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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276화 (276/468)

276화. 콩깍지를 벗겨라 (1)

“저놈이 인질범을 조종하는 진짜 흉수다! 저놈부터 밟아! 아니, 잡아!”

“……!”

안심하고 있었다.

탄로 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아난샤는 그렇게만 굳게 믿고 있었더랬다. 정신지배 마법은 겉으로 결코 드러나지 않으니까. 조종당하는 대상과 조종하는 마법사 사이의 연결을 알아챌 방법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그나마 유일한 방법이…… 공유된 감각을 통해서 연결된 조종자를 찾는 방법이긴 한데…… 그걸 바로 짚어냈다고? 저 황태자가?’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믿기지가 않았다. 여전히 웅웅거리는 왼쪽 귀. 멍했다. 황태자가 왁 내질렀던 외마디 소리의 잔향이 여전히 남아서 고막을 잡아 늘이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대체 어떻게 정신지배 마법을 알아차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각의 공유?

그 전에 정신지배 마법을 짚어내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 뛰어난 마법사라도 그걸 감지하기 어려운데. 황태자가 마법을 익혔다는 등의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짐작이 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주위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이?’

‘흉수라고?’

‘정신지배? 그게 무슨 소리야?’

주변의 근위병들이 멈칫했다. 갑작스러운 황태자 납치 인질극. 그 초유의 사태가 불러온 충격과 군중의 혼란을 수습하려 애쓰던 근위병들이었다. 현장의 그 누구도 광장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다급히 통제를 하던 와중이었다.

그렇기에 근위병 중에 누구도 라키엘의 외침에 담긴 뜻을 선뜻 알아내지 못하였다. 다들 서로를 돌아보며 의아한 눈빛을 나누었다. 긴가민가했다.

그런 사정은 단상 위에서 쟈빌론과 대치하던 이들도 비슷하였다. 별궁 경비 책임자인 프란델 경도, 황가의 소드마스터인 키에르사 경도, 황제를 긴급히 보호하던 근위대장도, 교단의 성기사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라키엘이 너무나 갑작스레 외친 탓에, 뜻밖의 생뚱맞은 이를 지목한 탓에, 각자 그 뜻을 나름으로 해석하느라 멈칫하였다.

만약, 현장에서 유일하게 라키엘의 뜻을 즉각적으로 알아들은 데미안이 아니었다면, 흑마법사가 탈출에 성공했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타앗!

라키엘의 외침이 끝나자마자였다.

데미안이 가장 먼저 단상을 박찼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사이, 오직 그만이 홀로 몸을 날렸다. 그는 라키엘의 외침을 듣자마자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놈이다.’

끓어오르는 집중력. 그 속에서 확장되는 시야. 중심에 포착되는 한 남자. 하얀 셔츠에 푸른 망토. 흠칫하며 단상을 바라보는 표정. 저 사내다. 저자가 황태자의 지목을 받은 흉수다.

어째서 저 남자가 흉수라는 걸까.

정확한 근거가 있는 걸까.

라는 따위의 의문은 조금도 품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가 지목했으니까. 전하는 틀린 적이 없으니까. 무조건 따른다.

‘단지 그뿐.’

파아앗!

허공에 몸을 날렸다. 혼란에 빠진 시성식장의 바람이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중력의 힘이 전신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마침 보이는 적당한 재도약 지점. 체중을 적절히 이동시키고, 전신의 균형을 가다듬으며, 밟았다.

타닷!

어느 귀빈의 어깨를 가볍게 박찼다. 너무나 절묘한 충격의 분산. 덕분에 데미안에게 짓밟힌(?) 귀빈은 거의 충격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저 작은 참새 한 마리가 어깻죽지를 짚고 날아가는 정도의 지극을 느꼈을 뿐.

그사이, 이미 데미안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귀빈의 어깨를 밟고서 드넓은 시성식장의 허공을 훌쩍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착륙 지점을 향해 서늘한 눈빛을 품었다. 그곳에 푸른 망토의 사내가 있었다. 목표. 황태자가 지목한 흉수였다.

……철걱!

