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잘못된 만남 (2)
“카이엔 경? 이곳이 오늘 자네가 위치할 자리일세.”
시성식이 거행될 프론테라 대광장.
그곳을 둘러보던 데미안 카이엔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별궁의 보안 책임자이자, 별궁 근위대의 지휘관 프란델 경이었다. 그런데 프란델 경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자네, 괜찮은가?”
“…….”
혹시 프란델 경은 나를 걱정해주는 걸까.
어째서?
내가 아파 보이나?
사실 어젯밤 무렵부터 열이 제법 나고 있기는 한데. 그게 벌써 티가 나는 걸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나 보다.
“미안하군. 자네를 이런 취급을 하게 되어서.”
프런델 경이 진심으로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알고 있네. 자네의 경지가 내 상상 이상으로 높다는 걸.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오늘 거행될 시성식 행사 내내 전하의 가장 가까운 곳을 자네가 지키는 게 합당하다는 것도. 하지만 높은 분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듯해서 말이야.”
“제 출신 때문인가 보군요.”
“으음, 대강은.”
프란델 경이 혀를 찼다.
사실이었다.
오늘의 시성식은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당연했다. 신성교단에서도 백 년에 한두 명 추대할까 말까 하는 존재가 성인이니까. 그런데 황태자가 그 성인이 되게 생겼으니까. 오늘, 이 시성식 행사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큰 행사이니만큼, 황실의 궁내부와 신성교단이 협의를 거쳐서 모든 사안을 결정했네. 이곳 프론테라 대광장으로 장소를 정한 것도, 전하와 주요 인사들을 호위할 경비 계획을 세우는 것도 모두 말일세.”
“압니다. 그처럼 높고 존귀한 분들이 저를 어떻게 여길지도 말입니다.”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프란델 경의 결정이 아님을 잘 아니까요.”
“하지만 말이야. 아, 이건 좀 아닌데, 진짜로. 자네 같은 실력 있는 호위가 오늘 같은 날에 전하의 곁에 머무르지 못하고 광장 외곽 모퉁이에나 서 있어야 한다니. 쯧.”
프란델 경은 진심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상부로부터 받은 보안 계획서. 그 서류에는 오늘 시성식장에 배치될 보안 인력의 모든 위치가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데미안의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 자리가 황태자의 곁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냥 곁이 아닌 정도가 아니야. 여긴 아예 대광장의 가장자리니까. 이래서야 원, 전하의 얼굴이나 제대로 보일까.’
대광장 둘레의 가장자리. 하급 근위병사와 동일한 취급이었다. 이유야 간단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데미안의 신분 때문일 것이다. 작위나 가문은커녕 혈통도, 출신도 알 수 없는 지하 검투장 검투사였으니까.
“만약에 말일세. 오늘의 이 배치에 불만이 있다면…… 으음, 내가 상부에 다시 이야기를 좀 해보겠네. 전하의 바로 곁은 아닐지라도 조금은 가까운 곳에 배치될 수 있도록 말이야. 어떻겠는가?”
그래야 한다.
이런 인재를 광장 둘레에 병풍처럼 세우는 것은 정말로 국가적 손실이다.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황태자의 보호니까. 프란델 경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과거 한때 데미안을 몰래 시기했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
생각해보면, 당시의 자신도 지금의 높은 분들과 똑같이 데미안을 얕잡아 보았더랬다.
처음 황태자가 데미안과 검투사들을 별궁으로 들였을 때는 얼마나 기함을 하였던지. 심지어 출신조차 불분명한 이들로 황태자만의 특수 호위대, 특근대가 꾸려졌을 때는 얼마나 경악하였던지.
믿을 수가 없노라 여겼다. 한편으로는 시기했다. 특히 데미안이 가장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황태자의 가장 근접 호위는 자신의 자리여야 한다고. 별궁 근위대의 지휘관인 자신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자리를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놈에게 빼앗기니 억울했다. 가뜩이나 소드 익스퍼트 상급자의 고질병인 소드마스터 증후군 때문에 예민한데, 스트레스까지 쌓이니 잠도 거의 자질 못하였다.
하지만 크라노스에서였던가.
붕괴된 협곡에서 황태자를 상처 하나 없이 보호하여 부축하고 나오던 데미안의 모습을 보며…… 시기심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현실을 절감한 까닭이었다.
‘이 친구가 나보다 백 배, 천 배는 나아.’
