흑마법을 금지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금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박해를 하고 있었다. 대대로 흑마법과 악연이 제법 많았다나. 어쨌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흑마법사의 입장을 헤아려보자면…… 크게 두 가지 정도를 가장 많이 바라겠지. 자신의 활동을 제약하는 제국 황실을 뒤엎거나, 혹은 제국 황실에게 인정받아서 활동의 자유를 얻거나.’
예를 들자면?
앞서 크라노스에서 토벌된 좀비술사, 카르투가 전자의 케이스일 터였다. 실제로 그는 제국 황실의 전복을 꿈꾸며 좀비 군단을 양성했으니까.
반면, 이번에 출몰하여 뱀파이어를 조종하는 흑마법사는?
‘그놈이 황실의 전복을 꿈꾸었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했겠지. 애매하게 황도의 시민들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황가의 핵심인사나 황족들에게 수를 썼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애꿎은 시민들에게만 뱀파이어 변이증을 퍼뜨렸다. 덕분에 조금만 생각을 해보니 그 의도가 빤히 보였다.
“아마도 그는 뱀파이어 변이증을 간단하게 치료할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옵니다.”
“하면, 수하들을 시켜 퍼뜨린 변이증을, 자신과 관계가 없는 척하며 치료함으로써 사회적 공훈을 세우려 한 것이다?”
“바로 그러하옵니다, 폐하.”
“…….”
황제는 침묵했다.
똑같다.
바로 오늘 아침, 황실의 정보부로부터 받은 보고의 내용을 황태자가 거의 똑같이 말하고 있다.
‘너는 대체…….’
황제는 애써 감탄을 삼켰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을 내리는 심정으로 말했다.
“좋구나. 너의 의견은 잘 들었도다. 한데 그럼에도 여전히, 짐은 한 가지 의문이 가시지 않음을 느낀다.”
“어떤 의문이시옵니까?”
“너는 이번 일의 흉수가 인간 흑마법사일 것이라 추측하였는데, 짐은 그 점이 참으로 이해가 아니 된다. 통상적으로 뱀파이어를 부리는 존재라면, 더 상위의 뱀파이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터인데 말이다.”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한데 네가 인간 흑마법사를 따로 지목한 근거가 있느냐?”
“물론이옵니다, 폐하.”
“고하라.”
황제가 명하였다.
라키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을 추측한 근거는 간단하였사옵니다. 제가 포획한 뱀파이어들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옵니다.”
“증언이라.”
“그들에게 정신적인 금제가 걸려 있기에 직접적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변칙적인 질문을 통하여 다수의 간접적인 증언을 얻게 되었사옵니다.”
“간접적인 증언?”
“그렇사옵니다, 폐하.”
“예를 들자면?”
황제가 물었다.
라키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뱀파이어들을 지휘하던 흉수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마늘 바게트라 하였사옵니다.”
“……뭐?”
“그는 흰색을 좋아하옵니다.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사옵니다. 목젖이 예민한 편이라 양치질을 하다가 가끔씩 헛구역질을 살짝 하옵니다. 암기력이 뛰어나 마법 술식을 빠르게 익히는 편이며, 좋아하는 이성 취향은 책을 많이 읽는 여자라고 하였사옵니다. 특히 환상 문학에 관심이 많은 이성이요.”
“…….”
“마차 운전 성향은 의외로 매우 얌전한 할배운전 스타일이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성실한 타입이라 하였사옵니다. 스트레스가 쌓인 날에는 자면서 살짝 이를 가는 습관이 있고, 일광욕과 차가운 커피로 아침을 시작하는 것을 즐긴다고도 하였사옵니다. 한겨울에도 이건 똑같다고 하니 아마도 얼죽아…… 아니아니, 어쨌건 또한, 때때로 장이 민감해져서 고단백 음식을 다량으로 섭취하는 걸 부담스러워한다고도 하였사옵니다.”
“그게 무슨…….”
“전부 뱀파이어들의 증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얻은 정보이옵니다.”
“…….”
“더 고하여 드려도 될지…….”
“또 있느냐?”
“몸 가꾸기에 관심이 많아서 근력 운동을 즐긴다고 하였사옵니다. 최근에는 3대 400킬로그램을 달성하였고, 이제 곧 안다아머를 당당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매우 기뻐했다고도…….”
“…….”
“더 고하여 드릴까요?”
“아, 아니, 되었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손사래를 쳤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이렇듯, 방금 고하여드린 바와 같은 정보들을 취합한 결과, 그가 뱀파이어일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사옵니다.”
……그러하였다.
애초에 심각한 변태가 아닌 이상, 마늘 바게트를 즐기는 뱀파이어는 없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뱀파이어도, 일광욕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뱀파이어도 없다.
게다가 뱀파이어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초월한 근력을 지니고 있다. 3대 운동 400킬로그램? 그들에겐 껌이다. 한데 고작(?) 그걸 달성하며 매우 기뻐했다니, 아무리 봐도 뱀파이어의 행동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흉수의 정체는 뱀파이어가 아닐 것이며, 뱀파이어와 관련된 혈액 계통의 흑마법을 익힌 존재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사옵니다.”
“인간이면서 뱀파이어를 부리는 자라…….”
“그렇기에 사회적 지위와 인정에 더욱 집착하는 것이겠지요.”
