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73화 (273/468)

273화. 잘못된 만남 (3)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앙부아즈의 반란자.

몰락한 거구의 야심가.

쟈빌론은 고개를 들며 문득 생각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성인으로 추성되는 시성식장. 자신은 어찌하여 이런 장소의 귀빈으로서 제일 앞열에 앉아 있게 된 걸까.

답은 어렵지 않았다.

‘리한 군의관…… 당신 때문이지.’

얼마 전 황도 인근의 어느 이름 없는 협곡에서였던가. 마침내 리한 군의관과 해후했다. 더없이 기뻤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리한 군의관을 드디어 만났으니까. 자신만의 주치의로 곁에 둘 수 있게 되었으니까. 다시 두통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여 곧바로 치료부터 명했다. 리한 군의관도 선뜻 응해 주었다. 오랜만에 받던 머리 쓰다듬. 내 손은 약손 구성진 노랫가락.

그런데 이상했다.

두통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분명 리한 군의관의 쓰다듬을 받으면 두통이 없어져야 하는 법인데, 도통 그렇지가 못했다. 어째서 그런 걸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혹은, 그 사이에 리한 군의관의 실력이 녹슬어 버린 걸까.

의아함과 의구심을 담아 엄격하게 물었다. 왜 이런 거냐고. 어째서 치료 효과가 없어진 거냐고.

그랬더니 리한 군의관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하였던가.

- 이게 전부…… 마젠타노의 황태자 때문입니다!

……라고 말이다.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한데 리한 군의관이 거의 울 것 같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나쁜 짓을 저질렀단다. 그 나쁜 짓으로 자신의 치료 능력을 없애 버렸단다. 그러니 황태자를 잡아와야 한단다.

어째서?

- 그래야 제 능력이 돌아올 테니까 말입니다.

……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리한 군의관이 간절한 부탁을 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를 납치해 달라고. 그러면 자신의 능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마침 조만간 황태자가 성인으로 시성되는 행사가 열릴 테니, 그곳에서 황태자를 납치하면 될 것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부탁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도 아닌, 리한 군의관의 부탁이었다. 게다가 황태자를 납치해야 리한 군의관이 능력을 되찾을 수 있다니, 더더욱 반드시 들어 주어야 할 부탁이 아니겠는가.

하여 이곳에 왔다.

황태자를 납치하기 위하여.

“후우…….”

쟈빌론은 다시금 치미는 끔찍한 두통을 정신력으로 버텨내며, 황태자를 성공적으로 납치하기 위한 타이밍을 재기 시작하였다.

‘저놈은 어떻게…… 저럴 수 있던 걸까.’

혈염의 흑마법사.

인간이면서 뱀파이어 권속을 만들고, 부리는 자.

아난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먼 곳으로 눈길을 던졌다. 시성식 행사가 열리는 대광장 외곽에 겨우 자리를 잡은 자신과 달리, 뻔뻔하게도 성공적으로 귀빈석 제일 앞줄까지 간 쟈빌론의 뒤통수를 향해서.

새삼스러운 감탄이 다시 나왔다.

‘저놈, 저렇듯 태연하게 저기까지 침투에 성공할 줄이야.’

얼마 전에 간신히 성공한 정신지배, 그 마법으로 부리게 된 쟈빌론이었다. 황도 인근의 어느 이름 없는 협곡에서였던가. 거의 죽기 직전까지 내몰린 상태에서 가까스로 놈의 정신을 장악했다. 자신을 리한 군의관으로 속인 덕분이었다.

그 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놈이 자신에게 가장 바라는 일이 두통의 치료라는 것쯤은 눈치로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심리를 이용했다. 황태자를 납치해 달라고 부추겼다. 성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쟈빌론이 이 정도의 능력을 보이리라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다.

“…….”

그저 시성식장 언저리에서 서성거릴 줄 알았는데. 그 압도적인 무력으로 시성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돌파를 감행할 줄 알았는데. 자신의 아지트에 쳐들어왔던 때처럼. 다짜고짜 달려들던 때처럼 말이다.

그런데 쟈빌론이 실제로 행한 일은 전혀 달랐다.

압도적인 무력?

그것만 내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발톱을 숨기는 쪽을 택했다.

