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84화 (284/468)

284화. 혈염의 짐승 (2)

…….

아난샤는 눈을 떴다.

자신의 몸으로 흡수되어 들어오는 수많은 혈액이 느껴졌다. 대광장을 휘감은 혈염의 결계. 그 속에 갇힌 모든 생명을 대상으로 시전한 ‘힐데르트의 탐식’.

처음으로 사용해보는 뱀파이어 로드의 기술이었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로드의 힘인가.’

쓰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소름이 죽 돋아났다.

단지 세 번 포효하며 의지를 발현하였을 뿐이었다. 한데 어마어마한 규모의 결계를 형성하며 대량의 흡혈 저주를 발휘하였다.

아무런 연습도 없이.

그저 의지만으로.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 그 고대 혈족의 유산이 선사한 본능적이고도 초월적인 권능이었다. 그렇기에 아난샤는 역설적인 안타까움을 느꼈다.

‘만일,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 전체를 완전하게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방금 시전한 힐데르트의 탐식 한 번으로 광장의 모든 생명을 죽였을 것이다. 전신의 혈액이라고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 …….

그는 말없이 광장을 살폈다.

수천 쌍의 안구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드넓은 대광장에서 죽은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급격한 빈혈에 시달리며 쓰러져 신음하고 있을 뿐.

‘쯧.’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게 모두 황태자 때문이다.

그 탐욕스러운 놈이 마지막 순간에 아스라한 심법인지 뭔지 하는 야비한 수법으로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1/3 가량이나 훔쳐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힘이 온전하지 못하게 됐고, 힐데르트의 탐식 또한 완벽하지 못한 형태로 시전되었다.

‘하지만 뭐…… 상관없나.’

아난샤의 내면에 잔혹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미 이곳 광장에 서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무력화되었다. 황제도, 교황도, 성기사도, 소드마스터도 모두 예외 없이 말이다.

‘다들 이토록 많은 혈액을 갑작스럽게 빼앗겼으니…… 정신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테지. 회복? 단시간에는 꿈도 못 꿀 것이고.’

그러하다.

급성 빈혈은 만만한 질환이 아니다. 설령 고위급 성직자의 가호나 축복이 주어진다 하여도 그렇다.

‘그러니 차례대로 죽어라. 순서를 기다리며, 벌레처럼, 차근차근.’

무력화되어 빌빌거리는 인간들을 찢어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어차피 대광장은 결계로 봉쇄되었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다. 하나하나 잡아먹으며 힘을 키우자. 그렇게 하자.

그리고…… 가증스러운 제국의 인간을 모조리 죽이자.

‘어차피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니까.’

아난샤는 휴지조각이 된 자신의 꿈을 새삼스럽게 돌이켜보며 한탄했다. 인간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었다. 이런 괴물로서가 아닌, 인간 흑마법사로 찬란한 금자탑에 올라서고 싶었다.

그러기 위한 계획이었다.

공개적인 공로를 세우고, 제도권의 인정을 받으려 했다. 더 나아가 법적인 보호를 받고, 사회적 주류가 되어 내부에서부터 제국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면?

자연히 다음 권좌의 주인은 자신이 될 것이라 여겼다.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 역사에 길이 새겨질 새로운 황가의 시초로 기록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계획이 덧없게 되었다. 자신은 이미 만인이 보는 앞에서 괴물이 되어 버렸다. 사람으로서 존경받으며 역사에 기록될 희망 또한 당분간은 사라졌다.

적어도 최소한 몇십 년 동안은 그렇겠지.

‘그러니 나는!’

내 계획을 망친 놈들을 모두 죽이리라.

특히…….

‘황태자, 네놈부터.’

아난샤의 수천 쌍 눈동자가 살벌한 기세로 움직였다. 한 지점을 향해 모였다. 그곳에 황태자가 있었다. 광장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벌레처럼 쓰러져 빌빌거리고 있어야 할 황태자가…… 벌떡 일어났다?

