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약점 공략 (1)
보이지가 않는다.
들리지도 않는다.
한편으론 어지럽고, 메스껍다.
어째서?
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왜 이런 꼴로 쓰러져 비척거리고 있는 걸까. 나는 누구일까. 여긴 어디일까. 그리고…… 내 어깨를 붙잡고서 흔드는 이 손길은 누구의 것일까.
“……론, 들리…… 가?”
귓가에 아스라이 울리는 목소리.
잘 들리지 않지만 묵직했다. 정중했다. 그리고 떨리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간절한 심정을 담은 목소리라고. 그래서 떨리고 있는 것이리라고.
‘어째서? 왜?’
거구의 소드마스터.
한때의 몰락한 반란자.
쟈빌론은 어지러운 와중에 가까스로 실눈을 떴다.
전신의 감각이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비겁한 기습을 당해서다. 자신을 리한 군의관이라고 속이며 이쪽을 부려먹었던 흑마법사 놈. 그 가증스러운 놈이 기습적으로 저주 마법을 퍼부었다.
피하지 못했다.
시각이 사라졌다.
청각도 빼앗겼다.
그사이, 뭐에 걸렸는지 온몸에서 힘도 쑥 빠져나갔다. 현기증과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마치, 어릴 적 강제로 검술 훈련을 받다가 열사병에 걸려 혼절했던 때와 비슷한 불쾌한 감각이었다.
아니.
내가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나? 내가 누구길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실험실은 나빠. 사람을 아프게 하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저…….
“……크읏.”
더없이 뒤엉키는 기억.
여전히 혼란스러운 의식.
하지만 이런 감각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그때도 이랬으니까. 태연히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를 갈며 팔에 힘을 주었다.
다행히 잃어버렸던 시각과 청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아울러, 아까부터 이쪽의 어깨를 흔들어대던 귀찮은 손길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간절하게 들리는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그대, 내 목……리가 들…… 는가?”
귀찮고 번거롭다.
뿌리치고 싶다.
그런데 왜 저 목소리는 계속 애타게 들리는 걸까. 어울리지 않는, 생전 처음으로 부탁을 하려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절실하게 느껴지는 걸까.
‘무슨…….’
쟈빌론은 고개를 돌려 짜증이 섞인 눈길을 던졌다. 이제 거의 회복된 시각. 덕분에 자신의 어깨를 잡고서 흔들던 사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수염을 기른 중후한 얼굴. 흐트러져 있음에도 위엄을 잃지 않은 옷차림. 엄격한 인상임에도 그 눈빛에서만큼은 절실함과 다급함을 숨기지 못한 표정.
낯선 중년의 남자가 이쪽을 향해 말했다.
“정신이…… 드는가?”
“…….”
모르는 아저씨다.
그런데 딱 하나는 알겠다.
신분이 어마어마하게 높으리라는 것.
“누구?”
쟈빌론이 멍하니 물었다.
중년의 남자, 황제 아스테리온이 미간을 찡그렸다.
‘역시…….’
쟈빌론은 제정신인 상태가 아니었구나.
황제는 문득, 얼마 전에 들었던 보고를 떠올렸다. 황실 정보부의 보고였던가. 근래 두어 달 사이, 황도 곳곳을 배회하며 리한 군의관을 수소문하며 다닌다는 거구의 사내가 있었더랬다.
보고를 받자마자 심상치 않다고 여겼다. 리한 군의관은 자신의 큰아들이 앙부아즈 내전에 참전하며 비밀스럽게 사용했던 가명이었으니까.
게다가 사내의 인상착의도 의미심장했다. 모든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앙부아즈의 마법 실험실에서 탈출한 쟈빌론일 것이리란 결론이 나왔다.
그때부터였다.
은밀한 추적을 명했더랬다. 가능하다면 생포하라고도 지시하였다. 물론 실패했다. 추적대는 번번이 쟈빌론을 놓쳤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종적 자체가 묘연해졌다.
그러다가 오늘, 이렇듯 시성식장에 나타났다. 온전치 못한 정신상태로. 인질극으로 시성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죽이고 싶었다.
본보기로 처참한 형벌을 내리고 싶었다.
아까까지는…… 분명 그러했는데.
“…….”
지금은 아니다.