전투 후의 조사 과정에서 직접 문제의 계곡을 답사했던 프란델 경이었다. 당시에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끔찍한 폭발과 열기로 절벽이 녹아내린 흔적들. 거기에 거대한 짐승이 통째로 베어문 듯이 소멸된 비탈과 암석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태, 그 이상의 붕괴와 파괴의 현장이었다.
그걸 보니 소름이 돋았다.
만약 이러한 붕괴가 일어나는 장소에, 자신이 데미안을 대신하여 황태자의 곁에 있었다면, 그랬다면…… 자신은 데미안만큼 황태자를 잘 지켜낼 수 있었을까.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하게.
“…….”
아니.
절대로.
세상에는 노력을 해도 닿지 못하는 곳이 있다. 제아무리 애를 써도 도달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프란델 경은 크라노스의 붕괴한 협곡에서 그걸 느껴 버렸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데미안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어떤가.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상부에 한 번쯤은 말을 해볼 수 있을 듯한데.”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데미안이 더 좋은 대우를 받기를 바랐다. 그걸 위해서라면 추후의 문책을 감수하고서라도 목소리를 내어야겠다는 생각 또한 품었다.
물론 데미안도 그런 프란델 경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으음, 정말인가?”
“예. 저 때문에 빚을 지워드리는 것은 싫으니까요. 대신-”
“대신?”
“프란델 경께서 오늘 전하의 가장 가까운 곳을 지켜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래서일세. 그건 나보다 자네가…….”
“경께서 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
“진심입니다.”
“……알겠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결국, 프란델 경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호들갑을 떨은 건가 싶었다. 무려 제국 황실과 신성교단이 함께 추진하는 시성식이었다. 그런데 설마 이런 장엄한 장소에서 난동을 부릴 이가 있을까.
‘하긴. 나 말고도 황실의 소드마스터 두 분도 모두 폐하와 단상 근처에 머무를 것이라 했지. 거기에 교단의 최고위급 성기사도 한 사람이 나올 거라고도 했고.’
행사장 하나에 소드마스터 둘과 최고위 성기사 하나. 이 정도면 이미 대륙 최고 수준의 호위다. 아마 인간의 세상에선 가장 안전한 장소가 아닐까.
“그럼 오늘도 수고해 주게나. 행사가 무사히 끝나면 저녁에 따로 보도록 하지.”
“어째서입니까?”
“자네와 특근대 모두 말일세. 내가 술이라도 한 잔 살까 해서.”
“다들 말술이라 한 잔 가지고는 한참 부족할 텐데 말입니다.”
“그럼 더 사면 되고.”
“위로주인가요.”
“뭐, 그런 셈인가.”
프란델 경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다른 근위대원들에게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후우…….”
지금 내뱉는 숨마저 뜨겁다는 걸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실은 어젯밤부터였다. 갑자기 오한이 나며 온몸에서 열이 끓기 시작했다. 단순한 독감일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걱정이 되는 부분은 있었다.
‘……마계왕.’
문득, 전에 황태자가 신신당부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마계왕. 놈이 육신을 빼앗으려 불치병을 일으킬 것이라고. 그렇게 해서라도 이쪽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고, 그걸 통해 강제로 각성을 발동시키리라고.
그러니,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말하라고…… 당부했는데.
“…….”
그런데 오늘은 다들 너무 바빠 보인다.
역사상 처음으로 황태자가 시성될 날이니까. 다들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심지어 황태자마저 그렇다. 황태자는 새벽부터 황궁으로 불려갔다. 그곳에서 황제와 함께 시성식 준비를 하고 있겠지. 덕분에 오늘은 아예 얼굴조차 보질 못하였다.
‘뭐, 그래도.’
반나절 정도만 참으면 되겠지. 그저 감기인 거겠지, 이 정도면. 그러니까 잠깐만 참자. 시성식이 다 끝나면 황태자에게 진료를 받자.
데미안은 목덜미에 돋아나는 오한과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배정받은 자리에 섰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맡은 광장 외곽 감시의 임무에 충실하자고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다.
♣
“후우.”
오늘 잘하자.
실수하지 말자.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면에 걸린 거울. 그 속에 비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을 마주보았다.
“흐음.”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전보다 제법 건강해진 모습이구나.
아직 마른 체형인 건 여전했다. 하지만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혈색도 좋아졌다. 예전이 당장 육수를 뽑아도 될 병약 멸치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럭저럭 사람처럼 봐줄 정도는 된 듯했다.
