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경혈 스캐닝 업그레이드 (1)
“로베르토 경! 저놈 배 아래쪽으로 달리시고! 우루스! 정면에서 대치! 키에르사 경! 후방으로 우회!”
힘껏 외쳤다.
목이 터지도록.
모두에게 들리도록.
하여 모두가 이쪽의 지휘를 즉각적으로 듣고 수행할 수 있도록. 목소리에 자신감을 한껏 실었다.
자신감의 근거는 명확했다.
‘드디어…… 보인다!’
라키엘은 눈을 부릅떴다.
키이이이이잉-!
아까부터 관측하려 애썼던 혈염의 짐승. 흑마법사가 일깨운 저 거대한 핏빛 괴수의 몸체. 놈의 움직임이 보였다. 경혈 스캐닝이 제대로 발동되고 있었다. 물론 예전처럼 단순하게 경혈 스캐닝을 켠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커다란 대가를 바치고 있었다.
츠츳! 츳! 츳! 팟! 팟! 파파파팟-!
수없이 명멸하는 시야. 1초에 수백 번씩 눈을 깜빡이는 듯한 감각. 혹은 수백 번씩 불을 켰다가 끄는 기분.
그는 경혈 스캐닝을 초당 60회에 가까운 속도로 켰다가 끄고 있었다. 말 그대로 초고속 on/off 의 연속. 때마침 발동 중이던 8282 모드 덕분에 가능했다.
아울러, 초고속 on/off 덕분에 경혈 스캐닝의 원래 목적을 일부 달성할 수도 있었다.
‘놈의 움직임이…… 대략적이나마 보여!’
그러했다.
경혈 스캐닝을 켤 때마다 스캔 대상을 바꾸었다. 혈염의 짐승을 이루는 수십만 마리의 박쥐 군체. 그중에서 다양한 놈을 랜덤으로 골랐다. 1초에 60마리 정도를 스캔했다.
수십만 중에서 초당 60.
전신에 퍼진 60개의 점이 움직이는 방향. 그 사이를 연결하는 마나의 흐름 구조까지. 그 정도면 놈의 전체적인 동작과 의도를 대강은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일종의 모션 캡처 과정과 흡사한 원리 덕분이었다.
‘영화 촬영하면서 배우의 모션을 CG로 캡처할 때…… 이런 식이었지, 아마?’
문득 한국에서 비슷한 영상을 봤던 기억이 났다. 할리우드 SF 영화 촬영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던가. 배우들이 수십 개의 점이 찍힌 쫄쫄이(?)를 입고 열연을 펼치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더랬다. 와 저 상황에서도 감정이입이 되는구나. 괜히 배우가 아니네, 라고.
어쨌건, 지금 자신이 시도하고 있는 경혈 스캐닝 초고속 on/off가 그때 봤던 모션 캡처의 점 찍힌 쫄쫄이와 똑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덕분에 마침내 보였다!
“데미안! 내 정면으로! 두 번째 머리부터 막아!”
외쳤다.
그때 마침 짐승의 두 번째 머리가 슬며시 움츠러들었다. 이내 용수철처럼 쭉 늘어났다. 이쪽을 향해서. 더없이 사납고 빠르게.
그러나 데미안이 더 빨랐다.
이쪽의 외침에 반응하여 미리 적절한 위치를 막아선 덕분이었다.
“흐읍!”
데미안의 폐가 공기를 한껏 머금었다. 전신의 근육이 맥동했다. 마나의 흐름이 검을 이끌었다. 공기를 가르는 강맹한 일격이 수십 줄기의 검풍을 생성하였다.
츠파파파팟!
짐승의 뱀 머리가 검풍에 휩쓸렸다. 이마를 이루던 박쥐 수백 마리가 도륙되며 피분수를 뿌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새로운 박쥐들이 손상된 부위를 금세 복구했다.
놈의 돌격이 재개되었다.
콰드드드득!
한껏 벌어진 짐승의 아가리가 광장 포석을 갈아엎었다. 그러나 라키엘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데미안의 검풍에 놈이 주춤거리는 사이, 8282 모드의 속도로 재빠른 회피를 시전한 덕분이었다.
“데미안! 두 번째 머리의 왼쪽 목덜미를 공격! 우루스! 뿔로 가슴 들이받고! 로베르토 경! 우루스를 보호! 키에르사 경과 실비아 님, 신성교단의 아이젤 경은 날 따라오시고!”
재빠르게 외쳤다.
8282 모드의 영향 때문인지 그 외침조차도 엄청나게 빨랐다. 마치 x튜브 영상의 재생속도를 5배속으로 올린 느낌? 혹은 속사포 랩이 주특기인 래퍼가 된 기분?
그럼에도 다행히 모두가 소드마스터, 혹은 그에 준하는 수준의 실력자들이라 이쪽의 외침을 실수 없이 잘 알아들었다.
‘다들 영어 듣기평가 시키면 만점은 따놨겠구만!’