‘내 아들에게 이자가 필요할 것이야.’
황제는 광장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청난 굉음이 내달려오는 곳. 그곳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가 눈에 들어왔다. 네 개의 머리를 묶고 있는 이쪽의 인원들. 그리고 핏빛 짐승의 다섯 번째 머리를 피하며 약점을 노리는 듯한 황태자까지.
그 모습들을 보며 전투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이 부족하다. 소드마스터에 준하는 실력자 하나가 부족하다. 그래서 황태자가 괴수의 약점을 타격하지 못하고 있다. 딱 한 명이 부족해서.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꽈악!
쟈빌론의 어깨를 짚은 황제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보게. 괜찮은가?”
“……그읏.”
쟈빌론이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지 않았다. 기습적인 저주 마법에 당하며 잃었던 시각과 청각은 돌아왔지만, 어쩐 일인지 전신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좀처럼 일어날 수도 없을 만큼 다리가 풀려 있었다.
내가 왜 이런 걸까.
설마 이것도 흑마법사 놈 때문인가.
게다가 눈앞의 아저씨는 왜 자꾸 날 흔들어대며 말을 걸어오는 걸까.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저렇듯 절실하고 다급한 눈초리를 보내어 오는 것일까.
쟈빌론은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부디, 도움을 주게.”
“…….”
다짜고짜 도와달라니.
어째서?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네.”
“…….”
싫은데.
모르는 사람인데.
나도 어지러운데. 왜?
“리한 군의관이 그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네.”
“…….”
쟈빌론은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나운 눈길을 하고서 황제를 노려보았다.
“리한 군의관이라……. 댁도 똑같은 부류인 건가?”
“뭣?”
“또야. 계속 이런 식이지. 리한 군의관을 안다며 나서는 놈들. 얽혀오는 놈들. 자기 옆집에 리한 군의관이 산다는 놈들. 자신이 리한 군의관이라던 놈까지. 전부 이런 식으로 나한테 접근했지. 리한 군의관을 애타게 찾는 내 진심을 이용하려고. 댁도 그런 건가? 응?”
“…….”
“이제는 속지 않아. 리한 군의관 핑계를 대려면, 내 눈앞에 리한 군의관을 데려와. 그러기 전에는 말도 붙이지 말고, 친한 척하며 다가오지도 말라고. 어차피 또다시 날 속이고 이용할 거면서.”
“그건…….”
“운이 좋은 줄 알도록. 내 몸 상태가 이렇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목을 뽑아 버렸을 테니까.”
쟈빌론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진심이었다.
이제는 너무나 화가 났다.
매번 이런 식으로 속는 것에도 신물이 났다.
다들 자신을 속이고, 이용했다. 눈앞의 처음 보는 중년 남자? 비슷한 부류겠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감이며 차림만 봐도 뻔했다. 저런 부귀한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리한 군의관을 안다는 걸까. 말도 안 된다.
‘리한 군의관은……저런 차림과는 거리가 멀단 말이다. 매일 야전 병원에서 구르던 통에 옷차림도 수수, 아니, 꼬질꼬질했거든!’
분명하다. 자신이 기억하는 리한 군의관의 차림은 꼬질꼬질했다.
행동 또한 소박하기가 그지없었다. 어릴 때부터 부귀하게 자라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하게 자라나며 때로는 부유한 자들의 눈치를 보며 살았던 느낌마저 때때로 풍겼다. 마치, 셋방살이라도 오래 했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토록 존귀한 차림의 사내가 리한 군의관을 알아? 헛소리!’
쟈빌론은 분노와 불신의 눈초리로 황제를 쏘아보았다.
그래서 황제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쟈빌론보다 더 분노했다.
“쟈빌론.”
황제가 나직하게, 그리고 묵직하게 말했다.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
“……어?”
뜻하지 않은 순간에 불린 풀네임.
쟈빌론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기억 속의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사이, 황제의 나직하고도 어쩐지 이글거리는 말이 이어졌다.
“실로 실망이네. 왕가의 야심가이자 반란자여. 그대는 리한 군의관을 그토록 찾아다녔으면서, 그렇게나 리한 군의관이 중요하다고 말하여 왔으면서, 그런데 정작 진짜 리한 군의관이 눈앞에 있는데도 알아보질 못한단 말인가?”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쟈빌론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때였다.
