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74화 (274/468)

274화. 약점을 찾아라 (1)

어째서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걸까.

어째서 그립고 벅찬 기분이 드는 걸까.

그래.

이것은 마치 고향에 돌아온 느낌. 혹은 애타게 바라왔던 오아시스에 마침내 도달한 감격, 혹은 환희.

‘이 손맛이야.’

쟈빌론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대신 안구에 힘을 빡 주어 일렁이는 눈길을 들었다. 그러자 보였다. 자신에게 사로잡힌 황태자. 이쪽으로 손길을 뻗고 있는 야윈 안색의 은발 청년이.

“…….”

순간 기억의 혼란이 그를 엄습했다.

황태자?

나쁜놈이다.

어째서?

간단하다.

‘저 모습, 기억나.’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불타는 평원. 갈대밭. 그 속에서 쫓고 쫓기던 기억의 파편들. 그 속에서 맞섰던 순간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이내 엄청나게 거대해진 황태자가 자신을 붙잡고 북어포 두드리듯이 땅바닥에 이리저리 내동댕이를…….

“으윽.”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도 잠시였다.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소온~ 에헤이야↘↗”

사아악……!

괴상한 노랫가락과 함께, 잠깐 치밀던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가히 전설로만 전해지는 생명수만큼이나 즉각적인 효능(?)이었다.

그 상큼한 감각이 쟈빌론에게 또다시 혼란을 안겨주었다.

‘어째서지?’

대체 어째서, 황태자가 리한 군의관의 손맛을 똑같이 내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진짜 리한 군의관은 따로 있는데. 자신이 얼마 전에 찾아냈는데. 마침내 만났는데. 그런데 그 리한 군의관은…….

‘날 치료하지 못했어.’

그러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는 했다. 한데 그 손길이 어쩐지 어설펐다. 노랫가락도 전과 달랐다. 효과는 말할 것도 없이 전무했다. 아무리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도 두통이 전혀 가시지가 않았다.

하여 의심스러웠다. 혹시 리한 군의관이 아닌가? 혹은 너무 오랜만이라 기술이 퇴보했나? 그럼 안 되는데. 쓸모가 없어지는 건데.

의구심이 들어서 추궁했더랬다. 한데 리한 군의관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 그래. 제국의 나쁜 황태자가 치료 능력을 빼앗아갔다고 했지. 그래서 황태자를 납치해야 한다고도 했지. 그런 이유로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고.

“…….”

쟈빌론은 묘한 눈길로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순간 고민이 들었다. 자신의 목적은 두통의 치료니까. 그러니까 능력을 잃은 리한 군의관은 버리고 황태자로 갈아탈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리한 군의관을 버릴 수는 없어!’

자신은 그 정도로 신의가 없는 인물은 아니다. 비록 자신이 좀 막 나가는 경향이 있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 사람들마저 헌신짝처럼 버리는 건 싫다. 그러니 버리지 않는다. 리한 군의관은 나의 것이니까.

“허튼수작은 그만두시오, 제국의 황태자.”

꽈악!

그는 순간적인 유혹(?)을 이겨냈다. 황태자의 목덜미를 더욱 단호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즉각적으로 대꾸했다.

“꾸웳……!”

“…….”

“걻, 긃, 걁, 굵!”

“…….”

아, 너무 세게 쥐었나.

쟈빌론은 자신의 실수를 겸허히 인정하며 손아귀의 힘을 살짝 풀었다. 덕분에 샛노란색, 시뻘건색을 넘어서 파란색 보라색으로 버라이어티한 무지개빛 총천연색을 띠어가던 라키엘의 안색이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컥! 쿠룱! 쿨럭! 켁!”

“이 정도로 엄살 피우지 마시오. 제국의 황태자라면 말이오.”

“쿨룩! 컥, 허억, 헉……! 아이고, 후욱! 훅!”

“…….”

“이봐요, 쟈빌론 씨? 나 못 알아보겠어?”

“뭐?”

“나잖아, 나. 리한 군의관.”

“…….”

“우리, 전에 좀 안 좋은 마무리를 겪긴 했지만 그래도 이럴 사이까진 아니지 않아?”

“…….”

어디서 수작질을.