살짝 샘솟는 부러움(?)을 접어두고서 계속하여 외쳤다. 이쪽의 외침에 따라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혈염의 짐승을 공격하고, 두드렸다.
그동안 라키엘은 짐승의 반응을 관찰했다.
약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저놈 저거, 그냥은 못 끝내.’
몇 번 공세를 퍼붓는 동안 관찰해보니 알 수 있었다. 놈은 아무리 강력한 공격을 받아도 끄떡이 없었다. 공격이 먹히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베고, 터뜨릴 때마다 피분수가 시원할 정도로 팡팡 터졌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손상된 부위가 계속 복구가 된다는 점이었다.
‘놈을 이루고 있는 수십만 마리의 박쥐 군체 때문이야. 아무리 베고 터뜨려도 박쥐 군체 자체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 저 박쥐 군체가 다 소모되기 전에…… 우리 쪽이 먼저 지칠 정도로.’
그것이 문제였다.
계속 공격하면 수를 줄일 수는 있는데, 그 숫자가 너무나 많다는 점이 문제였다. 마치 권총 한 자루 달랑 가지고서 수백 마리의 달려드는 좀비와 마주친 것만 같은 상황이랄까.
‘이래선 끝이 없어. 게다가 다들 뱀각산을 복용하고 빈혈에서 회복되긴 했지만, 완전하지가 않아. 은근히 컨디션들이 엉망이야. 아마도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지치겠지.’
경혈 스캐닝으로 관찰해보니 확실히 그래 보였다.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대로라면 안 된다. 아무리 희망회로를 열심히 돌려봐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나도…….’
벌써부터 지쳐가고 있다.
무리도 아니었다.
8282 모드 때문이었다.
“후……! 후욱!”
라키엘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부릅떴다. 몸이 너무나 뜨거워졌다. 체온이 급상승하며 땀이 비처럼 흘렀다. 현기증마저 치밀었다. 너무나 빨라진 신진대사와 급격한 체력 소모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멈춘다면 당장 저 핏빛 짐승의 타겟이 될 테니까. 아마도 순식간에 다진 고기, 혹은 오징어포 신세가 되겠지.
그래서 미칠 지경이었다. 힘들어 죽겠는데, 진짜로 죽기 싫으면 강제로라도 계속 움직여야 했다. 지금껏 8282 모드를 사용했던 모든 경험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빡쎈, 최악의 경험이었다.
“……헉! 허억!”
숨이 끊어질 듯이 가빠진 건 물론이고, 내부에서는 오장육부마저 난리를 떨어댔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급격한 체력소모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심장 : 야! 몸뚱아아! 나 터진다! 이렇게 뛰다간 터진다고!]
[허파 : 허…… 파하악……↘]
[대장 : 허파 형님은 벌써 터졌는데 말입니다?]
[간장 : 안 돼! 우리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위장 :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정신?]
[콩팥 : 이럴 때 정신 번쩍 들게 해주는 적당한 명언 없을까?]
[비장 :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심장 : ……!]
[허파 : ……!]
[대장 : ……워어 소름.]
[간장 : 나 10초쯤 정신 아득하게 번쩍 들었음.]
[위장 : 2222222 ㄹㅇ ㅋㅋㅋ]
[콩팥 : 33333 힘들어도 예고 없는 퇴라피는 제발ㄷㄷ 인수인계 시간이라도 달라고 아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분투를 격려하며 3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0,600]
“……후욱! 헉!”
고맙지만, 아쉽게도 딱히 실질적인 응원은 되지 않았다. 너무 힘들었다. 그렇잖아도 남들보다 저질 체력인 상태에서 혹사를 버텨내야 한다니, 아마도 일사병에 걸린 상태에서 억지로 운동장 30바퀴를 돌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수도 없었다.
‘저놈도 내가 모두를 이끈다는 사실을 눈치챘어.’
직감할 수 있었다.
흑마법사가 변신한 저 핏빛 짐승. 저놈도 이쪽의 역할을 대강 파악한 듯했다. 그 증거로, 조금 전부터는 대놓고 이쪽만 집요하게 노리는 중이다. 나만 죽이면 나머지는 쉽게 처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게 정답이기도 하고.
게다가…….
‘경혈 스캐닝의 작동 범위 때문에…… 움직임을 멈출 수도 없는데.’
10미터.
그게 지금 지닌 경혈 스캐닝의 관측 범위였다. 즉, 놈을 관찰하려면 무조건 10미터 범위 이내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저 짐승의 덩치는 대략 50미터 정도나 되었다. 즉, 한자리에 서서는 놈의 전체를 관측할 수 없다. 그러니 뛰어야 한다. 사방팔방 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전신을 관측해야 한다. 그래야 전체의 움직임을 대략이나마 파악할 수 있고, 모두를 지휘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을 거 같다.
“……헉! 커헉! 후욱!”
눈앞이 점점 노랗게 변했다. 지금이야 8282 모드의 약빨(?)로 버티며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지만, 모드 발동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그동안 폭발적으로 소모한 체력의 여파가 한꺼번에 훅 몰려오며 기절하는 건 아닐까.