황제가 돌연 손을 뻗어 쟈빌론의 머리통을 덥석 움켜잡았다. 뜻하지 않은 과격한 손길에 쟈빌론이 순간 울컥했다. 황제를 향해 주먹을 뻗으려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손길이 반 박자 빨랐다.
황제의 혼신의 힘을 실은 손아귀가 쟈빌론의 고개를 강제로 살짝 돌렸다. 한창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광장 중앙을 향해서였다.
“저길 보도록, 실패한 반란자여.”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처절한 전투. 어지러이 날뛰는 핏빛 짐승의 다섯 줄기 머리. 번득이는 검광과 오러의 난무. 그 사이를 위태롭게 뛰어다니는 가냘픈 체형의 은발 청년.
“…….”
쟈빌론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은발 청년에게 고정되었다. 귓가에는 황제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똑똑히 보게. 저 아이가 내 아들이야. 내가 리한 군의관의 아비야. 그런데 쟈빌론 그대는, 입버릇처럼 리한 군의관을 찾겠다고 하였으면서, 정작 진짜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를 못하였단 말인가? 하여 저 아이를 위협하고, 저런 상황으로 내몰았단 말인가? 응?”
“무슨…….”
쟈빌론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치려고 했는데…… 어쩐지 잘 되지가 않았다.
‘저건 리한 군의관이 아닌데.’
자꾸만 눈길이 간다.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수가 없다.
왜?
모르겠다.
기억 속의 리한 군의관은 통통했는데. 붉은 머리칼을 지녔는데. 저렇게 잘 뛰어다니지도 못했는데. 뱃살이 빵빵해서. 볼도 빵빵해서. 잘못 구운 찐빵 같이 웃는 자였는데.
그런데…….
‘왜 익숙하지?’
이상한 일이었다.
은발.
빼빼 마른 은발 남자는 나빠. 나한테서 도망을 치고, 얼음 방패를 내세우며 대들었으니까. 나중엔 엄청나게 커져서는 날 붙잡고 패대기까지 쳤어. 그러니까 빼빼 마른 은발 남자는 나빠. 그런 건 리한 군의관이 아니야. 아닐 거야. 아마도. 그래야 할 텐데.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걸까.
감격. 마침내 찾았다는 환희. 이해할 수 없는 기쁨과 안도감. 동시에 솟아나는 분노까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흔들었다. 전신을 격동시켰다.
익숙하니까.
저렇게 뛰는 모습.
얼음 방패를 꺼내는 모습.
“데미안! 로베르토 경! 조금만 더 버티시고!”
……저 목소리.
“리한…… 군의관?”
머릿속을 저며내던 안개 한 덩이가 걷혔다. 비로소 기억 일부가 살아났다. 그래. 저것도 리한 군의관이었다. 달아나던 날의 리한 군의관이 저랬다. 제국의 황태자였다. 웃겼다.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두통을 지워줄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을 테니까.
그래서 잡아두려 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저 핏덩이처럼 더러운 괴물이 리한 군의관을 위협하고 있는 거지?’
두근, 두근……!
쟈빌론은 저도 모르게 스르륵 일어섰다. 황제의 손길을 뿌리치고, 치미는 현기증을 참아냈다. 그동안 그의 시선은 오직 라키엘을 위협하는 핏빛 짐승의 다섯 번째 머리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어째서…… 감히 리한 군의관을 죽이려는 거지?’
두근! 두근!
그건 안 된다.
리한 군의관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 죽일 수 없음 또한 물론이다. 그럼에도 만일 리한 군의관이 남의 손에 당해야만 한다면, 죽어야만 한다면, 그 손은 응당 나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 말고는 아무도 리한 군의관을 해치지 못한다.
한데 감히.
지금.
저 더러운 핏덩이가?
두쿵-!
쟈빌론은 눈을 부릅떴다.
완전한 깨달음.
선연한 분노.
치솟는 아드레날린 속에 빈혈은 극복된 지 오래였다.
“……내가 구해줄게! 리한 군의과아안!”
콰아아앙-!
다음 순간, 쟈빌론이 열 손가락 가득 오러를 생성하며 광장 중앙으로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