쟈빌론의 손이 단호하게 움직였다.

“리한 군의관은 따로 있소. 시끄러우니 입 다무시오.”

“헙?”

터업!

“읍읍!”

쟈빌론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입을 통째로 틀어막았다. 라키엘이 힘껏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이게 무슨.’

너무나 황당했다.

자신은 신성교단의 성인으로 시성되고 있었는데. 시성식장에서 만인의 우러름과 박수를 받고 있었는데. 그런데 귀빈석으로 문득 눈길을 던졌다가 쟈빌론을 발견했다. 그것만도 황당한데, 쟈빌론이 대뜸 단상으로 돌격해 와서 자신을 사로잡아 버렸다.

덕분에 때아닌 인질극이 벌어지게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광장을 폐쇄하라!”

“모두 움직이지 마시오!”

시성식장 외곽을 온통 뒤흔드는 근위대 병사들의 외침.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다 억지로 앉혀지는 사람들. 그리고 단상에 올라 대치하고 있는 네 명의 날카로운 눈길까지.

‘키에르사 경과 아이젤 경, 그리고 프란델 경에다가…… 데미안까지.’

라키엘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은 쟈빌론에게 붙잡혀 버렸다.

즉, 인질이 되었다.

그런 이쪽의 쟈빌론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는 이들은 총 넷이었다. 제국 황실이 보유한 소드마스터, 그중의 하나인 키에르사 경. 그리고 신성교단에서 시성식 거행을 위해 파견된 성기사 아이젤 경.

‘나머지 둘은…… 우리 별궁 근위대 지휘관인 프란델 경과…… 데미안.’

그럼 남은 소드마스터는?

슬쩍 눈길을 돌려보니, 로베르토 경이 황제를 호위하며 거리를 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쪽을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황제와도 눈길이 마주쳤다.

저런 눈빛, 본 적이 있는데. 그래. 나 어릴 때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놀다가 물에 빠졌을 때. 그때 달려오던 아버지가 딱 저런 눈빛이셨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주위의 그 누구도 선뜻 이쪽을 건져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파도보다도 무서운 소드마스터가 이쪽을 사로잡아 버린 상황이니까. 인질극을 벌이며 대치하게 되었으니까.

“후우…….”

쟈빌론의 차분해진 숨결이 느껴졌다. 놈은 전혀 흥분하고 있지 않았다. 최악이었다. 더욱 최악인 점은, 놈이 맨손으로 오러소드를 생성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손가락 하나마다 하나씩, 다섯 줄기나.

츠즈즈즈……!

……이건 뭐 가위손도 아니고.

그런데 정말로 비슷했다. 쟈빌론이 앞으로 뻗은 오른손. 그 손가락 하나마다 오러소드가 한 줄기씩 1미터 이상이나 생성되어 있었다. 덕분에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다섯 자루의 오러소드가 현란하게 공간을 헤집었다.

게다가 그중에 엄지를 통해 생성된 한 자루는 이쪽을 목덜미를 겨누고 있기도 했다.

“다들, 다가오지 마시오. 그 순간 황태자의 목이 몸통과 분리될 터이니.”

“……읍읍!”

쟈빌론 씨?

혹시 수전증이 있는 건 아니겠죠?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목덜미 앞에서 이글거리는 오러소드가 살랑살랑 움직이니까 쫄려서 미칠 것 같다. 스치기만 해도 정말로 목이 잘릴 테니까.

덕분에 이쪽과 대치한 데미안과 프란델 경, 키에르사 경들을 향해 다급한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쟈빌론을 자극하지 말라고. 자칫 그랬다가 이 미친놈이 손가락 잘못 움직여서 내 목이 쑹컹 날아갈 것 같다고.

‘이놈, 전에는 두통을 사라지게 하면 오러소드를 구현하기 어려워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달라졌다.

심지어 맨손으로 오러소드를 생성했다!

그 의미는 명확하다.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것.

“…….”

이놈, 반란에 실패한 직후에 앙부아즈 왕가의 마법 실험실로 잡혀갔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렇게 강해진 걸까. 게다가…….

‘앙부아즈 왕실은 대체 이놈을 어떻게 관리했길래 여기까지 와서 날뛰고 있는 거냐고.’

