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70화 (270/468)

270화. 부항자국 아티스트 (3)

꿀꺼덕, 꿀꺽!

“크흐흐……!”

내가 모시는 황태자 전하는 참 괴상…… 아니, 특이한 분이시다. 왜냐고? 가끔씩 저렇게 혼자서 허공을 쳐다보며 뜻 모를 웃음을 흐뭇하게 터뜨리시곤 하거든.

“…….”

별궁 한의원의 수간호사, 웨어울프 아니스는 콧등을 찡그렸다. 그리고 난감한 눈길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연신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멍한 눈길? 아니, 절대로. 오히려 초롱초롱했다. 마치 선물 보따리를 듬뿍 받는 사람 같은 눈빛이었다. 혹은, 반가운 소식이 잔뜩 적힌 편지를 읽는 사람의 눈빛 같기도 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

진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인데. 그런데 뭐가 저렇게 좋다는 걸까. 게다가 조금 전까지 황태자는 환자의 부항자국에 괴발개발 괴상한 그림을 그려넣기까지 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그린 것만 같은, 그런 그림을.

‘전하께서는…… 그림을 엄청 못 그리시는구나.’

솔직히 이렇게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은 처음 봤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자신이 발가락으로, 아니, 귓구멍에 붓을 꽂고 그려도 더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림 실력은 둘째치고…….

‘전하께서는 왜 이러시는 거지?’

아니스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황태자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괴팍한 짓거리를 하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는 그녀였다. 당연했다. 지금까지 황태자가 벌여댄 온갖 기이한 행동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으니까. 예외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러하리라.

“크흐흣, 크킄!”

“…….”

이번은 아닌가.

결국, 아니스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전하? 환자를 밖으로 안내할까요?”

환자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보통 성물을 이용한 부항치료를 받으면 그 자리에서 완치가 되며 제정신을 차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 또한 당연했다. 성물을 쓰지 않았으니까. 그냥 일반 부항컵으로 부항을 하고, 그 자국에 낙서를 새겼을 뿐이니까.

그런데…….

“아니, 잠깐 기다려 봐.”

의외로 황태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환자의 기색을 면밀히 살폈다. 요모조모, 환자의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살피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했다.

“아니스? 이 환자 별궁 연무장으로 안내해드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아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무장이라니요?”

혹시 황태자는 환자를 연무장에서 훈련이라도 시키겠다는 걸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라는 생각은 틀렸다.

“연무장에 데리고 가서 20바퀴만 같이 걸어.”

“네에?”

“20바퀴 걸을 수 있게 부축 좀 해드리라고.”

“…….”

어째서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꺼낼 수가 없었다. 황태자의 이어지는 말이 먼저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마침 오늘 날씨가 화창하니까?”

“…….”

“20바퀴쯤 걸으면서 햇볕 낭낭하게 쬐어주고, 동시에 혈액순환 한껏 돌려주면 환자분이 정신을 차릴 거야. 그러면 회복실로 옮겨줘.”

“회복실이라시면…….”

“응. 웅녀 테라피 졸업이야. 완치니까.”

“…….”

이해가 안 된다.

무슨 뜻인 건지 짐작도, 추측도 안 된다. 너무나 엉뚱해서. 뜬금이 없어서. 인류와 웨어울프 모두의 보편타당한 상식을 동원해도 해석이 안 되어서.

하지만 아니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어서.”

“아, 알겠습니다, 전하.”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을, 피고용자의 숙명!

아니스는 당혹감을 억누르며 아주머니 환자를 데리고 연무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부축을 해주며 함께 천천히 걸었다. 물론 그동안에도 환자는 여전히 몽롱한, 전형적인 뱀파이어 변이증의 인사불성 상태를 보였다.

“끄흐으으…… 그르…….”

만취한 듯한, 혹은 좀비와 같은 의미 불명의 신음. 환자의 표정과 몸짓과 행동 어느 구석에서도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같이 걸으면 완치일 거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적어도, 다섯 바퀴를 걸을 무렵까지는 그랬다.

“어으…… 아유…….”

……어?

함께 걷던 아주머니 환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전과는 조금 달랐다. 아까까지는 그저 지성 없는 좀비 같은 소리였는데, 지금은 사람 같은(?) 느낌이 살짝 났다.

‘…….’

착각인가.

아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해서 환자를 부축했다. 여섯 바퀴…… 여덟 바퀴…… 열 바퀴…… 꾸준히 연무장을 함께 걷는 동안 상황이 점점 달라졌다.

“후우, 어유. 으즈르르오오…….”

“네?”

깜짝이야.

열한 바퀴를 걸었을 무렵이었다. 뜬금없이 환자가 말을 했다. 지극히 어눌한, 그래서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을 했다.

