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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282화 (282/468)

282화. 맛있는 건 일단 호로록 (2)

푸욱!

크고 아름다운(?) 가시가 아난샤의 야들야들한 머리 살갗을 파고들었다. 부위는 두유혈(頭維穴). 위치는 이마 모서리의 머리카락 경계선(anterior hairline)에서 바로 위 0.5촌 지점, 앞정중선에서 가쪽으로 4.5촌.

‘자고로 스트레스성 두통에는 이게 직빵이거든!’

그러하다.

두유혈은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의 수혈(腧穴)로써, 머리의 건강을 보호해 주는 주요 혈이다. 특히, 현대인이 흔히 시달리는 스트레스성, 신경성에 의한 공능성두통(功能性頭痛)에 직빵이다.

‘보통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교감신경이 긴 시간 과도한 흥분상태에 놓이게 되고, 혈관이 수축되고, 혈압은 올라가고, 그 결과 머리 쪽의 혈류량과 산소 공급량이 부족해지면서 머리가 살살 무겁고 아파지는 거거든.’

그런데 두유혈에 적절한 시침 등의 자극을 가하면? 이게 뚫린다. 머리 쪽의 혈행이 개선되고, 뇌신경에 적절한 안정 효과를 불러온다. 솔직히 침술까지도 필요 없다. 머리가 무겁고 아프다 싶을 때는 엄지로 꾹꾹 눌러 주기만 해도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으니까.

그건 지금, 눈앞의 흑마법사 놈도 마찬가지였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가 내 아스라한 심법의 흡수를 막고 있었어. 마치 자물쇠가 채워진 것처럼. 근데 그 자물쇠가…… 이놈의 두통이랑 연결이 되어 있네?’

그러했다.

문득,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흑마법사가 데미안에게 제압되었을 때는 모든 일이 다 마무리가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안심이었다.

갑자기 어느 순간, 흑마법사에게서 기이하고도 강렬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기이한 마나의 격류였다. 그걸 느끼자마자 경혈 스캐닝부터 후다닥 켰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흑마법사의 심장에서 실체를 드러낸 엄청난 고밀도의 마나 덩어리. 그 덩어리가 녹아서 전신으로 퍼지려는 모습을.

보자마자 눈이 돌아갔다.

선명한 직감이 빡 들었다.

저건…… 절대로 놓쳐선 안 된다고.

‘당연하지. 이런 고밀도의 마나 덩어리는 드래곤하트를 제외하고는 본 적도 없으니까.’

탐스러웠다. 몸에 좋아 보였다. 남 주기엔 아까웠다. 특히 흑마법사가 그걸 써먹는 꼴은 절대로 못 보겠다. 그러면 일단 내가 먹고 보자. 몸에 좋다는 걸 보면 눈이 돌아가는 한국인의 고유한 종특(?)이 발휘되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바람처럼 호다닥 달려왔다. 손부터 뻗었다. 흑마법사 놈의 이마를 짚어보니 과연, 특수하고도 막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속으로 빙고를 외치며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고, 흡수력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저항에 가로막혔다.

마치 수십 개의 자물쇠가 채워진 듯한 반응이 아스라한 심법을 방해했다. 때문에 흡수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당황하지는 않았다. 경혈 스캐닝 덕분에 자물쇠의 실체를 또렷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마법적인 금제가 보였다. 한데 강력한 금제가 흑마법사의 교감신경, 머리 쪽 신경과 강하게 얽혀 있었다.

‘아하.’

보자마자 깨달았다.

이놈이 걸어둔 금제가 발동하면, 두통이 함께 생겨나는 거구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닌 듯하고, 어찌어찌 금제를 만들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렇게 설계가 된 듯한데.

‘그럼…… 역으로 두통을 풀어주면 금제도 같이 풀린다는 거네?’

그 사실을 파악한 순간, 가시를 빼들었다. 다짜고짜 두유혈부터 냅다 찔렀다. 효과는 직빵(?)이었다.

“……허억?”

경악으로 크게 벌어지는 아난샤의 두 눈! 카드값 털리는 은행계좌처럼 호롤로로 무장해제 당하는 마법 금제!

두통이 가시며 금제가 싹 사라졌다. 마침내 아스라한 심법이 발휘하는 흡수의 기세가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과 접촉했다. 흡수를 시도했다. 끌어당겼다. 정혈이 아난샤의 전신으로 퍼지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타이밍 좋고!’

라키엘은 빵긋 웃었다. 만약에 정혈이 흑마법사의 전신으로 다 퍼진 뒤였다면 흡수가 어려워졌을 텐데, 간발의 차이로 세이프. 다행히 늦지 않았다. 역시나 만사 다 제치고 호다닥 달려오길 잘했다.

‘인생은 타이밍, 선착순이거든!’

역시나 그러한 법이다.

모두의 기대를 받는 인기 영화가 개봉될 때는 영화관 예약 어플을 미리 켜두고서 대기를 타야 한다. 그래야 개봉 첫날의 용아맥 명당이라 불리는 자리를 쟁취할 수 있다. 그건 말 그대로 0.1초 차이의 진검승부다.

