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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283화 (283/468)

283화. 혈염의 짐승 (1)

“저건…… 무슨…….”

황제 아스테리온.

그는 일찌감치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제국의 황도 마젠타. 만인이 모인 광장. 이곳에서 거행되던 시성식. 그걸 통해 우러름을 받게 될 자신의 아들, 황태자.

얼마나 설렜던가.

그 얼마나 기뻤던가.

하루를 일 년처럼 지냈던 요즘이었다. 그만큼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황제였다. 지난밤엔 도저히 잠조차 이루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황제는 턱 근육을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눈길을 던진 곳. 그곳에 처음으로 보는 거대하고도 불가사의한 괴수가 있었다.

허공에 열린 마법진. 그걸 통해 건너온 수십만 마리의 박쥐. 그 군체로 이루어진, 다섯 줄기 뱀의 머리를 휘두르는 괴수는 그야말로 가장 끔찍한 꿈속에서 튀어나온 듯이 보였다.

그렇기에 황제는 더더욱 분노하였다.

‘감히, 내 아들의 시성식을 망쳐? 이런 식으로?’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아들의 안위까지 위협하고 있다.

‘내 저놈을!’

황제는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폐하?”

내내 곁을 지키던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설마 벌써 이쪽의 심산을 눈치챈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근위대장이기 이전에, 젊은 시절부터 곁을 지켜준 평생의 친우니까.

“아니 되시옵니다.”

딱 잘라 말하는 굳은 표정의 로베르토 경.

황제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어찌하여 그대는 다짜고짜 아니 된다는 말부터 하는가.”

“폐하의 어깨에 훨씬 크고 무거운 것들이 얹혀 있기 때문이옵니다.”

“하지만 내 아들도 그만큼 중하다.”

“알고 있사옵니다.”

“한데도 만류할 심산인가?”

“물론이옵니다.”

“어찌하여.”

“폐하의 그 모습이……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뭐?”

황제는 멈칫하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오랜 친우를 쳐다보았다.

“죄책감 때문이라고? 내 행동이……?”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니. 말해주게. 부디.”

“…….”

“어서.”

거듭된 채근.

그제야 로베르토 경이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과거…… 황태자 전하의 건강이 심히 암울하였던 시절에 말이옵니다. 당시 황태자 전하가 가장 막막하고 힘들어 하였던 시절에 폐하께서는 전하를 홀대하셨사옵니다.”

“그……런가.”

“예, 폐하.”

“그렇군. 그래. 그랬지.”

황제는 새삼 깨달았다. 친우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과거의 자신이 어떠한 짓을 저질렀던 것인지. 모두.

“한데 내 아들이 건강과 미래를 되찾기 시작하니, 그제야 짐은 그 아들을 아끼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본인도 모를 죄책감을 품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이 행동도 그러한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

“실로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니, 그대의 말이 옳다.”

황제는 인정했다.

대못이 가슴에 박히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니까. 그만큼 자신이…… 아들에게 비겁했다는 증거니까. 과거 수없이 홀대하였던 아들을 이제야 챙기려 애쓰는 이런 행동조차도 모두.

“그렇지. 딱히 도움이 될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알면서도, 굳이 짐이 직접 검을 들고 나서려 들었던 것도…… 그런 심리 때문이었군. 아들을 지키려 한다는 티를 내려고. 그래야 속죄가 될 것이라 여기고서.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생각과 행동이었는지.”

“그 또한……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니지. 아니야. 짐이 위선을 부리려 하였던 것이야. 하니 그대에게 부탁하겠노라.”

“하명하소서.”

“그대는 당장 내 아들을 향해 달려가 주게.”

“……폐하?”

“가증스러운 위선에만 차 있는 짐보다는, 소드마스터인 그대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이 내 아들에게 더욱 실질적인 도움이 되겠지. 지금 같은 순간이라면 더더욱.”

황제는 고개를 들었다.

압도적인 규모의 초월적 짐승이 군림하듯 광장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니 늦기 전에, 어서.