“…….”

이거 실화인가.

아니스는 문득, 최근 자신들이 돌보았던 뱀파이어 변이증 환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중에서 제대로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증상 초기에는 그나마 대화가 가능했지만, 병세가 진행되면 아예 말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 아주머니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변이증이 중증의 단계까지 진행되며 지성을 거의 잃어가던 상태였다. 그런데 고작, 연무장을 열 바퀴 남짓 걷는 사이에 상태가 호전되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니?

‘이게 가능한가?’

처음 보는 상황에 잠깐 당혹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숙련된 수간호사답게 금방 침착함부터 되찾았다. 그리고 환자에게 나긋하게 물었다.

“조금 힘드세요? 천천히 걸을까요?”

“으으…… 네에.”

“…….”

진짜다.

말을 하고 대화를 나누게 됐다.

고작 연무장을 걸었을 뿐인데!

‘설마.’

황태자의 호언장담이 맞는 걸까. 어째서? 어떻게? 그냥 일반 부항 치료를 했을 뿐인데? 특이한 점이라고 해보았자 부항자국에 괴상한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진짜로 그것 때문에? 혹시 남들 모르게 마법이라도 쓴 거 아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덕분에 이제는 결과가 더 궁금해졌다. 그녀는 아주머니 환자를 부축하고서 더 성심껏, 천천히, 배려를 하며 걸었다.

열세 바퀴…… 열다섯 바퀴…….

아주머니 환자의 발음이 또렷해졌다.

“어유, 어지러. 후우…….”

“…….”

열일곱 바퀴째.

환자가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간호사 아가씨? 우리, 계속 이렇게 걸어야 해요?”

“네. 걸어야 합니다.”

“나 너무 덥고 힘든데. 조금만 쉬었다가 하면 안 될까?”

“안 됩니다.”

“어째서요?”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십니다.”

“……어? 그랬어요?”

“네.”

“아유, 그럼 걸어야지. 얼마나 더 걸으면 돼요?”

“세 바퀴 남았습니다.”

그러면 완치가 될 거라 했으니까요.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눈으로 봐도 달라지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마저 세 바퀴를 걸어서 연무장 20바퀴를 채우는 순간이었다.

“……헛?”

땀을 흘리며 열심히 걷던 아주머니 환자가 느닷없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잠시 후, 이쪽을 돌아보며 망연자실하게 말했다.

“나, 기억이 났어…….”

“…….”

“골목에서 웬 여자가 다가와서는…… 내 목을…….”

“다 떠오르신 건가요?”

“응, 그런 거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아주머니 환자.

그 모습을 보며 아니스는 내심 감탄했다. 뱀파이어에게 물리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그것이 뱀파이어 변이증의 가장 확실한 완치의 증표이기 때문이었다.

즉, 이 아주머니 환자는…….

“축하드립니다. 뱀파이어에게 물렸지만, 다행히 완치가 되신 거 같네요.”

“내, 내가요?”

“네. 그럼 이제 회복실로 모시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당부대로 말이죠.

아니스는 뒷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연무장으로부터 저 멀리에 보이는 한의원 병동의 어느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곳 창가에 황태자가 서 있었다. 아마도 내내 이쪽을 보고 있던 거겠지.

“…….”

황태자 전하.

당신은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요?

그녀는 묻고 싶은 말들을 잔뜩 삼키며 환자를 안내하였다. 물론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라키엘은 아니스가 품은 의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후우, 이거 효과 확실하네.’

혹시나 했다.

실화인가 싶었다.

그래서 바로 확인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

라키엘의 눈길이 향하는 허공.

그곳에 메시지창이 떠올라 있었다.

[부항 스킬 옵션 ① : 부항자국 아티스트가 발동되었습니다.]

[보유 중인 <흡혈귀 퇴치의 도안>을 사용하였습니다.]

[사용된 도안의 숫자 : 5개]

[도안의 숫자가 많을수록 효과가 중첩됩니다.]

[도안의 효과가 뱀파이어 변이증 치료 행위에 +500% 효과 버프를 부여합니다.]

[치료 버프 지속 시간 : 3시간]

[버프 시간이 종료되기 전에 적극적인 치료 시행을 권장합니다. 마늘 섭취, 일광욕 추천. 치료를 시행하며 적절한 혈액순환이 병행될 시에, 뱀파이어 변이증이 완치될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아까 도안을 다 그린 직후에 떠오른 내용이었다. 이제 그 결과까지 확인을 하고 보니 이건 정말이지…….

‘미쳤네. 게임 터졌네.’

라키엘은 확신했다. 이걸로 뱀파이어 변이증 치료는 끝났다고. 이제 더는 성물을 사용할 필요가 없겠다고.

