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68화 (268/468)

268화. 부항자국 아티스트 (1)

“너는 나의 것이다, 리한 군의관.”

“…….”

“행여나 미리 말해두는데, 지난번처럼 날 떠나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말도록.”

“…….”

“그런데 리한 군의관? 오늘은 내 머리를 안 쓰다듬을 생각인가?”

“…….”

또다.

아니.

계속 이런다.

미치겠다, 진심으로.

“…….”

혈염의 흑마법사, 아난샤는 2심방 2심실 가득 쑴펌쑴펑 피어나는 난감함과 암담함을 만끽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성공적(?)으로 정신지배를 당하게 된 거구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쟈빌론이 있었다. 매우 단호하고도 한편으로는 은근슬쩍 반가운 기색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이 있었다.

“뭐 하는 거지, 리한 군의관? 내가 부르는데 어째서 미적거리는 반응인 것이지?”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는 나의 것이다, 리한 군의관.”

“…….”

x발.

하마터면 나올 뻔한 욕설을 참으며, 아난샤는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사태를 맞이하게 됐는지를 떠올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정말로 그랬다.

멍청한 권속 하나가 아지트로 데려와 버린 이 거구의 소드마스터. 처음에는 자신도 그저 잡아먹을 생각을 했다. 소드마스터에게서 뽑아내는 피로 자신의 수명과 마력을 더욱 상승시키리라 기대했다.

한데 오판이었다.

막상 충돌하고 보니, 거구의 소드마스터는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첫 충돌에 아지트를 숨겨두던 결계가 찢어졌다. 충격파가 외부로 모조리 번졌다. 아니, 충격파만 찢겼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아지트로 삼던 저택마저 붕괴했다. 대다수의 권속이 그 재난에 휩쓸렸다. 일부는 충격파에 정통으로 맞아 전신이 가루가 되었다. 살아남은 것들은 대부분 건물 잔해에 깔렸다.

하지만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거구의 소드마스터, 이놈이 미친 듯이 날뛰며 계속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다.

리한 군의관이 어디 있느냐고.

혹시 나 모르게 잡아둔 거냐고.

리한 군의관을 순순히 풀어주라고.

“…….”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도망만 칠 수도 없었다. 추격을 뿌리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선택 가능한 해답은 맞서 싸우는 것밖에 없었다.

살기 위해 싸웠다. 무려 나흘 밤낮을 꼬박 싸웠다. 그 와중에 황실의 추격을 받지 않기 위해 마나의 흔적까지 감추며 싸우느라 두 배로 힘들었다.

그 끝에 도착한 인적 없는 협곡. 여기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막다른 길이었다. 자신과 거구의 소드마스터.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끝날 듯한 상황이었다.

물론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죽일 자신도 없었다. 하여 도박을 거는 심정으로 정신 지배 마법을 시전했다.

거구의 소드마스터가 내내 외치던 리한 군의관. 그 존재를 이용했다. 자신을 리한 군의관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목이 베이기 직전에 가까스로 성공했다.

그런데 이걸 과연…… 성공이라고 불러야 할까?

“리한 군의관? 나 머리가 아프다.”

“…….”

“이리 오라. 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다오.”

“…….”

“어서?”

“…….”

리한 군의관. 당신은 대체 뭐 하던 인간입니까?

아난샤는 우주의 근원만큼이나 열렬하게 궁금한 의문이 생겨 버렸다. 인생에 단 하나의 기회가 있다면, 리한 군의관이라는 사람을 한 번쯤 만나보고 싶어졌다.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인간이길래 이런 미친놈과 엮였던 걸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소한(?) 의문보다는 상황의 해결이 우선이었다.

‘젠장!’

아난샤는 욕지기를 삼키며 어색한 손을 내밀었다.

“이, 이렇게 하면 됩니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니.

강아지 x낀가.

뭔가 한심한 기분이 치밀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정신지배 마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니까. 아무리 정신을 지배하더라도, 자신을 리한 군의관으로 인식하게 했더라도, 원래의 리한 군의관과 지나치게 다른 태도를 보인다면 정신지배가 풀릴 수도 있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려면?

