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혈염의 짐승 (3)
‘경혈 스캐닝!’
라키엘은 눈을 부릅떴다.
여기서 더 물러날 곳이 없다. 어쩌다가 자신이 저런 괴수와 눈싸움을 하는 팔자를 지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피하거나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결계로 봉쇄당한 광장.
이곳에서 나가려면 이겨내야 한다.
오직 그뿐이다.
딩동!
알림음이 귓가를 때려왔다. 라키엘은 혈염의 짐승의 약점과 특성을 파악하고자 눈앞에 떠오르는 정보에 집중하였다.
그런데…….
[주시하는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멉니다.]
[진맥 스킬 전용 옵션 ① : 경혈 스캐닝은 10미터 이내의 대상에 대해서만 스캔이 가능합니다.]
[스캔 대상과 거리를 좁혀 주세요.]
“…….”
망할.
저도 모르게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저런 거한테 더 가까이 접근하라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빌딩 사이즈의 덩치를 자랑하며 광장 중앙에 군림하듯 우뚝 서 있는 핏빛 괴수. 짧은 다리와 우람한 몸체, 기린 같은 목에 달린 뱀머리는 무려 다섯 갈래.
대체 저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히드라? 그거랑 비슷하긴 한데. 아니 어쨌건, 저런 괴수한테 다가가라고? 10미터 이내로?
‘그러다간 죽겠는데?’
제일 먼저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었다.
당연했다.
자신은 쥐뿔도 없다.
우루스처럼 튼튼한 신체도, 데미안의 야수 같은 감각도, 여타의 소드마스터와 같은 방대한 마나도 지니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남들에게 없는 걸 딱 하나 정도는 지녔노라 말할 수는 있겠지만.
‘멸치 약골 피지컬. 젠장.’
오히려 남들보다 못한 몸뚱이다. 그런데 섣불리 저런 괴물에게 다가갔다가 한 번만 밟히면? 아니, 한 대쯤 톡 스치기라도 하면? 바로 사망 확정이다. 오늘 중으로 염라대왕과 오붓하게 마주 앉아서 진로상담을 받게 될 거다. 확실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겠다.
“……전하?”
옆으로 슬금 다가오는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
급성 빈혈에 시달리던 조금 전까지와 달리, 이제는 혈색이 완연히 회복된 기색이었다. 물론 이쪽이 적절하게 먹인 뱀각산의 효능 덕분이었다.
한데 그런 응급처지의 위력(?)을 온몸으로 체감한 까닭일까. 무려 황실의 근위대장이자, 황제의 젊은 시절부터의 최측근인 로베르토 경이 이쪽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대응할 계획이십니까?”
“…….”
그건 전투 전문가인 당신이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냐, 라고 반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로베르토 경이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 그건 이미 이쪽을 지금 상황에서의 리더로 간주하는 눈빛이었다.
‘로베르토 경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현기증과 무력감에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터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일어날 수가 없어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쪽이 먹인 약간의 가루약. 그것 덕분에 풀컨디션을 되찾게 되었으니, 이쪽을 보는 시각도 한층 달라진 거겠지.
그건 뱀각산을 복용하고 빈혈을 극복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명만 내려주시면 따르겠나이다.”
황실의 다른 소드마스터, 키에르사 경이 검을 굳게 쥐고서 나란히 섰다. 신성교단의 성기사 아이젤 경도 묵묵히 방패를 들었다.
“우리 장로님들께서도 저런 흉물을 보았다면 당장 처리하라 명하셨을 테지.”
엘프족 집행자 실비아가 단검 두 자루를 느슨하게 들고서 언제든지 튀어나갈 준비를 갖추었다. 우루스도 콧김을 푸륵 내뱉으며 압도적인 대흉근을 불끈거렸다.
즉, 현재 전투에 참전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이 이쪽만 쳐다보게 됐다. 지휘를 해달라며. 내 말을 따르겠다며.
“…….”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눈빛들을 도저히 그냥 무시할 수는 없겠다. 영웅심 때문에? 어림도 없는 소리.
‘내가 살려면 이들을 적절히 활용해야 하니까. 나 혼자서는 지금 상황, 절대 못 이겨내니까. 그러니 내가 지휘를 해야 해.’
나는 할 수 있다.
병약한 신체 이외에도 내가 지닌 것이 있다. 경혈 스캐닝. 대상의 마나 흐름을 모조리 관찰하는 능력. 그것이라면 저 핏빛 괴수의 움직임과 약점 또한 밝혀낼 수 있으리라. 가장 효율적인 공방을 조율할 수도 있겠지.
그러자면…….
‘후우.’
라키엘은 굵고 짧은 고민 끝에 결심했다. 품속에서 가시를 꺼냈다. 검정색 K맛 가시였다.
