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약점 공략 (2)
“내가 구해줄게! 리한 군의과아안!”
콰아아앙-!
쟈빌론이 열 손가락 가득 오러를 생성하며 광장 중앙으로 돌격했다. 치솟는 아드레날린 속에 빈혈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사실 여전히 어지러웠다. 하지만 갖은 마법 실험으로 얻은(?) 정신병과 무한한 집착의 힘은 빈혈을 능가하기에 충분했다.
지금, 그의 눈에는 오직 리한 군의관을 위협하는 가증스러운 핏덩이 괴물만이 보이는 까닭이었다.
‘구한다!’
반드시 구해낸다.
리한 군의관은 나만 죽일 수 있다!
일념으로 땅을 박찼다.
여전한 빈혈 때문에 다리가 풀리려 했지만, 시시때때로 눈앞이 핑 돌며 균형감각이 흐트러졌지만 극복했다. 더욱 달렸다. 두 팔을 펼쳤다. 날개처럼 뻗은 열 손가락, 더욱 길게 뻗어 나오는 열 줄기의 오러를 날개처럼 펄럭이며.
“안아줘요!”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유모에게 뛰어들며 어리광을 부리던 어느 따스했던 오후였던가. 그때처럼 온몸을 허공에 던졌다. 핏빛 괴수의 다섯 번째 머리, 그 아래의 목줄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팔을 활짝. 오러는 더욱 활짝.
그리고 거침없이.
부콰아아악-!
휘둘렀다.
열 줄기의 오러가 공간을 헤집었다. 핏빛 짐승의 목덜미도 함께 갈랐다. 튀어 오르는 선혈. 해체되는 수백 마리의 박쥐. 그 사이를 통과했다. 착지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리한 군의관이 있었다.
“……훗.”
방금 봤지?
라는 눈빛을 던졌다.
뿌듯했다.
그러자 마침내 찾아낸 리한 군의관이 열렬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훗은 개뿔! 앞쪽 봐! 앞! 앞!”
“…….”
역시 리한 군의관은 여전히 까칠하구나. 하지만 그래서 싫지가 않아. 나중에 내가 죽는 날이 올 때에 순장시킬 맛이 날 것 같거든. 그러니까 그때까지 죽지 않도록 지금은 열심히 지켜줘야지.
쟈빌론은 다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콰아아아아-!
방금 베어냈던 짐승의 목덜미가 말끔하게 복구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쪽을 향해 쇄도해 오고 있었다. 수십 줄기의 박쥐 군체로 나뉘어서 현란하게. 모든 방향을 포위하듯이 에워싸며.
“……!”
빠져나갈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물러날 생각 따윈 없었다.
뒤에 리한 군의관이 있으니까. 절대 물러날 수 없다. 그러니까 지킨다!
츠즈즈즈앗-!
그의 열 손가락에서 오러 줄기가 이글거리며 피어났다. 그때부터였다.
“크아아아아아!”
휘둘렀다.
성난 짐승처럼.
두 손을 휘두르고, 찢고, 베었다.
포효하며 가르고, 후려치고, 썰었다.
그때마다 허공에 핏덩이로 이루어진 꽃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시들고 저물었다. 그 빈자리를 새로운 박쥐 떼가 메우며 돌진해 왔다. 쟈빌론도 물러나지 않았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끝끝내 자리를 지켜냈다.
그렇게 한 차례의 격한 충돌 끝에 온몸이 피투성이로 흥건히 젖었다. 그럼에도 쟈빌론은 기쁨을 느꼈다. 해냈다. 등 뒤의 리한 군의관을 지켜냈다. 나는 성공한 남자다!
“그렇지?”
뿌듯한 심정을 담아 뒤를 돌아보았다. 리한 군의관에게 박수를 받아야지. 그런데 현실(?)은 조금 달랐다. 리한 군의관이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
그가 의아함을 느끼는 순간, 저 멀리에서 날아온 라키엘의 외침이 그의 고막을 콕 때렸다.
“잘했어! 그 머리가 네 담당이니까 싸우면서 붙들고 있어!”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는 리한 군의관의 모습이 보였다. 엄청나게 빠른 뜀박질이었다. 혼자만 다른 시간의 축을 내달리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저러니까 금방 멀어진 거겠지.
하지만 쟈빌론은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느낄 틈이 없었다.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데미안이 서늘한 눈길을 던져왔기 때문이었다.
“기왕 함께 싸우는 것이라면, 실수하지 말도록.”
“…….”
곁을 지나치듯 달려가며 툭 내뱉는 당부. 혹은 경고.
쟈빌론의 콧등에 주름이 생겨났다.
저 흑발 호위 놈도 기억이 났다.
여전히 엉키고 꼬인 정신과 기억의 서랍이지만, 그 와중에도 저 흑발 호위와 검을 겨루었던 순간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그래. 처참하게 패배하고, 박살이 났지. 저놈, 무서웠어. 그리고 성가셔. 감히 내 리한 군의관의 곁을 차지하고 있는 놈. 언젠가는…….
‘죽이고 만다.’
까드득!