그뿐일까.

동네 마트에서 시식 코너가 열리는 순간 또한 그렇다. 수많은 눈치싸움과 약간의 행운 끝에 1타로 시식 코너에 당도하는 자가 가장 크고 탐스러운 과일 조각을 선택하여 공짜로 집어먹을 수 있는 법!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늦지 않았고. 시침으로 금제도 딱 풀었고. 아스라한 심법도 팍팍 돌아가고. 그러니까 이제부터 이 마나 덩어리는 제 것입니다?’

슈우우우욱!

한층 노골적으로 맹렬해지는 흡수의 기세!

물론 1단계의 난관인 금제를 풀었다고 흡수가 마냥 원활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1단계보다 훨씬 강력한 2단계의 난관이 남아 있었다.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이 가하는 시험이었다.

정혈은 단순한 마나 덩어리가 아닌, 자아를 지닌 존재. 그렇기에 감히 자신을 품으려는 자의 자격을 혹독하게 시험했다. 때문에 고위 흑마법사인 아난샤조차도 한때 죽음을 각오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장육부가 때맞추어 나서 준 덕분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이 내리는 면접시험에 호다닥 참가합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이 시험을 내립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이 다음 주관식 문항에 대한 정답을 요구합니다.]

[Q : 해파리의 몸은 98%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생명체를 ‘물’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제를 받은 오장육부가 정답을 고민합니다.]

[심장 : 으음, 이 경우엔 아무래도…… 98%를 제외한 나머지가 뭐로 이루어져 있느냐에 따라 달린 거겠지? 그럼 나머지 2%는 뭘까?]

[허파 : 긍지?]

[Q : ……낭만 합격.]

딩동댕!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이 허파의 대답에 매우 만족합니다.]

[(경) 당신은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소유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축)]

[아스라한 심법이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과 접촉하였습니다.]

[본격적인 흡수를 시행합니다!]

슈우우욱…… 호롤로롤롭!

“……!”

아난샤의 동공이 경악을 싣고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흔들렸다.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의문이 들었다. 당하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차라리 고약한 악몽이면 좋겠는데. 만약 이게 소설이라면, 이따위 글 뭉텅이를 쓴 놈의 멱살이라도 잡아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현실은 잔혹했다.

스승의 유지를 저버리면서까지 품었던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 그 후로 200년간 애지중지 품었던 비장의 무기가 황태자에게 너무나 쉽게 날름 넘어가고 있었다!

“아, 안 돼!”

“응, 돼.”

“……!”

비로소 아난샤는 깨달았다.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대로는 다 빼앗길 판국이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

‘정혈이 몸 구석까지 퍼지도록 기다릴 틈이 없어.’

확실했다.

그거 기다리다간? 남는 정혈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전에 황태자에게 모조리 흡수당할 테니까.

‘그것만은 절대로…….’

막아야 한다.

그는 결심했다.

아직 흡수당하지 않은 나머지 정혈이라도 지키자고. 당장 정혈을 변이시켜서 일깨워 버리자고. 그 속에 깃든 힘을 개방하자고. 각오를 품는 순간.

두근!

그가 눈을 부릅떴다.

아직 황태자에게 빼앗기지 않은 나머지 정혈이 그의 몸속에서 순식간에 변이하기 시작하였다. 거침없는 각성의 단계가 진행되었다. 신체의 모든 혈액을 오염시켰다. 타락한 마나의 물결이 세포를 휘감았다. 미토콘드리아가 미쳐 날뛰고, 동공이 붉게 확장되었다.

동시에 강렬한 기파가 그의 전신에서 터져 나왔다.

파핫!

“컷?”

라키엘도 눈을 부릅떴다.

이것은 순식간에 강풍 모드 선풍기 100대를 얼굴 앞에 켜 버린 것과 같은 압력! 뱀파이어의 정혈을 신나게 흡수하는 데에만 집중하던 라키엘은 하마터면 기파에 휩쓸려 뒤로 넘어질 뻔했다. 아니, 아예 날려갈 뻔했다.

데미안이 때마침 손을 뻗어 등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몇 미터쯤은 거뜬히 날려가 한두 군데는 부러졌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터억!

“괜찮으십니까, 전하?”

“어? 어, 응.”

“방금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그, 그랬지?”

“예. 확실히요.”

“그래도 다행이네. 네가 잡아줘서.”

“말씀대로 그 점은 다행인 듯하지만…… 저건 다행과는 거리가 조금 있을 듯합니다만.”

“……어. 동의.”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어나는 흙먼지 속을 노려보았다. 아난샤가 있던 곳. 터져 나온 기파의 중심. 그곳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의 마나가 대량으로 폭주하고 있었다. 자신이 미처 흡수하지 못한, 아난샤에게 남은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이었다.

