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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287화 (287/468)

287화. 경혈 스캐닝 업그레이드 (2)

[경혈 스캐닝의 관측 범위가 대폭 확장됩니다.]

[경혈 스캐닝의 관측 대상이 헤모글로빈(hemoglobin) 기반의 혈액을 지녔을 경우, 스캔 대상의 숫자가 무제한으로 늘어납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클릭해 주세요.]

“…….”

라키엘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무슨 소리일까.

경혈 스캐닝이 업그레이드? 방금까지 무수하게 반복했던 초당 수백 회의 on/off 스캐닝이 경험치 노가다가 됐다고? 거기에 앞서 흡수한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이 업그레이드의 형태에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지만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당장 괴수의 머리가 이쪽의 전신을 짓이기고자 쇄도해 오는 마당이었다. 아니, 2초? 1초? 그 후엔 이쪽이 피떡이 될 판이다!

‘이런…….’

오싹, 소름이 돋았다. 경혈 스캐닝 업그레이드, 좀 일찍 떠주면 안 됐나? 새삼스럽게 억울해졌다.

변화가 느껴진 것은 그 찰나였다.

딩동!

[당신은 경혈 스캐닝을 발동 중입니다.]

[발동 중인 스캐닝의 범위(반경 150m) 이내에 헤모글로빈 기반의 혈액을 지닌 대상이 다수 포착되었습니다.]

[범위 내의 헤모글로빈을 지닌 모든 대상이 자동으로 스캔됩니다!]

지이이잉-!

“……!”

순간, 시야가 변했다.

이쪽을 중심으로 150미터 반경 이내의 모든 공간의 배경이 검정색으로 바뀌었다. 그 범위 안쪽에 있는 사람들, 애완견, 심지어 참새까지 모든 대상에게 밝은 형광색의 외곽선이 그려졌다.

물론, 이쪽을 향해 쇄도해 오고 있는 핏빛 짐승의 머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퍼더더더덕!

짐승의 머리를 이루고 있는 수만 마리의 박쥐 군체. 그 하나하나가 모조리 다 보였다. 겉면뿐만이 아닌 내부까지도 보였다. 심지어 수만 마리의 박쥐 떼 사이를 흐르며 전체를 이루는 마나의 네트워크까지도 낱낱이. 모두. 보였다.

덕분에 감지할 수 있었다. 쇄도해 오는 압도적 공세. 그 속에 존재하는 실낱같은 빈틈을.

‘저곳!’

어느 곳으로도 피할 방향이 없는 것 같던 상황. 절체절명의 순간에 살아날 유일한 구멍이 보였다. 바로 이쪽을 향해 크게 벌어져 있는 짐승의 입 안쪽이었다.

고민할 시간 따위도 없었다.

감지하자마자 바닥을 박찼다.

타앗!

8282 모드가 해제된 마당이었다. 땅을 박차며 앞으로 뻗어가는 스스로의 움직임이 굼벵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상관없다. 때로는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정확한 위치와 적절한 타이밍. 그것만 있다면 달팽이라도 때로는 독수리를 피해낼 수 있는 법이니까.

지금의 상황이 그러했다.

처척!

단 두 발짝.

앞으로 걷듯이 움직였다.

그 직후, 굉음이 사방을 점령했다.

……!

너무나 커다란 소리가 오히려 귀를 먹먹하게 했다. 사방이 어두워졌다. 당연했다. 짐승의 거대한 아가리가 이쪽을 집어삼켰으니까. 바닥의 포석에 송곳니를 틀어박으며 모든 방향을 뒤덮어 버렸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날 씹어 삼키려 들겠지. 각얼음을 씹어 버리듯이. 하지만 말이다.

‘너, 사나워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입천장은 나약하잖아?’

그러했다.

적절한 순간에 업그레이드가 된 경혈 스캐닝. 아직 업그레이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새로운 기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놈의 입천장에 위치한 소소한 약점이 보였다. 즉시 품속에 손을 넣었다. 꼬슴이를 꺼냈다. 역시나 꼬슴이는 빈혈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미안했다. 이런 순간이 아니라면 꼬슴이의 조력을 얻기보다는 먼저 토닥여 주기부터 했을 텐데.

“꼬슴아? 정말 미안해. 그래도 잠깐만. 아주 잠시만, 힘을 빌려줄래?”

녀석에게 빨간 해바라기 씨를 내밀었다.

꼬슴이도 상황을 깨달은 걸까.

즉시 반응했다.

“꼬……슴!”

와작!