‘경혈 스캐닝을 발동하려면 10미터 이내로 접근해야 하고, 그걸 안전하게 실행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겠다.
판단한 순간, 어깨를 콕 찔렀다.
동시에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의 추억 하나가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래. 학교에서 불주사 맞던 날. 어깨빵으로 맞았지. 딱 이 자리에. 그때도 이렇게 아팠는데. 아니, 지금에 비하면 그때 불주사는 별로 아픈 것도 아니었던 거 같아.
그러니까…….
‘……그! 그급! 극!’
K맛 검정색 가시로 어깨를 찌르자마자 극한의 고통이 몰려왔다. 찔린 부위만 아픈 게 아니었다. 십이지장이 트위스트를 추었다. 심장이 콩팥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대뇌피질 전두엽이 번지점프를 하며 괄약근을 찰싹찰싹 때려댔다.
하지만 참아냈다.
지금까지 줄곧 그러했던 것처럼. 인내심과 극기심을 발휘했던 모든 나날들처럼. 이를 꽉 깨물었다. 눈앞에서 번쩍거리는 신경 폭주의 스파크를 감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통이 멎었다.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K-맛 효과를 지닌 검은색 가시를 셀프로 시침하였습니다.]
[지옥과 같은 고통을 이겨낸 당신에게 K-맛의 진정한 효과가 적용됩니다.]
[K-맛 가시 효과 발동.]
[당신의 신진대사가 ‘8282 모드’로 급가속됩니다!]
후우욱-?
‘흡!’
붉은색으로 물드는 메시지.
삽시간에 일렁거리는 시야. 마치 투명한 잉크 한 방울을 세상에 떨어뜨린 듯. 그렇게 번져가는 잉크 뒤로 일그러지는 세상.
그리고 그때부터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는 심장까지.
쿵! 쿵! 쿵! 쿵! 쿠쿵! 쿵! 쿵!
“……!”
호흡이 빨라졌다. 맥박이 불x원샷 맞은 코뿔소처럼 질주했다. 모든 세포가 일제히 깨어나며 소리쳤다. 움직이라고. 달리라고. 할 수 있다고. 바람보다 빠르게. 섬전처럼 신속하게.
그 감각을 실감하는 순간.
라키엘은 땅을 박찼다.
“데미안! 따라와!”
투홧!
시야가 주욱 미끄러졌다. 광장 바닥에 깔린 포석 패턴이 면에서 선으로 바뀌었다. 고개를 들었다. 핏빛의 괴수가 삽시간에 거대해지고 있었다. 아니, 가까워졌다. 순식간에 좁힌 거리. 놈과의 간격은 이제 9미터.
그곳에서 경혈 스캐닝을 다시 발동했다.
딩동!
빨라진 신진대사 덕분일까.
스캐닝의 발동 속도도 한껏 빨라졌다.
‘된다!’
스캐닝 결과가 주르륵 떠올랐다.
[진맥 스킬 옵션 ① : 경혈 스캐닝을 발동합니다.]
[경혈 스캐닝 옵션이 Lock-on 대상을 포착하였습니다.]
[대상이 성공적으로 Lock-on 되었습니다.]
시야가 변했다.
우뚝 선 핏빛 괴수의 신체 일부에 밝은 외곽선이 그려졌다. 아주 일부. 달랑 박쥐 한 마리에게만.
‘어?’
라키엘은 흠칫했다.
순간 쌔한 기분이 들었다.
‘왜 저거 달랑 한 마리만 스캔이 되는 거지? 잠깐, 이거 설마…….’
문득, 아까 흑마법사가 핏빛 괴수로 변이하던 때의 과정이 떠올랐다. 광장 상공에 수없이 생겨나던 마법진. 그 마법진을 통해서 날아온 수십만 마리의 박쥐 군체가 뭉쳐서 지금의 핏빛 괴수가 만들어졌지.
그렇다면…….
‘저거, 지금도 박쥐 떼로 이루어진 군체 상태인 거야?’
아무래도 그런 까닭인 듯했다. 기껏 경혈 스캐닝을 켰는데 달랑 박쥐 한 마리만 스캔이 된 것은.
‘……그래. 경혈 스캐닝은 10미터 이내의 범위에서, 생명체를 한정으로 한 번에 하나의 대상만 락온이 가능했지.’
한데 저놈은 수십만 마리로 이루어진 군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전체를 스캔할 수가 없다!
‘망할!’
그때였다.
그동안 ‘힐데르트의 탐식’을 시전한 대가로 광장 중앙에 우뚝 서 있기만 했던 아난샤, 혈염의 짐승 노스페라투가 마침내 머리 하나를 스윽 움직였다. 수천 쌍의 눈으로 라키엘을 내려다보며 눈웃음을 그렸다.