‘이 정도면 딱 건강한 슬림 체형이지, 뭐. 안 그런가.’
그는 몸을 휘휘 돌리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문득, 거울 속의 자신과 시선이 마주쳤다.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제국의 병약한 황태자. 원래대로였다면 진즉 병으로 죽어야 했을 무력한 청년. 진짜 네 영혼은 어떻게 된 걸까. 그리고 이한. 서울에 남겨져 있을 내 진짜 몸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그때 난 양화대교에서 죽은 것인가.
아니면…….
‘모르겠다.’
아무리 짐작해도 알아낼 수가 없는 답이었다. 라키엘은 잠깐 떠오른 복잡한 상념을 훌훌 털어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의 마주한 일에 집중하였다.
‘실수하지 말자. 시성식장에서 버벅거리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하자. 그리고…… 이번 일로 별궁 한의원 로비에 내걸 새 광고 내용이나 떠올려 봐야지.’
무려 신성교단 오피셜(?) 성인으로 시성되게 생겼다. 당연히 한의원 광고로 써먹어야 한다. 아예 사골육수에 단물까지 다 빠지도록 써먹어야지. 별궁 한의원을 더 키워야지. 그러면 보너스 수명도 더 쉽게 많이 얻어낼 수 있을 거니까.
‘그래야 데미안 녀석도 더 잘 보살필 여유가 생길 거고.’
그러고 보면 크라노스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제법 되었다. 마계왕도 그동안 계속 잠잠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아니. 절대로.’
여전히 기회를 노리며 도사리고 있을 테지. 언제든 데미안에게 불치병을 일으킬 수 있다. 하니 내가 여유를 갖고 있어야 한다. 보너스 수명을 많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마계왕 각성을 저지하기 위한 데미안의 치료에 전념하는 동안 보너스 수명이 수급되지 않아도, 내 수명이 깎여도 버텨낼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예를 들자면 전격적인 퇴사를 감행해서 반 년쯤 월급이 들어오지 않아도 버틸 수 있을 만큼 통장을 빵빵하게 채워두듯이 말이야.’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내내 별궁 한의원의 새 홍보문구를 궁리했다. 그동안 주위의 시종과 시녀들이 내내 분주했다. 이쪽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칼과 손톱을 나노 단위로 다듬을 기세로 손질해 주었다.
그리고 마차에 올랐다. 황궁을 출발했다. 다각다각, 행사를 앞두고 뛰는 심장과 같은 리듬으로 울리는 발굽 소리의 끝자락에서 광장에 도착했다. 이미 자리를 가득 채운 인파. 붉은 카펫. 드높은 단상.
단상 위까지 어떻게 걸어 올랐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두근두근, 쿵쿵 뛰는 심장박동 속에서 어어 하다 보니 안내를 따라 단상 위에 올라서 있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
이쪽을 향해 예를 표하는 새하얀 법복의 교황. 건너편으로는 황제도 보였다. 수많은 황족과 고위 귀족, 성직자들의 도열한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황제는 아예 감격해서 울 기세였다. 겉으로는 여전히 근엄한 표정이지만, 눈꼬리가 연신 파르르 떨리는 걸로 보아 확실했다.
그만큼 이쪽의 가슴도 떨렸다.
살면서 이런 행사의 주인공이 되어 만인의 환호와 축하를 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예를 들자면, 심지어는 한때 대립했던 앙부아즈의 반란자 쟈빌론마저 행사장 귀빈석 가장 앞줄에 자리를 잡고서 우아하게 박수를 보내 주는 이런 날이 올 줄은 말이ㄷ…….
‘어?’
찬물이 확.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알을 이태리 타월로 벅벅 닦아내는 심정으로 방금 스치듯 보았던 쪽을 다시금 확인했다.
덕분에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귀빈석 제일 앞줄. 그중에서도 중앙. 그곳에 너무나 익숙한, 그런데 여기선 절대로 마주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얼굴이 있었다.
앙부아즈의 냉혹한 반란자.
거구의 소드마스터.
끝내 몰락하여 마법 실험실로 끌려갔던 사내.
‘……쟈빌론?’
그가 너무나 말쑥하고도 깔끔한 정복 차림으로, 더없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우아한 격식을 선보이며, 자리에 완벽하게 스며들어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댁이 왜…… 여기서 나와?’
번쩍, 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