어느 정도는 요구를 맞추어 주어야 하리라.

“…….”

젠장, 내가 어쩌다가.

아난샤는 까닭 모를 비애감을 느끼며 쟈빌론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그 어색한 손길로 쟈빌론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지만.

“……쓰읍. 정성이 부족하다, 리한 군의관.”

“네?”

“전에는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마다 구수한 노래도 불렀는데.”

“노래……를요?”

“그래. 노래.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내…… 내 손은…… 약손…….”

“그렇지. 그렇게. 에헤이야~”

“에헤……이야…….”

“더 구수하게.”

“아, 네…….”

“그런데 리한 군의관?”

“네?”

“잠시 못 본 사이에 실력이 퇴보한 것 같은데. 어째서 그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도 계속해서 머리가 아픈 것이지?”

“네에?”

“정성이 부족한 것 같다. 더 열심히 하도록.”

“…….”

“아 참, 리한 군의관? 사실 내가 전부터 궁금한 점이 있었는데.”

“네? 어떤……?”

“예전엔 왜 날 떠나려 했지?”

“예?”

“날 떠나려 했잖나. 날 속이고. 감히 앙부아즈를 지배할 예정이었던 나를 버리고서. 훌쩍, 말이야.”

“앙부아즈요?”

“그래. 앙부아즈. 이 쟈빌론 님이 지배하며 더욱 찬란하고 위대한 천 년의 반석에 올라설 예정이었던 왕국.”

“…….”

“말해봐, 리한 군의관. 왜 날 떠나려 했지?”

“…….”

“설마 내가 미웠나?”

“아, 그건…….”

아난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거구의 소드마스터. 떡지고 헝클어진 머리칼과 땟국물이 가시지 않은 얼굴. 덕분에 지금까지 알아보지 못하였던 정체.

‘이놈, 설마.’

문득 떠올랐다.

작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앙부아즈 내전. 그 내전에서 패배한 반란군. 수장 쟈빌론. 거구의 소드마스터라고 했다. 왕국군에게 포로가 되어 마법 실험실로 끌려갔다고 했던가. 그런데…….

‘이자가? 탈출한 건가 설마?’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체구. 엄청난 위력의 소드마스터. 거기에 스스로 ‘쟈빌론’이라고 이름을 밝히기까지.

게다가 이렇듯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보자니, 언젠가 앙부아즈 왕가가 방방곡곡에 내걸었던 격문의 내용이 떠올랐다. 반란군에 맞서 왕국을 지켜낼 자원입대자를 모집하는 내용의 격문이었다. 그곳에 사악하게 묘사된 반란자 쟈빌론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

그때 그림으로 봤던 얼굴.

거기서 사악한 묘사만 좀 걷어내면…… 흡사하다. 아니, 거의 똑같다. 눈앞의 이 거구의 미친놈과.

“저는 떠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해서였지요, 쟈빌론 각하.”

감(?)을 잡은 아난샤는 즉각 태도를 바꾸었다. 시험을 하듯 은근한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그, 그래?”

거구의 소드마스터, 쟈빌론이 즉각 반색을 했다.

“그 말이 정말인가? 나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말이?”

“네. 그렇습니다. 저는 정말로, 진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날 떠나는 척하려 했던 것이라고?”

“네, 쟈빌론 님.”

“그런데 왜 날 패대기쳤지?”

“……네?”

“나보다 엄청나게 커졌잖나. 그래서는 날 붙잡고…… 쥐포 털듯이 이쪽 땅바닥, 저쪽 땅바닥에 번갈아서 패대기를 치고……. 그것도 전부 날 위한 것이었다고?”

“아, 그게…….”

아난샤의 이마에 진땀이 좍 돋아났다.

그는 서둘러 대답했다.

“두통을 사라지게 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 거였습니다!”

“어, 그, 그랬나?”

“네!”

“아, 그랬……군……. 미안하네, 리한 군의관. 그것도 모르고 난 그대를 미워할 뻔하였는데.”

“…….”

휴우.

다행이다.