“하면, 대책은?”
“이미 모두 마련되어 시행되는 중이옵니다.”
라키엘은 방긋 웃었다.
“그가 부리던 뱀파이어가 모두 사로잡혔으니 앞으로 변이증을 퍼뜨릴 수 없을 것이고, 이미 퍼진 변이증은 제가 치료하는 중이기 때문이옵니다.”
이제 놈에겐 방법이 없을 것이다. 짜잔, 하고 나타나서 변이증을 치료하며 생색을 낼 기회 따위는 1그램도 주지 않을 거니까.
‘어딜 감히! 원래 같은 업종끼리는 상권 겹치게는 안 들어오는 게 예의거든?’
라키엘은 문득, 한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느 날, 같은 빌딩 다른 층에 들어왔던 어떤 한의원이 생각났다. 그 한의원의 입점을 알게 된 날 건물주에게 따졌던 순간도 떠올랐다. 덕분에 돌려받아야 했던 암담했던 대답도, 모두.
“…….”
암울한 기억은 가급적 자주 떠올리진 말자.
라키엘은 당시에 느꼈던 기분을 접으며 새삼 다짐했다. 일부러 병을 퍼뜨리고 생색내는 치료를 하는 상도덕 없는 짓으로 남의 영업을 방해하는 놈 따위는 가뿐히 밟아 버리겠노라고. 그 어떠한 빈틈조차 내어주지 않겠노라고.
“하니 이후의 대응은 제게 맡겨주시면 어떨까 하옵니다.”
“…….”
황제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황실의 정보부. 그들이 머리를 맞댄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수준의 결론을 혼자서 꺼낸 자신의 아들을. 그 놀랍고 경이로운 모습을.
‘너는 대체…….’
누구인 것이더냐.
과연 짐이 알던, 그 무력하고 무능했던 라키엘이 정녕 맞느냐. 만약 아니라면, 짐이 모르는 미지의 존재라면, 그것이 진실이라면, 짐은 너를 어찌 대하여야 하겠느냐.
처음엔 기뻤다.
그저 마냥 기뻤더랬다.
한데 요즘은 점점 자신도 모를, 인정하기 싫은 이질적인 기분이 치밀곤 했다. 이상했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의심과 의혹이 독버섯처럼 마음 한쪽을 자꾸만 좀먹어 온다. 거부하려 하여도 어쩔 수가 없이. 어버이 된 사람의 본능 같은 감각으로.
하지만 황제는 애써 그런 기색을 숨겼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를 책망하였다.
‘……쯧, 아스테리온. 이 어리석은 놈아. 너는 아직도 계속하여 아들을 가혹한 시험에 놓이게 던져두고 싶은 것이더냐.’
이런 의심은 옳지 않다.
이제는 아들을 믿자.
그것이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아들에게 퍼부었던 냉대에 대한 유일한 속죄의 길이 될 것이니.
그러니 부디.
“황태자는 뜻하는 바대로 하라.”
황제의 윤허가 떨어졌다.
♣
그리고 같은 시각.
며칠에 걸친 혈투의 끄트머리에서 가까스로 쟈빌론을 제압한 흑마법사, 아난샤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헉! 허억.”
그는 주저앉아서 가까스로 웃었다. 그리고 맞은편으로 눈길을 들었다. 그곳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인 거한, 쟈빌론이 있었다.
‘방금은…… 정말로 위험했다.’
거의 죽임을 당할 뻔했다.
마지막 순간, 도박을 거는 심정으로 걸었던 정신지배가 실패했다면? 아마도 자신의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했다.
괴물 같은 거한의 정신을 성공적으로 지배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놈이 수없이 찾으며 외치던 리한 군의관이라는 존재를 이용했다. 놈으로 하여금 자신을 ‘리한 군의관’으로 인식하게 최면을 걸었다.
“후후…… 후후후…….”
최면이 제대로 걸렸다.
확신이 들었다.
“나, 리한 군의관이 명하노니, 고개를 들라.”
아난샤는 짐짓 목소리를 꾸며서 명령했다. 그 명령에 쟈빌론의 커다란 어깨가 꿈틀, 희미하게 반응했다.
좋다. 자고로 최면은 첫 반응과 교감이 중요하다. 첫 교감을 어떻게 나누는가에 따라서 최면을 시전한 자와 걸려든 자의 관계가 고정되기 때문이었다.
‘내게 복종해. 어서!’
아난샤는 짐짓 엄격한 눈빛으로 쟈빌론을 쏘아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떨구어져 있던 쟈빌론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흐리멍덩하던 눈빛이 이쪽을 향하며 초점이 잡혀갔다.
이내 흘러나오는 중얼거림.
“리한…… 군의관……?”
성공이다.
이쪽을 리한 군의관으로 인식했다.
자신감을 얻은 아난샤는 더욱 힘찬 어조로 명령했다. 자신을 주인으로 인식하도록. 그 관계가 고정되도록.
“그래. 내가 리한 군의관이야. 그러니 너는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리한 군의관…….”
“좋아. 어서 말해.”
“너는 나의 것이다.”
“……?”
“너는…… 나의 것이다, 리한 군의관!”
“……에?”
철렁.
쟈빌론의 눈동자 가득 이글이글 떠오르는 무한 집착의 엑기스를 감지하며, 아난샤의 가슴이 철러덩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