시성식장에서 황태자를 납치해 달라는 부탁을 수락하자마자, 쟈빌론은 대뜸 돈부터 달라고 했다. 무슨 돈? 설마 강탈? 이유를 들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 리한 군의관? 납치를 실행할 장소가 시성식장이라 하지 않았소? 그러니 무력으로 뚫는 것은 불가능하오. 제국 황실이 보유한 다수의 소드마스터와 성기사가 빈틈없이 배치될 거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이려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습적으로 황태자를 덮쳐야 할 것이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지는 말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 그걸 위하여 위장을 해야 하오. 하니 돈을 주시오. 되도록 많은 돈을. 가장 비싼 옷을 살 수 있는 돈을 말이오.

……하여 주었다.

그리고 관찰했다.

자신에게서 나름 거금의 용돈(?)을 받아간 쟈빌론이 그 돈으로 비싼 옷을 사서 무슨 짓을 할 것인가. 그쯤 되니 궁금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쟈빌론은 폭풍 쇼핑(?)을 시작했다.

공중목욕탕에서 깨끗이 씻고, 이발소에서 헤어를 정돈하고, 그 상태에서 황도 명품가 거리로 직행했다. 가장 비싼 옷들? 단순히 비싼 옷만 선택하지 않았다.

- 흠, 이 디자이너의 이름은…… 생각이 나는군. 이런 스타일은 나와 맞지 않았으니 넘어가고, 다음 숍으로.

……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신중하게 명품숍을 골랐다. 은근히 날카로운 안목과 센스를 매번 드러내면서 말이다.

그걸 보며 비로소 떠올릴 수 있었다.

‘저놈, 분명 앙부아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방계 왕족이라고 했지.’

그러했다.

알고 보면 쟈빌론도 방계일지언정 태생부터 왕족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유하게 자라나 수많은 명품과 고가품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누리고 접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몸에 본능 수준으로 각인된 극도의 예법과 매너 또한 마찬가지였다. 들어가기조차 부담스러운 명품숍에서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매번 자신에게 딱 맞는 스타일의 옷과 물품을 선택했다.

그렇듯 완벽한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시성식장에 왔다. 귀빈석으로 안내를 받는 것도 생각보다 손쉽게 해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차림과 격식이 배어나는 몸짓. 위장신분으로 지방 귀족가의 이름을 대었더니 조금의 의심도 받지 않았다.

덕분에 침투 성공.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 아예 귀빈석 가장 앞줄에 태연하게 앉아 있게 된 쟈빌론의 저 뒤통수란.

“…….”

덕분에 아난샤는 작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설마 진짜로 황태자를 납치하는 데에 성공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 거야.’

성공해서는 안 된다.

자신은 그것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넌 그저 시성식장에서 난동을 부려 주기만 하면 돼. 황태자를 붙잡고 인질극? 그 정도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황태자를 사로잡은 상태에서 이곳을 벗어나 버리면…… 오히려 곤란해지지. 그럼 내가 나설 기회가 없어지니까.’

쟈빌론을 향한 아난샤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저 앙부아즈의 반란자는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 누구의 손에? 자신의 손에. 황태자를 위협하고, 시성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모두를 곤란하게 만든 상황에서…… 극적으로 나설 자신의 손에 죽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사회적 공로가 생기니까. 그 공로를 통해 황제에게 인정을 받고, 자신의 흑마법 지파를 사회적으로 공인된 법적 테두리 안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진짜 거사가 시작되는 거지.’

다른 흑마법 지파들을 차례로 끌어들일 것이다. 제국의 내부에서부터 사회를 좀먹어 들어갈 것이다. 안쪽에서부터 거인을 무너뜨리는 셈이다.

‘그러니 이제 슬슬 움직여. 뜸 들이지 말고.’

차갑게 식은 아난샤의 눈길이 쟈빌론의 뒷모습을 향해 꽂혔다.

그 순간.

쟈빌론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스륵.

귀빈석 제일 앞줄에 앉아 있던 쟈빌론. 미동조차 않고서 기회를 노리던 포식자. 그의 첫 움직임은 지극히 미미하고 사소하였다.

꼿꼿하게 앉은 자세를 슬쩍 고치듯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리를 슬쩍 꿈틀거렸다.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고, 오른 무릎을 굽혀 다리를 조금 당겼다. 오른 뒤꿈치를 지면에서 띄우며 엄지에 체중을 실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30미터 남짓.