황제의 목소리가 절실해졌다.

“부탁하네. 친구여.”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대답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가볍게 지면을 박차는 소리.

로베르토 경의 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황제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좌우를 향해 명하였다.

“근위대는 들으라!”

황도 중심의 대광장.

이곳에 사상 초유의 괴수가 나타난 상황. 이제부터는 전시태세다. 광장의 시민을 대피시키고, 저 괴수와 맞서야 할 것이다.

병력을 지휘하는 황제의 목덜미에 핏대가 돋아났다.

“짐이 이 자리를 지킬 터이니! 그대들도 짐과 나란히 황도 수호의 검을 치켜들라!”

‘이게…… 이게 뭐야?’

황제가 우렁차게 외치는 것과 같은 시각. 혈염의 짐승, 노스페라투로 화한 아난샤는 자신의 한쪽 다리를 치켜들었다. 아니, 치켜들어보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꼬물, 꼬물딱.

“…….”

너무나 짧았다. 통통했다. 이걸 다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 차라리 뾰루지라고 불러야 어울릴 것 같은데.

그만큼 그의 다리는 짧았다. 웰시코기가 보자마자 친구 먹자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올 것 같았다. 그러고선 가까이에서 이 다리를 보고는 의기양양하게 짖겠지. 자기가 이겼다고.

‘빌어먹을!’

아난샤의 눈동자가 몹시 흔들렸다.

기껏 수십만 마리의 박쥐 군체를 소환했는데. 노스페라투로 각성했는데. 그런데 재료(?)가 모자랐다. 소환된 박쥐의 숫자가 예상보다 적었다. 그 결과, 신체 일부에 하자가 생겼다.

그게 다리였다.

네 짝의 다리가 모조리 다 짧았다. 보행? 불가능해 보였다. 간신히 꿈틀거리며 기어갈 수 있을 뿐. 게다가 자신의 덩치가 50미터급으로 커진 터라, 짧은 다리로 몸체를 끌면서 기어가는 것이 더더욱 힘겨워져 버렸다.

이게 다 황태자 때문이다.

확실하다.

‘저놈이…… 내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나눠 먹어서!’

빼앗긴 1/3 가량의 정혈. 그것 때문에 박쥐가 덜 소환된 탓이다. 그래서 이렇듯 불완전한 모양새가 됐다. 황태자 때문에. 저놈의 탐욕스러운 흡수 때문에!

‘죽인다!’

콰아앙-!

다리를 포기하고서 아예 주저앉았다. 몸통으로 섰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적어도 이 대광장에 있는 모든 생명을 앗아 버리기에는.

‘이 자리의 모두를!’

쿼어억!

포효했다.

동시에 거대한 혈염의 기운이 생성되었다. 지면을 파고들었다. 부서진 포석 사이로 검붉은 파도가 솟구쳤다. 그리고 360도 모든 방위를 향해 둥글게 퍼졌다.

이를테면 그것은, 핏빛의 해일과도 같았다.

쏴아아아-!

“……!”

너무나 빠르게 광장 전체로 퍼진 혈염의 해일! 그런데 해일에 직격 당한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핏빛 해일은 보기에만 무시무시했을 뿐, 어린아이 하나조차도 넘어뜨리지 않았다. 그저 모두가 자신을 통과하듯 빠르게 지나간 ‘무언가’에 움찔하였을 뿐.

하지만 아난샤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쿼어어억!

다시금 터져 나온 포효!

두 번째 핏빛 해일이 사방으로 질주했다. 역시나 사람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서 빠르게 통과했다. 그리고 드넓은 프론테라 대광장 둘레를 따라…… 거대한 벽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어어?”

“저건…… 뭐야?”

갑작스러운 박쥐 군체와 괴수의 등장. 거기에 의문의 핏빛 해일까지. 광장에서 도망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의 시선에 두려움이 배어났다.

그때, 아난샤가 다시금 포효했다.

크워억!

세 번째의 포효와 혈염의 해일!

