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잘못된 만남 (1)
이 세상에는 성스러운 존재가 많다.
부처님, 예수님, 알라신, 공자 맹자 등등의 존경스러운 분들은 구태여 말을 하는 게 입이 아플 지경이다. 그 외에도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분들, 응급현장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희생을 자처하는 분들도 계신다.
그뿐일까.
소리 없이, 티 내지 않는 봉사를 이어가는 분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비록 큰 금액이 아닐지라도 사회를 위해 기부를 하는 분들께도 칭찬의 박수.
그런데 내가…….
‘성인으로 추대된다고? 진짜? 리얼?’
라키엘은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말도 안 된다. 자신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저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의 생존(?)기간보다 짧은 수명을 늘려보려고 아등바등거렸을 뿐이니까.
‘다른 사람을 치료해서? 뱀파이어 변이증을 성공적으로 잡아낼 방법을 찾아내서?’
물론 그건 좀 대단하긴 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렇다. 하지만…….
“대주교님?”
“예에, 전하.”
“저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전하.”
“…….”
“하지만 전하께서도 성인 추대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아차린 눈치이신데 말입니다.”
“예, 뭐. 물론.”
그렇다.
황당하지만, 그럼에도 알겠다.
이쪽을 성인으로 추대하는 일이 교단에게도 큰 이득이 되리란 사실쯤은 말이다.
“제가 알기로 교단에서 누군가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경우는 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성스러운 기적을 행하거나, 그에 준하는 역사적인 업적을 통하여 신의 뜻을 온 세상에 드높인 공로가 인정되는 자. 맞지요?”
“예. 맞습니다, 전하.”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 마젠타노 제국의 황제.”
그러했다.
역대 모든 황제는 신성교단의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언제? 대관식을 거행할 때마다. 예외 없이 무조건 자동으로였다.
“물론 그건 일종의 명예직이라고 볼 수 있다지요. 제가 듣기로는 그랬습니다. 황제가 정말로 성스러워서 성인으로 추대되는 게 아니라, 성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어질고 자비로운 정치를 펼쳐달라는 교단의 당부의 의미가 담긴 추대라고 말입니다.”
“정확하십니다, 전하.”
“그럼 제가 성인으로 추대되는 건…… 두 번째 케이스는 아니겠군요. 저는 아직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으니까.”
“그렇습니다, 전하.”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그저 명예직의 의미가 아닌, 역사적인 업적을 인정받은 진짜 성인으로 추대될 예정이십니다.”
“…….”
뱀파이어 변이증의 치료법을 발견한 게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
“명예롭게 받아들이셔도 되십니다.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에서 치러지는 성인 추대는 백 년에 한두 번이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건 안다.
세기에 겨우 한두 번.
어떨 때는 없기도 하다.
‘후우. 장난 없네.’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들뜬 심장을 가라앉혔다. 너무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이라 십이지장 융털돌기 동맥이 온몸에 고혈압 비트를 넣어댈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싫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성인 추대를 통한 사회적 명예 상승을 기뻐하며 춤판을 벌입니다.]
[심장 : 유후! 이제부터 내가 성인의 심장이다!]
[허파 : 흐픕! 허프픕!ㅋㅋ]
[대장 : 그럼 제가 방출하는 끙까는 뭐지 말입니까?]
[간장 : 끙까가 그냥 끙까지 뭐겠냐ㅋㅋㅋㅋㅋ]
[위장 : 성인이 누는 끙까는 사이다 향이라도 나길 바랐음? 양심 좀ㅋㅋㅋ]
[콩팥 : 그래도 이런 말도 있잖아. 일단 끙까를 싸라. 유명해질 것이다.]
[비장 : 성인으로 추대되는 자리에서?]
[간장 : 유명해지긴 하겠네.]
[심장 : 아하.]
[허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신의 오장육부가 거대한 사회적 명성 획득을 축하하며 600 HP를 후원합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0,300]
“…….”
응, 솔직히 좋다.
게다가 교단이 갑자기 이런 파격적인 성인 추대를 결정한 이유도 대강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이번 일이 교단에게 큰 이득이 되겠다는 계산이 선 거겠지.’
그러하다.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신성교단? 그런 곳이 순수한 선의로만 운영될 거라는 기대는 어리석다.
누구나 다 그렇지만, 교단 또한 당연히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 일만 골라서 한다. 이번 결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자신들의 성물을 사용해서 뱀파이어 변이증을 치료했으니까. 그 업적을 높이 사서 날 성인으로 추대한다는 건? 즉, 자신들의 성물을 함께 올려치겠다는 뜻인 거지.’
덕분에 교단의 명성도 함께 올라갈 것이다. 아울러 제국 황실과의 관계도 한층 돈독해지고, 교세 또한 확장될 것이다. 서로 윈윈이 되는 셈이다.
“으음, 그럼…… 제가 이 성물을 당장 반납하지 않고 계속 치료에 사용해 주길 바라는 것도 같은 맥락인 거겠지요?”
“외람되오나 그렇습니다, 전하.”
대주교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벌써 눈치를 채셨군요.”
“예, 뭐. 이쯤은.”
……이래서 눈치 빠른 놈은 싫다니까, 라는 상투적인 대사를 읊으며 대주교가 품속에 숨겨온 권총을 꺼내는 일은 물론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대주교는 더욱 사람 좋게 웃었다.
“전하께서도 이번 성인 추대가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이해타산이 들어간 결정이겠지요. 하지만 그걸 눈치를 채셨음에도 이렇게 흔쾌히 기뻐해 주시니…….”
“감사하다고요?”
“예, 전하.”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지요. 저한테도 이득이 될 테니까.”