게다가 더 심각한 점이 또 있었다.
‘이대로는 저놈의 약점을 파악할 수가 없어.’
지금은 짐승의 주위를 바쁘게 움직이며 놈의 겉면만 간신히 살펴볼 수 있었다. 10미터라는 관측범위의 한계 때문이었다. 놈의 커다란 덩치 때문에, 몸통 안쪽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곳을 이루고 있는 박쥐들을 관찰하려면 경혈 스캐닝의 범위가 더 넓어져야 할 텐데…….
‘어떻게 하지?’
식은땀이 뚝뚝.
막막해졌다.
몸은 계속해서 뛰고, 경혈 스캐닝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입은 바쁘게 지휘를 내리고 있는데……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이대로 흘러갈 싸움의 끝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답이 없는 소모전.
희망이 없는 분투.
그렇게 맞이할 암울한 결과.
졌지만 잘 싸웠다? 그따위 결말을 겪고 싶지 않았다. 날 믿고 함께 싸워준 데미안, 우루스 등은 물론이고, 광장에 쓰러진 황제와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될 거니까. 그건 싫다. 지금까지 뭣 때문에 열심히 살아왔는데. 조금만 더 잘 가꾸면 내가…….
‘평생 떵떵거리면서 건강하게 놀고먹으면서 살 수 있는데!’
인류애 때문이 아니다.
책임감도 물론 아니다.
모두가 내 풍족한 여생을 위해서다. 나는 물론이고, 모두가 잘살고, 제국이 튼실해져야 내 인생도 풍요로워진다. 꿀 빠는 건물주적 백수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이대로 무력하게 당할 수는 없다. 대책 없이 손가락만 빨 수도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뭐라도…….
그때였다.
덜컥!
“……!”
다시금 땅을 박차며 도약하려던 순간, 심장 한쪽에서 불길하게 덜컹거리는 감각이 엄습해 왔다. 심장 마비? 아니었다.
[K맛 가시의 효과가 떨어졌습니다.]
[신진대사 ‘8282 모드’가 종료됩니다.]
……후우욱!
“흐읍…….”
숨이 콱 막혔다.
한껏 가속되었던 신체가 갑자기 느려졌다. 그동안의 폭발적이었던 움직임의 대가가 후폭풍처럼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그 괴로움에 사로잡힐 여유 따위는 없었다.
라키엘은 고개부터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핏빛 짐승의 다섯 머리. 그곳에 달린 수천 쌍의 눈동자. 그 모든 시선이 이쪽을 향해 눈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잡았다’라고 읊조리듯이.
“…….”
오싹, 소름이 돋았다.
다시 검정색 가시를 치켜들었다. 어서 찔러야 한다. 다시 8282 모드를 발동해야 한다. 놈의 공격을 받기 전에 어서…….
라고 생각하는 사이, 짐승의 머리 두 개가 쏜살같이 이쪽으로 내리꽂혀 왔다.
콰아아-!
“……!”
공기를 가르며 달려드는 덤프트럭 크기의 머리 둘. 한껏 벌어진 아가리. 박쥐 떼로 이루어진 송곳니.
피할 수 있을까. 아니. 8282 모드였으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최소한 경혈 스캐닝으로 놈의 모든 움직임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면, 8282 모드가 아니라도 어찌어찌 피해낼 각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지금은 둘 다 아니다.
8282 모드는 종료됐다.
경혈 스캐닝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게다가 날 도와줄 데미안이나 다른 이들과의 거리도 너무 멀다. 하필이면 지금. 딱 이렇게. 공교롭게도.
“전하-!”
외치며 달려오는 데미안.
녀석의 다급해진 표정.
그 몸짓이 느리게 보였다.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핏빛 짐승의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느릿느릿. 이게 죽기 직전에 보이는 주마등이라는 걸까.
한데 그 순간이었다.
딩동!
실낱처럼 귓가에 울리는 알림음.
절체절명의 찰나 사이에서,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당신은 진맥 스킬 옵션 ① : 경혈 스캐닝을 독특한 방식으로 운용하였습니다.]
[당신은 신진대사 8282 모드의 가속 능력을 조합, 응용하여 경혈 스캐닝을 초당 수백 회씩 on/off 하는, 극단적인 형태의 스킬 옵션 노가다를 실천하였습니다.]
[이 노가다가 경혈 스캐닝 옵션에 폭발적인 경험치를 선사하였습니다.]
[경혈 스캐닝 옵션의 기능이 업그레이드 됩니다.]
[당신이 앞서 흡수한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 성분이 경혈 스캐닝 옵션의 업그레이드에 특별하고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경혈 스캐닝의 관측 범위가 대폭 확장됩니다.]
[경혈 스캐닝의 관측 대상이 헤모글로빈(hemoglobin) 기반의 혈액을 지녔을 경우, 스캔 대상의 숫자가 무제한으로 늘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