꼬슴이가 빨간 해바라기 씨를 야물딱지게 씹어먹었다. 그 직후, 꼬슴이의 품속에 얼굴을 묻었다.

이내 꼬슴이가 폭발적으로 거대해졌다. 등짝의 가시를 최대한 곤두세운 채로.

……뚜콰앙-!

압도적인 팽창!

푸푸푹!

수많은 가시가 밤송이처럼 입천장에 박혔다. 때마침 이쪽을 씹어 먹으려던 짐승이 뜻밖의 타격에 놀라서 입을 벌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꼬슴아! 지금!”

“꼬슴!”

꼬슴이가 데굴데굴 굴렀다. 짐승의 입이 따끔한 통증으로 벌어진 순간에 절묘하게 시도된 구르기였다.

덕분에 탈출 성공!

꼬슴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짐승의 입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둥글게 말았던 몸을 펼치고는 이쪽의 옷깃을 물었다. 그리고 달렸다. 무려 30미터나 전력질주로. 빈혈에 시달리고 있을 텐데도.

“꼬스슴! 꼬…… 슴!”

그 후에야 꼬슴이는 현기증을 느꼈는지 달리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나 잘했지? 라고 묻는 듯한 까만 눈망울.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맙다는 말로는 한없이 모자라겠지. 녀석을 한 차례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파란 해바라기 씨를 먹이곤 다시 아담해진 녀석을 안주머니에 보듬었다. 새삼스러운 다짐이 들었다.

‘이긴다.’

그래야 모두가 산다.

살아야 꼬슴이에게, 모두에게 고맙다고 말할 수 있다.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함께 싸워주어서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이 순간을 이겨내야 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그럴 수 있겠다. 할 수 있겠다.

‘약점이…… 보이니까!’

고개를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이쪽을 놓친 핏빛 짐승. 놈이 가시가 박힌 아가리를 벌리며 살벌한 눈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저 눈빛이 기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더 안쪽의 본질과 약점이 모조리 보이는 덕분이었다.

츠즈즈즈즈……!

새로워진 경혈 스캐닝.

헤모글로빈 기반의 혈액을 지닌 수십만 마리의 박쥐 군체가 숫자에 상관없이 모조리 다 보였다. 그 하나하나를 이어주는 마나의 네트워크도 낱낱이 보였다. 신체의 경혈이 흐르는 것과 같은 광경.

덕분에 놈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려는지도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부위를 반드시 지키려 하는지도, 모두, 보였다.

‘거기, 딱 걸렸어.’

핏빛 짐승의 중심. 다섯 개의 머리가 돋아난 가슴의 중앙.

그곳 내부에 웅크린 인간의 형상이 보였다. 흑마법사 놈이었다. 마치 심장처럼 움츠리고서. 혈액을 공급하듯 대량의 마나를 뿜어내며 수십만 마리 박쥐 군체의 연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놈을 치면 된다.

저놈을 타격해야 한다.

그러자면…….

“왼쪽부터 첫 번째 머리는 데미안! 두 번째는 로베르토 경! 세 번째는 키에르사 경! 네 번째 머리는 실비아 님과 아이젤 경과 우루스!”

외쳤다.

짐승의 머리 하나씩을 가리켰다.

“각자 배정받은 머리와 능동적으로 교전하며 고착 견제! 부탁합니다!”

다행히 핏빛 괴수는 이동 능력이 거의 없어 보였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심각하게 짧은 다리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쪽에게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 일부를 빼앗긴 탓이겠지. 그래서 신체를 구성할 박쥐 군체를 충분히 소환하지 못한 것이 원인일 테지.

그 점을 이용해야 한다.

할 수 있다.

모두가 제대로만 싸워준다면!

푸욱!

이쪽의 외침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포석을 박차는 데미안과 모두들. 그 모습을 보며 검정색 K맛 가시를 꺼냈다. 다시금 팔뚝을 찔렀다. 지옥과 같은 고통이 삽시간에 몰려왔다. 하지만 참아냈다. 이제는 익숙…… 하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겠다.

‘한 번만 더!’

8282 모드로 한 번만 더 진입하면 된다. 모드의 지속 시간이 별로 길지는 않지만 충분하다. 8282의 속도라면 어렵지 않게 저 짐승 놈의 몸통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슴 안쪽에 심장처럼 도사린 흑마법사 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으으읏……!’

이를 악물고 참았다.

마침내 해냈다.

고통 끝에 날뛰며 포효하는 심장. 신진대사가 가속되는 경이로운 고양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K-맛 가시 효과 발동.]