그 순간, 그의 확신에 쐐기를 박는 추가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부항스킬 옵션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하여 환자 : 엠마의 뱀파이어 변이증을 성공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그녀는 중증 변이성 질환에서 벗어났으며, 적절한 안정을 취할 시 별다른 후유증 없이 완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녀는 변이증이 더 진행될 시에 죽음이 아닌, 뱀파이어의 운명을 받을 예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진료비 청구 스킬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보너스 수명을 받지 못한 대신, 소정의 HP가 보상으로 지급됩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노고를 치하하며 3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9,700]

‘후우. 좋아.’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 보너스 수명을 못 받은 건 살짝 아쉽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직 남은 변이증 환자가 많으니까. 그들에게 퍼받을 보너스 수명만 계산해도 엄청난 양이 될 테니까.

‘게다가 이제는 부항 치료에 성물을 쓸 필요가 없어졌으니, 진료 속도가 몇 배는 빨라질 거야.’

성물을 쓸 때에는 직접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해야 했다. 그 때문에 한 번에 한 명의 환자만 진료할 수 있었다. 심지어 매번 심법을 쓰느라 제법 피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제약이 풀리게 됐다.

‘환자 열 명쯤 나란히 눕혀서 부항 붙여뒀다가 한꺼번에 도안만 그려주면 되니까!’

실제로 한의원에서 침이나 부항을 맞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한의사는 한 번에 한 명만 진료하지 않는다. 이 침상, 저 침상을 분주하게 오가며 침을 꽂고, 부항을 붙여주고는 한다. 덕분에 한의원 치료실 곳곳에서 타이머 알람 소리가 수시로 울리는 것이기도 하고.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돼.’

그는 시험 삼아 몇 명의 환자를 더 불러왔다. 일반 부항컵으로 부항자국을 새기고, 자국에 뱀파이어 퇴치의 도안을 그려주고, 연무장을 걷게 했다.

결과는 전원 완치.

‘됐다.’

마지막 확인까지 마친 라키엘은 다음날 대주교를 불러들였다.

“대주교님? 이렇게 갑작스러운 초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전하. 저야 언제나 전하의 부름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허허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또한 감사합니다, 대주교님. 실은, 오늘은 제가 대주교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듯 무례를 무릅쓰고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예? 긴히 주실 말씀이라니 무슨……?”

“일전에 반으로 뚝 잘랐던 성물 말입니다.”

“예, 전하.”

“이제 그걸 대주교님과 교단의 품으로 돌려보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예에?”

대주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벌써 모든 환자를 치료하신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직 환자는 제법 남았습니다. 다만, 이제는 성물의 도움 없이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됐습니다. 그러니 당초에 드렸던 약속대로 성물을 돌려드리는 것이 도리겠지요. 물론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해드리는 것도 잊지 않겠습니다.”

라키엘이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사실 성물을 반으로 잘라서 쓰는 것은 이쪽 입장에서도 찜찜했다. 교단과 관계가 나빠져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 혹은 신이라는 존재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일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 얻게 된 부항 스킬의 존재가 더욱 반가웠다. 한편으로는, 이렇듯 성물의 빠른 반납 의사를 밝히면 대주교도 매우 기뻐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 그건…….”

뜻밖에도 대주교가 난감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더욱 뜻밖의 말을 건네어 왔다.

“외람되지만, 전하? 혹시 괜찮으시다면…… 성물을 더 계속 사용해 주실 수는 없으실는지요?”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대주교의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실은 교단에서 말입니다. 전하의 이번 성물 사용을 매우 크게 반기는 분위기라서…….”

“제 성물 사용을 말입니까?”

“예, 전하. 덕분에 교단의 명성이 드높아졌다는 평가입니다.”

“허허?”

“아, 그리고 이건 사실 며칠 뒤에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공표할 내용이기는 한데, 으음, 귀를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귀를요?”

“예. 전하께서 당사자이시니 미리 귀띔을 해드릴까 해서 말입니다.”

“…….”

교단에서 며칠 뒤에 공표할 사안? 그런데 내가 당사자라고?

대체 뭘까.

라키엘은 궁금함을 느끼며 대주교에게 다가갔다. 주위를 슬쩍 살핀 대주교가 귓속말을 소곤소곤 건네어 왔다.

“실은…… 성물을 활용한 전하의 뱀파이어 변이증 치료 성과를 일종의 기적을 행한 성스러운 업적으로 간주하게 되어서 말입니다……. 교단에서 전하를 공식적 성인(聖人:Saint)으로 추대할 예정입니다.”

“……네?”

라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신성한 존재라 불리는 성인? 나 같은 놈이? 진짜?

‘이거…… 실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