마침내, 대광장을 둘러싸며 솟구치던 핏빛의 벽이 상공에서 만났다. 돔의 천장처럼 태양을 흉험하게 물들이며 닫혔다. 동시에 광장 전체의 바닥이 요사한 핏빛 섬광을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츠즈즈즈……!

“……!”

반응할 틈도 없었다.

도망칠 방법조차 없었다.

광장 전체의 바닥에서 핏빛 섬광이 발산되는 순간, 광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눈앞이 흐릿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순식간에 엄습해 오는 어지러움. 풀리는 다리. 현기증. 목덜미 가득 솟아나는 소름과 오한.

‘커억?’

그 감각에선 라키엘도 예외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남들보다 더욱 민감하게 충격을 느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들보다 약골이기 때문이었다.

“……그, 읏!”

어지러웠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다리가 풀렸다.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광장 중앙에 군림하듯 우뚝 서 있는 핏빛의 거대한 짐승. 마치 악취미적 검붉은 색상으로 떡칠을 해놓은 빌딩 같았다.

‘저거, 딱 한의원 들어가 있던 상가 빌딩이랑 덩치가 또이또이한데.’

어째서 지금 이딴 생각이나 드는 걸까. 큰일이다. 일어서야 하는데. 그런데 주위의 누구도 일어나 있지 못했다. 누군가는 헛구역질을 하고, 또 누군가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져 비척거리고 있었다. 광장의 모두가, 예외 없이 전부.

“…….”

어째서?

방금 저놈이 일으킨 검붉은 해일 때문이겠지. 그럼 이 현기증은 대체 뭘까.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의문을 푸는 방법은 간단했다.

‘진맥.’

그는 자신의 손목을 짚었다.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 주세요.]

진맥 스킬 결과가 떠올랐다. 그는 아래쪽, 종합 소견에 주목했다.

[종합 소견 : 모든 항목에서 비교적 취약한 신체입니다. 평소 규칙적인 식단과 적절한 운동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위험 수준의 급성 빈혈이 감지됩니다. 신체 내의 혈류량이 심각한 수준으로 결핍되어 있습니다. 가급적 절대적인 안정과 수분 섭취 및 수혈 처치를 권장합니다.]

답이 나왔다.

‘저놈, 모기 짓을 한 거였구만.’

빈혈이란다. 그것도 급성으로 신체 내의 혈류량이 팍 떨어졌단다. 누가 한 짓일까. 뻔했다.

‘아까 저놈이 포효하며 일으키던 핏빛 해일. 그 후에 광장을 돔처럼 둘러싸게 된 검붉은 장벽.’

저게 일종의 마법진처럼 대규모의 흡혈 효과를 일으킨 듯했다. 그러니까 광장에 있는 모두가 무력하게 쓰러진 거겠지. 집단적인 급성 빈혈을 일으키면서 말이다.

“…….”

라키엘은 현기증을 억누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말 그대로 모두가 쓰러져 있었다. 예외가 없었다. 근위대 병사들은 물론이고 기사, 심지어 소드마스터 로베르토 경마저 넘어져 비척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곁의 데미안마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혈염의 기세를 두른 거대한 짐승은…… 더욱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콰아아아아-!

살육을 다짐하듯 포효하는 핏빛 짐승. 그 앞에 쓰러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핏빛으로 물든 대광장의 풍경까지. 가장 끔찍한 악몽 속에서나 보일 법한 지옥도 같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절망적인 상황에 짓눌리지 않았다. 압도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치미는 현기증 속에서도 침착하게 손을 움직였다.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최근 항상 품고 다니던 응급약 봉투를 꺼냈다.

그 속에 ‘뱀각산’이 있었다.

뱀파이어의 송곳니를 곱게 빻고 갈아서 만든. 먹기만 하면 체내의 혈액이 복사가 되어 버리기에, 빈혈이나 대량 출혈 사태를 치료하기에 딱 좋은.

그렇기에 지금 섭취하기에 너무나 적절한.

……할짝?

라키엘의 요망한 혓바닥이 뱀각산 가루를 야물딱지게 찍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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