‘어?’

아난샤는 의아함을 느꼈다. 순간 자신의 수천 쌍의 눈동자가 모조리 단체로 파업을 시작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황태자 따위가 제 발로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러하다.

분명 대량의 혈액을 흡수당했을 테니까. 심각한 급성 빈혈에 시달리는 상태일 테니까. 그러니까 저렇게 오늘 사 온 오뚝이처럼 가증스럽도록 발딱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인데…….

토도도도돗!

……뛰었다.

황태자가 뛰기 시작했다!

‘어? 어어?’

아난샤의 어이를 잃어버린 눈동자들이 가볍게 뛰기 시작한 라키엘의 움직임을 좇았다. 그러나 그는 황태자를 덮칠 수도, 공격할 수도 없었다. 아직 힐데르트의 탐식을 시전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라키엘이 잽싸게 달려가 도착한 곳은…….

“데미안? 어이? 정신이 드냐?”

“……전하?”

“다행히 살아는 있네?”

“저는…….”

“알아. 급성 빈혈인 거. 이거이거, 식은땀 나는 거 봐라. 일단 이것부터 좀 먹어봐. 얼른.”

라키엘이 손을 내밀었다. 검지와 엄지로 만든 집게모양. 그 사이에 약간의 하얀 가루가 집혀 있었다.

“자, 아아.”

“……그건 뭡니까?”

“뭐긴. 같이 빻고 갈았잖아. 입 벌려. 뱀각산 들어간다.”

텁!

보다 못한 라키엘이 다짜고짜 왼손을 뻗었다. 그리고 데미안의 볼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는 양쪽에서 꽉 눌렀다. 데미안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 속으로 오른손에 쥐고 있던 뱀각산 가루 약간을 톡톡 털어 넣었다.

“자자, 데씨 양반? 한입 잡숴봐. 츄라이츄라이.”

“……!”

“뭐해. 꿀꺽.”

꿀꺽…….

데미안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직후, 그의 몸속에서 뱀각산이 폭발적인 효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흡?”

후욱!

뱃속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아니, 위장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압도적인 포만감이 들었다. 마치 이불보다 큰 솜덩이가 뱃속에서 불어나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었다.

그 감각도 잠시, 위장을 빵빵하게 채우던 엄청난 포만감이 전신으로 순식간에 쏴악 퍼졌다. 국밥 만큼이나 따스하고도 든든한 열기와 함께였다.

“어때? 피가 막 차오르지?”

라키엘의 입가에 미소가 씨익 그려졌다.

복용자의 혈액량을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늘려주는 뱀각산. 그걸 먼저 복용했던 조금 전의 경험이 떠올랐다.

‘아깐 약빨 끝내줬지.’

아까의 자신처럼, 데미안도 그런 것 같았다. 녀석의 창백해져 있던 안색이 삽시간에 나아졌다. 심지어 단숨에 기운을 차리며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거, 엄청나군요?”

“그렇지?”

“예.”

“그럼 따라와, 얼른.”

“알겠습니다.”

데미안은 재빨리 검을 챙겼다. 그리고 라키엘을 따라 뛰었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광장을 분주하게 가로지르며 뱀각산을 먹일 인원을 선별했다.

‘일단은 유능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부터!’

라키엘은 상비약 주머니 속을 슬쩍 살폈다. 아쉽게도 지금 가진 뱀각산의 양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딱 응급상황에 써먹을 정도만 지니고 있던 까닭이었다.

남은 분량을 대략 계산하자면 6인분(?) 정도. 그 대상은…….

“로베르토 경? 키에르사 경! 그리고 아이젤 경!”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

수도방위군 사령관 키에르사 경.

신성교단의 성기사 아이젤 경.

세 명의 소드마스터에게 뱀각산을 알차게 찍먹시켰다.

그리고 다음은…….

“자, 실비아 님? 입 벌립시다!”