라키엘은 진심을 담아 한탄했다.

동시에 한편으로 깨달았다.

오직 자신만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진맥!’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과거의 쟈빌론보다 훨씬 강해졌다. 게다가 이쪽이 인질로 잡히게 된 상황이라, 데미안이라 해도 당장 어찌할 수가 없게 됐다. 자칫하다간 이쪽이 다칠 테니까.

그러니 직접 해결해야 한다.

한데 가만 보자니, 쟈빌론의 기색이 뭔가 이상한 구석이 보이긴 했다. 뭐랄까. 말투가 예전과 비슷하긴 한데 어딘가 나사가 빠진 느낌? 살짝 어눌한 느낌?

‘분명 뭔가 있어. 날 못 알아보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였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은근슬쩍 손을 뻗었다. 아까처럼 내손약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입이 막혀서 노래를 못 부르니까. 대신 진맥 스킬을 발동하였다.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38세]

[신장 : 193.4 Cm]

[체중 : 87.6 Kg]

[혈액형 : Rh+ AB]

으흠, 나름 고생을 해서 그런가. 전보다 살이 좀 빠지셨구나. 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라키엘은 재빨리 아래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종합 소견 : 지극히 강건한 신체입니다. 대사조절 기능, 면역력 등의 모든 항목에서 최적의 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심각한 수준의 만성 신경성 편두통이 감지됩니다. 또한, 연이은 정신적 충격으로 사고체계의 혼란과 호르몬 불균형 상태가 감지됩니다. 최근 대뇌의 마나와 뉴런 연결 체계에 가해진 인위적인 조작이 감지되며, 이에 따른 심각한 수준의 인지부조화 및 강박증이 포착되었습니다. 장기적이며 체계적인 정서적 치료를 강력히 권장합니다.]

“…….”

이 인간,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야.

확실히 뭔가 있다는 게 느껴졌다. 특히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부분이 확 감지되었다. 라키엘은 오장육부를 향해 물었다.

‘다들, 쟈빌론의 오장육부와 상담 잘 마쳤겠지?’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당신의 오장육부가 쟈빌론의 정신상태에 흥미를 드러냅니다.]

[심장 : 야 이거 너무 뻔한데ㅋㅋㅋㅋㅋㅋㅋ]

[허파 : 허파하하핳ㅎㅎㅎㅎㅎ]

[대장 : 암만 봐도 이 인간, 지금 정신지배 빡쎄게 받고 있지 말입니다?]

[간장 : 그냥 정신지배가 아니라 거의 세뇌 수준인데?]

[위장 : 내 리한 군의관을 리한 군의관이라 부르지 못하고ㅋㅋㅋㅋㅋ]

[콩팥 : 그런데 저런 정신마법은 대체 무슨 원리일까?]

[비장 : 보기 드문 원리?]

[콩팥 : 아하.]

[오장육부 리포트 :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는 강력한 정신지배 마법에 속박되어 있음. 아마도? 아무튼 확실함. 저희 쇤네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구먼유.]

“…….”

정신지배 마법이라.

비로소 알겠다.

쟈빌론 이 인간,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거다. 그럼 조종을 하는 놈은 아마도…….

‘흑마법사 같은데?’

뱀파이어들을 부리던 흑막.

황도에 뱀파이어 변이증을 퍼뜨린 흉수.

딱 그놈부터 떠올랐다. 당연했다. 쟈빌론씩이나 되는 실력자에게 정신지배 마법을 걸려면 최소 그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할 테니까. 그 정도 거물쯤은 되어야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그놈이 최근까지 황도에서 설치기도 했고.

‘그러니까, 쟈빌론으로 하여금 날 이용한 인질극을 하게 만들고, 이런 답이 없는 대치상황에서 자신이 짜잔, 하고 나서며 쟈빌론을 제압하고, 그 사회적 공로를 인정받으시겠다?’

딱 보니까 의도가 훤히 보였다.

동시에 다른 것도 보였다.

바로 기억 속에 자리한, 소설 마검황에서 언급이 나온 적이 있는, 정신지배 마법의 사소하지만 중대한 약점이었다.

‘……빙고.’

그 약점을 떠올린 순간.

라키엘은 보람차게 빵긋 웃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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