엄지로 검집 고리를 밀었다. 풀려나는 고삐. 드러나는 맹수의 송곳니. 번득임과 함께 검신이 예기를 드러냈다. 그대로 당겨 뽑았다. 뽑는 동시에 밀었다. 허공을 가르고, 공간을 저며냈다. 그 끝에 목표가 있었다.

“……!”

데미안의 목표로 딱 걸린 아난샤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너무나 빠른 돌격이었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경이로운 속도. 지난번에 충돌했던 저 괴물 소드마스터 쟈빌론?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가슴이 철렁. 동시에 깨달았다. 당황할 틈도, 경악할 여유도 없다. 곧바로 반응하지 못하면?

‘……죽는다!’

깨달음과 동시에 아난샤의 두 손이 움직였다. 그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타인의 피를 제물로 삼아 200년 이상을 살아온 이였다. 나름의 기나긴 생애를 통하여 갖가지 비술과 비전을 섭렵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중의 한 가지 비술이 그의 생존을 도와주었다.

‘흡!’

눈을 부릅떴다. 두 번 빠르게 깜빡였다. 깜빡임의 사이에 염원을 담았다. 눈꺼풀에 달린 속눈썹, 그 자그마한 가닥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더욱 자그마한 공기의 흐름. 그 속에 조절된 마나의 흐름을 실었다.

손으로 수인을 맺지 않고도 사소한 규모의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깃털 타래의 비술’이었다.

츠즛!

두 번의 깜빡임과 마나의 흐름이 재빠르게 완성되는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 순식간에 전신이 아래로 푹 꺼졌다. 마치 지면을 수면으로 삼아 잠수를 하듯,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깃들어 사라졌다.

동시에 데미안의 검 끝이 쇄도했다. 아난샤의 머리칼 두 가닥을 베어냈다. 허무하게 흩날리는 두 가닥. 하지만 데미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상대가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지만, 그래서 목표를 놓쳤지만, 여전히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너무나 태연하게 착지를 하고, 몸을 반 바퀴 돌렸다. 다시 지면을 박찼다. 흠칫하는 귀빈들의 틈바구니를 자연스럽게 헤치며 돌격했다. 6미터 떨어진 지점. 그곳의 깃발 그림자 속에서 솟구치는 아난샤를 향하여.

스릉!

“……!”

그림자 밖으로 몸을 꺼내자마자 자신을 맞이하며 달려드는 검격!

아난샤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어떻게?’

자신이 방금 시전한 ‘그림자 걷기’의 마법은 말 그대로 그림자 속에 일순간 몸을 숨기고, 일정 거리의 동떨어진 다른 그림자로 공간이동을 하는 마법이었다. 기척? 당연히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추적 또한 불가능하다.

그런데…… 황태자의 흑발 호위가 그걸 해내고 있다!

‘미친!’

까드득!

이건 못 피한다. 아난샤는 깨달은 즉시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눈 깜빡임을 통한 그림자 걷기의 마법은 이미 써 버렸다. 피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남은 방법은 막거나 흘려내는 것뿐!

‘네 검에 찔려 죽게 해주마!’

파츠즈!

아난샤의 두 손이 벌어졌다. 일정 거리를 두고서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며 원을 그렸다. 왜곡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소규모의 포털이 공간을 점령하며 비틀었다.

그 직후, 데미안의 검이 찔러져 들어갔다. 포털이 검 끝을 집어삼켰다. 동시에 데미안의 등 뒤쪽에 또 다른 소규모 포털이 생성되었다. 그곳을 통해 검 끝이 튀어나왔다. 데미안이 내뻗어서 포털로 들어갔던 검이 오히려 데미안의 등을 노리며 찔러져 들어왔다.

‘됐다!’

아난샤의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빠르게 찌른 검격일수록 반대편 포털로 빠르게 나오는 법. 그만큼 피해내기가 어려워지는 법.

……이 그가 지닌 상식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그러했는데…….

스륵!

데미안의 몸이 기이할 정도의 반응 속도로 움직였다. 너무나 빠르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느릿하게 보이는 움직임. 그의 등 뒤를 찔러오던 검이 허무할 정도로 빗나갔다.