[당신의 신진대사가 ‘8282 모드’로 급가속됩니다.]

후욱!

내뱉는 숨결에 배어나는 열기. 폭주하는 기관차가 토해내는 연기처럼 숨을 내뿜었다. 들이마셨다. 가슴 가득 산소를 잔뜩 머금은 다음 순간, 땅을 박찼다. 모드의 지속 시간이 풀리기 전에. 지쳐 쓰러지기 전에. 놈의 약점을 찌르고자.

투확!

세상이 가느다란 선으로 변했다. 풍경이 뒤로 길게 늘어졌다. 목표인 짐승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놈도 이쪽의 접근을 감지한 걸까. 아마도 그럴 테지. 그러니 다섯 번째 머리가 이쪽을 휙 돌아보며 반응하는 거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추월!’

타다다닷!

놈의 머리 넷은 데미안과 나머지 인원들의 공격에 묶였다. 자유롭게 풀린 것은 다섯 번째 머리뿐. 그 정도는 충분히 회피하며 추월할 수 있다. 순식간에 약점 부위에 접근할 수 있겠…….

……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퍼더더더덕!

놈의 다섯 번째 머리를 이루던 일부의 박쥐 군체가 흩어지며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그 숫자는 대략 수천 이상. 날아오르고, 흩어지고, 모든 방위를 점거하며 달려들어 왔다. 마치 그물처럼.

“……!”

가슴이 철렁.

가까스로 돌진을 멈추었다. 급속도로 방향을 틀었다. 그 직후, 수천 마리의 박쥐 떼가 이쪽이 돌진하려던 공간을 헤집었다. 만약 제때 멈추지 못했다면? 저 수천 쌍의 송곳니로 이루어진 그물망에 걸려서 전신이 찢겼겠지. 수천 조각으로.

‘무슨 이런…….’

식은땀이 등줄기를 적셨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다. 8282 모드의 지속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그 전에 끝내야 한다. 이미 체력에 한계가 온 상황이라 다음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내달렸다. 핏빛 짐승의 주위를 돌며 돌파할 공간을 탐색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후웅! 후우웅!

다섯 번째 머리가 정확하게 이쪽을 주시하며 계속하여 반응했다. 수시로 박쥐 떼를 분리하고, 그물처럼 허공에 전개하며 침투할 공간 자체를 틀어막았다.

그걸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저놈이 이쪽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노라고. 약점을 노리는 이쪽의 침투를 사전에 봉쇄하려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답은 뭘까.

‘한 사람이 더…… 필요해.’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답이었다.

다섯 번째 머리를 공격하며 묶어둘 인원이 추가로 필요하다. 그런데 그럴 사람이…… 더 있을까. 아니. 없다. 확언할 수 있다. 솔직히 머리 넷을 견제하는 것도 벅찬 상황이니까.

데미안은 첫 번째 머리를 훌륭하게 묶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다른 머리까지 견제할 여력은 없어 보였다.

황실의 소드마스터인 로베르토 경과 키에르사 경은? 각자가 맡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머리를 어찌어찌 묶어두고는 있는데, 이미 불안해 보였다. 시간이 갈수록 역부족일 듯했다.

네 번째 머리는?

그나마 엘프족의 집행자인 실비아의 빠른 몸놀림과 우루스의 튼튼한 버티기, 그리고 성기사 아이젤 경의 적절한 견제 덕분에 완벽히 견제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셋 중에서 한 사람이 빠지는 순간, 견제에 실패하게 될 것이 뻔해 보였다.

그러니 결론은…….

‘사람이 모자라.’

한 사람만 더 있다면. 소드마스터 수준의 전투원이 한 명만 더 있다면. 그러면 다섯 번째 머리를 묶어둘 수 있을 텐데. 그러면 내가 짐승의 약점에 치명타를 먹일 수 있을 텐데. 한 명만 더 있으면 그게 되는데…….

그 한 명이 없다.

‘……젠장!’

라키엘은 어떻게든 스스로 다섯 번째 머리의 방어를 돌파하고자 더욱 힘껏 땅을 박찼다. 그러나 여전히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숨은 차오르고 고갈된 체력이 전신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가슴에 차오르는 암담한 심정과 함께였다.

‘한 명만 더 있으면 되는데……!’

그가 안타까운 심정을 곱씹는 사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절망적으로 기울어가는 전투의 흐름과 라키엘의 곤경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한 황제가 필사적으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황제의 간절한 걸음이 향하는 곳.

그곳에 쓰러진 쟈빌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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