“하하, 그런 겁니까?”
“물론이죠.”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 뇌주름에서는 ‘신성교단이 인증하고 추대한 성스러운 성인에게 진료를 받을 기회! 놓치지 마세요!’라는 한의원 홍보문구가 어푸어푸 접영을 하는 중이었다.
‘이걸로 홍보만 잘 하면 별궁 한의원을 더 키울 수 있어!’
더 많은 환자.
더 많은 보너스 수명.
그걸 위해 의료대학에서 더 많은 의사를 납ㅊ, 아니, 고용해야지.
“그럼, 성인 추대 공식 발표는 언제쯤 나오게 되는 겁니까?”
“아마 며칠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전하.”
대주교의 대답은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불과 사흘 뒤였다.
진료실에서 뱀파이어 변이증 환자의 부항자국에 그림을 그려대고 있던 라키엘은 황제의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았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감히 뵙사옵니다.”
“인사는 되었다. 혹여 소식을 들었느냐.”
“송구하옵니다. 어떤 소식을 이르시는지 잘 모르겠사옵니다, 폐하.”
“그렇게 말하는 네 표정을 보니 이미 아는 것 같다만.”
“그리 말씀하시는 폐하의 기색으로 보아 나쁜 소식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은 드옵니다.”
“뻔뻔하구나.”
“송구하옵니다, 폐하.”
라키엘은 시치미를 뚝 떼었다.
황제가 냉랭한 눈빛을 떠올렸다.
“대주교에게 미리 귀띔을 받은 것이겠지?”
“그 역시 송구하옵니다, 폐하.”
“그래. 송구하여야지. 마땅히 무거운 죄악감을 느끼며 네 죄를 용서해 달라 빌고 자비를 구하며 바닥에 머리를 찧어야지.”
“……예?”
“오늘 오전에 신성교단으로부터 전언을 받았노라. 그들이 너를 성인으로 추대하겠노라 결정하였다지?”
“그, 그렇사옵니다, 폐하.”
“한데, 그런 좋은 소식을 먼저 듣고서도 그걸 짐에게 알리지를 않아?”
“…….”
“그런 경사를 먼저 접하고서도, 그걸 짐에게 전하지를 않고 혼자서만 즐겨?”
“…….”
“네 죄를 네가 알렷다?”
“그, 저기…….”
“고하라. 감히 고할 낯짝과 입이 있다면.”
“이 모든 기쁜 소식과 경사가 모두 폐하의 덕분이옵니다.”
“하. 이제 와서 감히 입에 발린 알량한 소리를.”
“…….”
저 양반, 삐쳤네. 삐쳤어.
라키엘은 숙인 고개 아래로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어, 으음,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겠사옵니다, 폐하.”
“이런 일? 어떤 일?”
“그게, 먼저 좋은 소식을 접하면 반드시 폐하께 바람처럼 달려와 가장 먼저 고하여드리겠사옵니다, 폐하.”
“그런 바람 필요 없도다.”
“그럼에도 폐하의 잠긴 문을 두드려 밖에서라도 열심히 고하여 드리겠나이다, 폐하.”
“그런 문 따위는 이미 부서졌도다.”
“……어오.”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아, 아니옵니다. 잠깐 재채기가 나올 뻔하여 가까스로 참은 것이었사옵니다, 폐하.”
“짐이 듣기엔 전혀 아닌 것 같았다만.”
“…….”
“어쨌건 네게 당부하노니, 부디 교만해지지 말지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다행(?)히 이쪽의 아첨이 통한 걸까. 황제의 서운해하던 기색이 조금은 풀어진 듯했다. 라키엘은 안심하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안심은 방심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또한 네게 당부하노니, 부디 스스로를 대단하다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 또한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이건 그저 단순한 당부가 아니니라.”
“예?”
“너는 실제로 대단한 구석이 없지 않느냐?”
“…….”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쁜 소식을 아비에게 전하지도 않고서 남의 입을 통하여 듣게 하는 놈이 무슨 대단한 구석이 있겠느냐.”
“…….”
차라리 절 귀양이라도 보내시죠, 그냥.
라키엘은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분명히 볼 수 있었고, 느낄 수도 있었다. 황제는 너무나 기뻐하고 있었다. 만일 보는 눈들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었을 만큼. 아니, 어쩌면 혼자 있을 때 진즉 추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겉으로는 저래도 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단지 그 표현법이 매우매우 하자가 있을 정도로 서투른 타입일 뿐.
“어쨌건, 짐이 너에게 알리노니, 앞으로는 성인의 명성에 걸맞도록 몸가짐을 더욱 신중히 하라.”
“알겠사옵니다, 폐하.”
그렇게 갈굼 같은 축하와 칭찬, 당부로 배가 터지도록 얻어맞고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황실과 교단의 협력 하에 성인 추대식, 즉, 시성식 준비가 빛의 속도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동안 라키엘은 매일 바쁜 일상을 보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료시간 내내 뱀파이어 변이증 환자들을 치료했다.
대부분은 새로 얻은 부항 스킬, ‘부항자국 아티스트’ 옵션을 활용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교단의 성물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이쪽의 사업적 스폰서(?)가 된 교단의 홍보를 위한 서비스였다.
그 사이, 시간이 쭉쭉 지났다. 하루, 이틀, 나흘, 열흘, 그리고 보름에 이어 한 달.
마침내 시성식이 거행될 아침, 행사가 준비 중인 황도의 프론테라 대광장에 거구의 어떤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인가. 리한 군의관을 뜻을 받들어 거사를 치를 곳이.”
과거의 몰락한 반란자, 쟈빌론이 인파 속에서 위험한 눈빛을 번득이며 시성식 단상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