그 순간, 데미안이 아예 검을 놓아 버렸다. 찌르던 기세 그대로. 검 자체가 포털 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그리고 데미안의 등 뒤쪽 포털에서 튀어나와 통째로 유성처럼 날아왔다. 다시 포털 속으로 들어갔다. 뒤쪽의 포털로 튀어나왔다.

두 포털 사이를 무한 루프로 찌르며 오가는 롱소드!

덕분에 아난샤는 깨달았다.

‘……!’

포털이 만들어낸 루프에 묶였다.

자신의 꾀에 자신이 걸려들었다.

‘이제…… 포털을 없앨 수가 없게 됐어?’

그러했다.

포털을 없애는 즉시 검이 통째로 날아올 것이다. 유성보다 빠른 속도로 쇄도하여 올 것이다. 그걸 피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그렇다고 포털을 유지한 채로 움직이면? 포털도 자신을 따라온다. 두 손으로 생성했으니까. 포털만 남겨두고 몸만 빠져나갈 수가 없다. 즉, 두 개의 포털 속에서 무한 루프를 그리며 날아들게 된 롱소드 또한 자신을 계속 따라올 것이라는 뜻이다.

……꿀꺽.

깨달음의 끝에서 마른침이 목구멍을 긁었다. 하지만 그 마른침을 채 삼키기도 전에, 검을 버린 데미안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퍼억!

“……!”

명치를 파고드는 강렬한 주먹!

입이 쩍 벌어졌다. 숨이 콱 막히며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삼키려던 마른침만 역류하여 입 밖으로 튀어나왔을 뿐.

“……힙, 끅! 허…… 흑!”

단 일격에 허리가 굽혀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지면이 일렁거리며 노랗게 보였다. 포털 마법을 유지하던 두 손이 풀렸다. 포털이 사라졌다. 그 속에서 무한 루프를 그리던 롱소드가 화살처럼 날아왔다.

“……!”

죽는다.

가까스로 들어 올린 고개. 절망적인 예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터억!

롱소드가 눈앞에서 멈추었다. 대신, 검 손잡이를 낚아채듯 움켜쥔 흑발 호위의 서늘한 눈길이 안면에 꽂혀 왔다.

“움직이면 벤다.”

“…….”

나, 생포된 건가.

아난샤는 숨 막히는 복부의 통증 속에서 깨달았다.

‘무슨…… 이런 괴물이…….’

황태자가 자신을 지목하며 외친 뒤로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은 고작 10초 미만. 그는 눈앞의 흑발 호위가 쟈빌론을 뛰어넘는 미증유의 실력자라는 것을 뒤늦게야 절감하였다.

동시에 쟈빌론 또한 가슴이 철렁했다.

“……리한 군의과안-!”

애타게 외쳤다.

품속의 황태자가 갑작스럽게 리한 군의관을 지목해서. 흑발 호위가 리한 군의관을 괴롭히고 사로잡아서. 그 과정이 너무나 전광석화 같았기에, 미처 도우러 달려갈 틈조차 없었다.

“안 돼, 이놈들! 리한 군의관을!”

절로 다급해졌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리한 군의관을 얼마나 찾아 헤맸던가. 그 얼마나 많은 고난과 인내 끝에 다시 만난 리한 군의관이던가. 한데 그를 여기서 잃는다면? 끔찍했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사로잡은 황태자 따위, 내버리고 당장에라도 리한 군의관을 구하러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걸 허락해 주지 않았다.

“허허? 리한 군의관? 저 흉수의 정체가 리한 군의관인 것이야?”

“……!”

품속에서 들려오는 음흉한 목소리. 고개를 내려보니, 황태자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더없이 야비한 목소리로 잔혹한 말을 던져왔다.

“그럼 쟈빌론 씨?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이제부턴 나 건드리면, 저 리한 군의관이 죽는다?”

“……!”

삽시간에 완성(?)된 인질 협박 역전 세계! 라키엘의 선을 부수는 역제안에 쟈빌론의 눈동자가 쾌지나 칭칭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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