‘황태자, 버둥거려 보려고?’
아난샤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지니게 된 압도적인 힘. 신이 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래에서 소드마스터들이 무슨 짓을 하건, 황태자가 무슨 수를 꾸미건, 자신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날뛰어라. 살아보려고 버둥거려라. 하지만…… 그럴 시간이 있을까? 아니.’
애초부터 그럴 시간을 줄 생각도 없다. 지금 자신이 딱히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굳이 귀찮게 몸을 움직여서 황태자와 그 무리들을 직접 타격하는 것보다, 힘을 모아서 힐데르트의 탐식을 시전하고 대량의 혈액 흡수를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빈혈 상태에서 회복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혈액을 빼앗겨도 그게 가능할까? 그것 또한 아니.’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광장의 모든 사람을 치료했겠지. 한데 황태자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흑발 호위를 비롯한 몇몇만 치료를 했다. 심지어 황제마저도 방치했다. 그 뜻은 명확하다.
치료 역량에 한계가 찾아왔다는 것. 다시 모두가 빈혈 상태에 빠지면, 더는 치료할 수 없으리란 것.
‘그러니…….’
쿠구구.
아난샤, 혈염의 짐승이 몸을 웅크렸다. 다섯 갈래의 머리를 치켜들었다. 다시금 힐데르트의 탐식을 시전할 수 있겠다. 대량의 혈액이 흡수되겠지. 그러면 끝나겠지. 지금 빈혈로 쓰러져 벌레처럼 버둥거리는 모두.
‘……죽어라.’
포효를 준비했다.
힐데르트의 탐식을 머금었다.
한데 그때였다.
“데미아아안-! 저놈! 왼쪽 옆구리에 튀어나온 다섯 번째 돌기의 아래쪽 뿌리! 찔러!”
황태자가 냅다 지른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흑발 호위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왼쪽 옆구리를 향해서. 지면을 박차고 도약했다. 장검을 번득이며 겨누었다. 옆구리에 돋아난 작은 돌기 중의 하나, 그 아래쪽을.
푸큭-!
찔렀다.
하지만 아난샤는 코웃음만 쳤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찔린 옆구리, 그곳 부위를 이루고 있던 박쥐 몇 마리만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외에는 별다른 타격도 없었다. 같잖다는 생각만 피식하고 들었다.
‘하, 겨우 이런 공격으로 날 막겠다고?’
그는 더욱 짙어지는 비웃음과 함께 하려던 일을 계속했다. 즉, 혈염의 힘을 개방하며 포효했다.
쿼어어억-!
아까와 같았다.
이제 핏빛 해일이 일어나 광장 전체로 퍼지겠지. 그 해일에 노출된 모든 이가 대량의 흡혈을 당하겠지. 빈혈에 시달리던 이들은 이걸로 죽을 것이며, 잠시 팔팔해졌던 몇몇 놈들 또한 다시금 무력해져서 벌레처럼 버둥거릴 것이다.
아난샤는 확신했고, 환호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
갸웃.
‘어째서 혈염의 해일이…… 일어나질 않지?’
이상했다.
분명 아까와 똑같이 포효했는데, 힐데르트의 탐식을 시전하였는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공허한 외침만이 허공을 울렸을 뿐이었다.
‘왜?’
……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이었다.
푸확!
돌연, 노스페라투의 다섯 줄기 목구멍을 이루고 있던 수천 마리의 박쥐 떼가 일제히 폭발하며 피분수를 뿌리기 시작하였다.
‘커억?’
성대가 콱 막히는 듯한 충격! 아난샤는 당혹감에 젖은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서 라키엘이 바쁘게 내달리며 경혈스캐닝을 시도하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이가 안 되면 잇몸으로. 한 번이 안 되면 수백 번을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8282모드의 힘을 빌렸다. 1초에 수백 번씩, 초고속으로 경혈 스캐닝을 껐다가 켰다. 그때마다 스캐닝 락온 대상을 바꾸었다. 수백 마리의 박쥐가 스캔되고 해제되기를 반복하였다.
마치, 겨우 수십 개의 점으로 사람 몸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모션캡쳐를 하듯이. 수십만 마리 군체의 대략적인 움직임과, 그 사이를 연결하는 기혈 흐름을 마침내 파악해내고 있었다.
“로베르토 경! 저놈 배 아래쪽으로 달리시고! 우루스! 정면에서 대치! 키에르사 경! 후방으로 우회!”
무력하게 쓰러진 황제와 2황자, 무수한 귀족들과 신성 교단의 수뇌, 그리고 수천 명의 황도 시민들까지. 대광장에 갇힌 그 모두가 간절한 눈길로 바라보는 가운데, 라키엘의 일사불란하고도 정확한 지휘, 아니, 대규모 특수 침술 강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