‘저러기 전에 다 삼켰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대략 계산해보면 자신이 흡수한 분량은 전체의 30% 남짓. 나머지 70%가 아난샤에게 남아서 말 그대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쯧.’

라키엘은 내심 혀를 찼다.

사실은 저럴 것 같아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왔던 터였다.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이 탐나 보인 것도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강렬한 위기감 또한 느꼈던 터였다. 하여 달려왔고, 사욕을 채울 겸 흑마법사의 위험한 시도를 차단하려 시도했다.

그런데 다 막지 못했다.

하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츠즈즈즛!

별안간 대광장 상공에 다수의 핏빛 마법진이 열렸다. 개방된 마법진 너머의 공간이 슬쩍 엿보였다. 어떤 곳은 밤이었고, 어떤 곳은 노을이 지는 해변이었으며, 또 어떤 곳은 울창한 삼림 한가운데였다.

그리고 그 모든 곳에서…… 수없이 새까만 형체가 날아왔다. 무리를 이루어서. 아예 ‘군체’라고 불릴 어마어마한 규모로. 날개는 달렸으되 깃털은 없으며, 벌어진 입은 부리가 아닌 송곳니 비죽한 아가리인 짐승.

물경 수십만 마리의 박쥐 군체였다.

퍼더더더더덕-!

마법진을 닫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엄청난 규모의 박쥐 떼가 마법진을 건너왔다. 프론테라 대광장 상공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태양이 사라졌다. 구름이 가려졌다. 사위가 삽시간에 그믐밤처럼 캄캄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오래된 혈염의 계약으로 명하노니!”

아난샤의 외침이 울렸다.

웅크린 흑마법사로부터 핏빛 기류가 솟구쳤다. 상공을 뒤덮은 박쥐 군체에게 혈염의 저주가 옮아갔다. 순식간에 번지는 전염병처럼, 군체가 혈염의 저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내리꽂혔다.

콰학-!

저주로 물든 박쥐 군체가 아난샤를 뒤덮었다. 감싸고 뭉쳤다. 빈틈없이. 막대한 덩어리로. 솟구치고 꿈틀거렸다. 뚜렷한 형체를 이루어갔다.

그것은 기이한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지옥의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왔을 법한 외양. 50미터가 넘는 덩치의, 다섯 자락 뱀의 머리와 수천 쌍의 안구로 포효하며 피를 탐닉하는 저주받은 혈염의 짐승, ‘노스페라투(Nosferatu)’였다.

- 쿼어어어어!

노스페라투로 화한 아난샤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던 암담함은 이제 사라졌다. 대신 그 빈자리를 난폭한 자신감이 채웠다. 또한, 그는 새로운 힘에 취하면서도 한편으로 놀랐다.

‘뭐지? 내가…… 자아를 잃지 않았어?’

뜻밖이었다.

원래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일깨워 혈염의 짐승, 노스페라투로 화하면 자아를 잃게 된다. 그것이 선대 스승들의 가르침이자 경고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신이 더없이 맑고 멀쩡했다. 평소와 똑같았다. 의아해졌다. 어째서?

그는 곧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황태자.’

광장에 가득한 개미떼 같은 인간들. 그 사이에 서 있는 황태자가 보였다.

저놈 덕분이다.

황태자가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흡수한 까닭이다. 그 덕분에 1/3에 가까운 정혈을 빼앗겼고, 남은 정혈이 그만큼 약해졌다. 자신이 자아를 지켜낼 정도로 말이다.

‘하. 이걸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가.’

원래라면 정혈의 힘에 압도되어 최소 10년은 자아를 잃는 신세가 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게 됐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자 전화위복이었다.

‘덕분에 나는 온전하고도 또렷한 정신으로 네놈들을 참살할 수 있겠구나.’

기뻤다.

기꺼웠다.

그는 환호하며 다섯 자락 뱀 머리를 들었다. 혈염의 짐승, 노스페라투로서의 힘을 마음껏 휘두르리라 다짐하며 우뚝 섰다. 아니, 우뚝 서려 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가 않았다?

‘어? 왜 이러지?’

이상했다.

선대 스승들의 기록에 따르자면, 노스페라투는 다섯 개의 머리와 긴 다리로 먹구름처럼 질주하며 사방에 피바람을 일으키는, 멸망적 존재라 하였다. 그러니 절대로 함부로 일깨우면 안 된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왜…….

‘일어나지지가 않지? 어째서?’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자신의 다리를 확인한 순간.

‘……어?’

저도 모르게 멈칫.

그제야 아난샤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왜 다리가…… 이 모양인 것이야?’

그가 수천 쌍의 눈동자로 확인한 자신의 하체. 원래는 다리가 달려 있어야 할 부위.

그곳에는 웅장하고 거대한 몸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저 잘 익은 ‘뾰루지’라고 불러야 할 법한, 실로 짧고 볼품없는 돌기만이 달랑 달려 있었다.

라키엘에게 정혈의 1/3을 빼앗겨서 발생한, 심각하고도 중대한 부작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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