귀빈석 앞줄에서 황태자가 서 있는 단상까지 한 번에 도약하기에 완벽한 준비였다.

투확-!

땅을 박찼다.

동시에 품에 쥐고 있던 작은 스크롤을 찢었다. 리한 군의관이 황태자를 납치할 결정적인 순간에 쓰라고 준 마법 스크롤이었다.

부훅!

스크롤을 찢자마자, 그 속에 담긴 1회성 마법이 온몸을 감쌌다. 순간 그의 움직임 속도가 2배로 빨라졌다. 도약과 돌진, 착지까지 모든 동작에 예외가 없었다.

……스팟!

30미터 가량의 멀지 않은 거리. 일반적인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뛰어넘은 실력. 거기에 흑마법사가 작정하고 준비한 2배속 마법까지.

그 세 가지 요소가 폭발적인 시너지를 발휘하였다. 일반적인 모든 경우의 수를 감안하여 짜둔 제국 황실의 보안 계획도, 촘촘하게 배치된 근위대의 방비도, 모두가 순식간에 돌파되었다.

그것은 단상 주위에 배치되었던 2인의 소드마스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

황태자와 가장 가까운 귀빈석.

30미터의 거리.

그 정도라면 어떤 형태의 저격이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2인의 소드마스터였다. 그래서 애초부터 귀빈석과 단상을 거리를 30미터로 잡아두기도 하였던 터였다.

그러나 쟈빌론의 돌격은 그들이 생각하고 대비했던 어떤 형태의 저격보다도 빨랐다. 쟈빌론은 이미 단상에 도착했다. 착지하자마자 손부터 뻗었다. 그곳에 눈을 부릅뜬 황태자, 라키엘이 있었다.

터억!

쟈빌론의 커다란 손아귀가 서슴없이 라키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가히 독수리가 사냥감을 낚아채거나, 방탄조끼단 콘서트 티켓이 0.1초 만에 팔려나가는 것과 능히 견줄 만한 속도였다.

제국 황실의 소드마스터 2인은 그 후에야 가까스로 반응을 하였다.

“……흐읍!”

2인 중에서 먼저 반응한 이는, 황실의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이었다. 그는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검을 뽑았다. 롱소드 검신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화염 같은 격렬한 오러를 토해냈다.

그러나 그런 로베르토 경의 대응 또한, 한발 늦은 것이었다.

……스핏!

황태자를 낚아챈 쟈빌론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단순해 보이지만,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반 발짝 초월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대응속도와 체중 이동이었다. 덕분에 쟈빌론의 한쪽 어깨를 노렸던 로베르토 경의 일격이 간발의 차이로 허공만 베고 말았다.

시성식장의 모두가 눈을 부릅뜬 것은, 그때쯤에 겨우 일어난 일이었다.

“……습격이다!”

누군가가 뒤늦게 외쳤다.

경악에 담긴 눈길을 던졌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황태자는 정체 모를 흉수의 손에 붙잡혀 버린 상황이었다. 뒤늦은 오싹함과 위기감이 시성식장에 자리한 모든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딱 한 사람.

쟈빌론의 손에 붙잡힌 황태자 라키엘만 제외하고서.

스륵…….

모두가 경악하고 놀라는 순간, 오직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라키엘이 손을 움직였다. 사실 그는 이미 이런 상황에 대비(?)하던 터였다.

어떻게?

납치되기 직전, 쟈빌론과 눈이 마주쳤던 덕분이었다. 그의 정체를 누구보다도 일찍 깨달은 덕분이었다.

그래서였다.

주위를 향해 소리쳐 위험을 알릴 틈조차 없이 쟈빌론이 달려들었지만, 대응할 수조차 없이 목덜미를 붙잡히고 말았지만, 그 짧은 순간 사이에 라키엘은 제법 많은 것을 준비할 수 있었다.

예전, 앙부아즈에서 쟈빌론과 대적했던 기억. 그때를 떠올렸다. 쟈빌론이 사용하는 오러소드의 근원이던 고통. 그걸 없애 버리기 위하여 비장의 무기를…….

스르륵.

손을 뻗었다. 쟈빌론의 머리를 챱, 하고 짚었다.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

긴박한 상황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구성진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순간.

“……!”

쟈빌론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흡떠졌다. 동시에 그는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이 손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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