2황자와 함께 시성식에 귀빈으로 참석해 있던 엘프족의 집행자, 실비아에게 먹였다. 물론 그 와중에 2황자 녀석과 황제의 애타는 눈빛을 받기는 했다.

라키엘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아들아?”

“송구하옵니다!”

가차없이 황제를 버렸(?)다.

대신 근처에 쓰러져 있던 우루스에게 달려갔다.

“누우?”

“어, 괜찮아. 이거 먹어봐. 맛있는 거야.”

“누우우우?”

“이거 먹으면 힘이 날 거야.”

“누우!”

할짝!

우루스의 커다란 혓바닥이 라키엘의 손바닥에 남은 나머지 뱀각산을 야물딱지게 핥아먹었다. 그 분량은 인간 기준으로는 2인분. 우루스의 덩치를 생각하면 다소 모자랐지만, 그럼에도 그럭저럭 기력을 회복하기에는 충분했다.

“누우우우!”

포효하는 우루스! 근처에서 짐이 저 소머리보다 못한 것이냐며 망연자실(?)한 눈빛을 보내는 황제! 라키엘은 머쓱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그 눈빛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으으, 죄송합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 미안하고 양심이 콕콕 찔렸다. 하지만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 지금은 이겨야 하니까. 저 흑마법사, 아니, 핏빛 괴물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니까. 그래야 나머지 모두를 치료하든 살리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다들, 준비됐습니까?”

……처척!

데미안과 3인의 소드마스터, 엘프족 집행자. 그리고 전직(?) 미노타우로스의 왕이 라키엘을 보호하듯 둘러싸며 도열하였다. 그리고 광장 중앙에 군림하듯 우뚝 선 혈염의 짐승, 아난샤를 올려다보았다.

아난샤의 수천 쌍 눈동자도 그들을 향하였다.

‘무슨 저런…….’

흑마법사는 어처구니가 사르르 사라짐을 느꼈다. 분명 어떠한 예외도 없이 결계 안의 모든 이가 심각한 빈혈 상태가 되었을 텐데, 그런데…….

‘어떻게 회복을 시킨 거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이 있었다. 황태자 때문이다. 저 가증스러운 황태자가 원인이다. 아니, 원흉이다. 저놈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뭘 먹였으니까.

‘설마.’

뱀파이어의 송곳니 가루를 쓴 건가.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아는 가장 유능한 빈혈 치료제가 뱀파이어의 송곳니 가루니까.

그렇다면…….

‘저택에 남겨진 내 권속들을 네놈이 잡아갔었던 것이었구나.’

결국, 황태자 네놈이 나의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었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이 순간 이후로도 내내 그러하겠지. 그러니, 무조건 저놈부터 최우선으로 죽여야겠다.

‘반드시.’

라키엘을 향해 집중된 수천 쌍의 눈동자에 살기가 피어났다. 덕분에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려야 했다.

‘하. 어쩌다가 내가…….’

하다하다 저런 괴물과 맞닥뜨려서 눈싸움이나 하게 됐을까. 내 팔자에 무슨 마가 끼었길래 오늘 같은 일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과연, 이길 수 있을까.

“…….”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웠다.

당연했다.

정면에서 수천 쌍의 눈동자를 살벌하게 번득이는 핏빛 괴수. 저놈의 덩치는 대략으로만 봐도 50미터는 될 것 같았다. 머리 높이도 30미터는 충분히 되어 보였다. 말 그대로 어지간한 상가 빌딩과 어깨동무를 할 덩치였다.

동시에 라키엘은 중요한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여기서 말리면 죽는다.’

절대로 약해 보이지 말 것.

곁을 지키는 이들을 믿을 것.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내가 지금까지 이곳에서 키워온 능력을 믿을 것. 나 자신을 믿을 것.’

……츠즈즈즛!

혈염의 짐승이 번득이는 수천 쌍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받아내며, 라키엘이 경혈 스캐닝을 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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