아난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한, 한편으로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자, 앙부아즈의 반란자 쟈빌론이다. 확실해. 그런데 리한 군의관이라는 존재는…….’

……마젠타노의 황태자인가?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예전에 접했던 풍문이 떠올랐다.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거대한 모습으로 전장에 나타나 반란자 쟈빌론을 쓰러뜨렸다고 했던가.

당시엔 헛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듣고보니, 방금 쟈빌론이 떠들어댄 이야기와 어느 정도는 내용이 비슷한 듯했다.

“…….”

에이. 그래도 아니겠지.

황태자가 타국의, 그것도 반란군의 일개 군의관이었을 리가. 게다가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병약한 존재라는 것이 정설인데 무슨.

‘헛소문이지, 그건. 병약한 약골 황태자가 이런 괴물 소드마스터를 패대기를 쳤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 황태자는 리한 군의관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내가 소드마스터를 부리게 된 거야.’

권속들을 모두 잃었다.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러나 대신에 소드마스터를 손에 넣었다. 이로써 손해를 훨씬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에 품던 계획 또한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좋구나, 좋아.’

아난샤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쟈빌론을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에 위험한 야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쟈빌론이 반응했다.

“그런데 뭐 하나, 리한 군의관? 어째서 내 머리 쓰다듬기를 마음대로 중단하는 거지?”

“……아, 네?”

“쓰다듬으라고. 어서.”

“아, 내 손은…… 약손…….”

“그렇지. 잘하는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는 내 것이다, 리한 군의관.”

“…….”

젠장.

아난샤는 생존을 위한 머리 쓰다듬기를 시전하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위험한 계획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자아, 위험하지 않으니까 힘 빼시고.”

“네에…….”

“시작합니다, 흐읍!”

뽀옥!

한편, 이곳은 아난샤와 쟈빌론이 있는 협곡에서 한참 떨어진 황도의 별궁 한의원. 오늘도 라키엘은 진료실에서 성물을 이용한 부항 치료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흐으읍!”

키이이이잉-!

아스라한 심법이 발동되었다. 전격적인 마나의 흡수! 환자의 혈액 일부가 흡수력에 이끌려 왔다. 그리고 미리 침으로 찔러둔 부위를 통해 피부 밖으로 흘러나왔다. 피부를 뒤덮고 있는 반구형 성물 안에 고였다.

그리고 정화되었다.

치이이익!

꼬슬꼬슬 간고등어 굽는 듯한 소리가 진료실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뱀파이어 변이증에 감염되어 있던 환자의 혈액이 깨끗해졌고, 환자의 몸속으로 돌아갔다.

‘좋아!’

라키엘은 씨익 웃었다.

역시나 잘된다.

사실 당연하다.

지난 며칠 내내 수없이 반복했던 치료니까. 덕분에 성물과 아스라한 심법을 조합한 부항 치료가 완전히 손에 익을 정도로 익숙해졌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번 환자가 딱 100명째인가.’

대략 그런 듯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얻은 보너스 수명도 엄청났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311일]

“…….”

엄마, 나 해낸 거 같아요.

이대로면 무병장수 만수르 라이프, 진짜로 가능할지도.

솔직히 말해서 당장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변이증 사태를 터뜨린 뱀파이어들의 볼따구에 격한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뭐, 만약에 웅녀 테라피와 성물 부항 치료법을 개발하지 못했다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더 고통받았을 테니까.’

사실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그러니 함부로 기뻐하지 말자. 이번 일로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내가 그런 일을 해냈다는 사실 자체에 가장 크게 기뻐하자.

라키엘은 가벼워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눈앞의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 더욱 집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00번째 환자의 변이증이 완치되는 순간.

딩동!

[당신이 쌓은 부항 치료의 특수한 실전 경험이 스킬로 변환됩니다.]

[새로운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명 : 부항 Lv.1]

[부항 기구로 환자의 피부에 음압을 발생시켜 이로운 치료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부항 치료 효과 +10%]

[스킬 옵션 ① : <부항자국 아티스트>를 활용하면 환자에게 각종 추가 버프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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