쟈빌론은 새삼 다짐하며 지금 당장의 적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혈염의 짐승의 다섯 번째 머리도 그를 적으로 인식하고서 살기 가득한 수천 쌍의 눈알을 번득였다.
‘덕분에 고착견제, 홀딩 라인업 완성!’
라키엘은 8282 모드의 버프(?)를 받고서 내달리며 사나운 미소를 머금었다. 솔직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암울했다. 답이 보이지가 않았다. 짐승의 다섯 번째 머리를 묶어둘 한 사람이 부족했다.
스스로 돌파?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뜻밖의 순간에 가세한 쟈빌론 덕분이었다. 저 인간, 아직 온전한 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어찌어찌 이쪽이 리한 군의관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구나 싶었다.
‘그러니 어쨌건 됐어. 드디어 저 성가신 머리 다섯 개를 다 묶었으니까.’
이제는 할 수 있다.
약점 공략!
‘목표는 저곳.’
라키엘은 눈을 번득였다.
‘넌 딱 걸렸어.’
짐승의 몸체. 다섯 갈래의 목이 뻗어나오는 뿌리. 그 속에 심장처럼 웅크리고 있는 흑마법사 놈. 저 안에 짱박(?)혀서 꿀만 빨고 있었겠지. 자신이 무적이 됐다며 희희낙락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그 짓도 끝이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너는 내가 그냥 안 둔다.’
까드득!
라키엘은 이를 갈았다.
새삼스럽게 깊고도 진한 빡침이 샘솟았다. 생각할수록 저놈 때문에 생겨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까닭이었다.
“너! 내 목소리 들리지!”
땅을 박차며 외쳤다. 놈의 공격 범위가 치중된 전방을 우회해서, 옆구리 쪽으로 돌아가며 빡침의 샤우팅을 토해냈다.
“들리는 거 다 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흑마법사! 너희는 어째서 하는 짓마다 이렇게 음습한 짓거리인 거냐, 어!”
……움찔!
데미안과 대적하던 짐승의 첫 번째 머리가 움찔했다. 나머지 머리들도 숨 가쁘고 격렬하던 공방의 와중에 주춤하긴 마찬가지였다. 짐승의 내부에 웅크리고 있던 아난샤의 주의가 라키엘의 외침에 쏠린 까닭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아난샤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렇잖아도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던 참이었다. 황태자의 수하들이 달려들어 이쪽의 머리를 대놓고 견제하는 가운데, 황태자가 이쪽의 몸통으로 접근하려고 뱅뱅 도는 것이 보였다. 약점을 노리는구나.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황태자가 돌연 이쪽을 지목하며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니.
‘교란을 하려는 의도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휘말리지 말자. 무시하자. 아난샤는 다짐했다. 그리고 정확히 3초 뒤부터, 저 외침을 무시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는 빡쎈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라키엘의 외침이 너무나 구구절절 정곡을 찔러댔기 때문이었다.
“너! 수하로 부리는 뱀파이어들을 시켜서 황도 시민들을 물게 했지! 뱀파이어 변이증을 퍼뜨린 게 네놈이지!”
“…….”
“그렇게 병을 퍼뜨리고, 사람들이 고통받는 가운데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죽거나 뱀파이어가 되어가고, 모두가 허둥거리는 상황에 네가 나서서 변이증을 치료하려고 했겠지! 자신이 변이증을 퍼뜨린 원흉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로!”
……움찔.
어떻게 알았지?
아난샤의 움찔 1스택이 또 적립(?)되었다. 그사이에도 라키엘의 진실을 들쑤시는 외침이 스무고개처럼 스무스하게 이어졌다.
“그러면 너는 사회를 도탄에 빠뜨리던 변이증을 치료한 사람이 되는 거고! 그 막대한 공헌으로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려 했겠지! 그리고 그쯤에서 밝히려 했을 거야! 변이증을 치료한 비결이 바로 흑마법이었다고! 흑마법도 알고 보면 사회에 유익하게 쓰일 수 있다고! 무조건적으로 박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려 했겠지!”
‘그건…….’
정답인데.
진짜로 어떻게 알았지?
아난샤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사이에도 황태자의 정곡 찌르기, 아니, 비방이 점입가경의 경지로 흘러갔다.
“그렇게 흑마법의 유익함을 주장하고! 법의 보호를 받는 사회의 주류로 진출하고!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결국엔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었던 거겠지! 난 알아! 넌 한 번도 이성과 교제해본 적도, 손을 잡아보기는커녕 제대로 말을 섞어본 적도 없는 놈이니까!”
“……!”
어?
그건 아닌데?
그건 좀 억측인데?
그건 진짜 억울한데?
아난샤는 살짝 다급해졌다. 황태자의 비난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장 반박하고 싶었다.
그거 거짓말이라고. 개소리라고. 자신은 모태솔로가 아니라고. 로잔느, 엘리샤, 마르가리타, 그밖에도 수많은 매력적인 여성과 교제한 적이 있노라고. 그런데 한 번도 이성과 못 만나본 쑥맥? 자신이? 그런 거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크릅! 큽! 읍읍!”
이미 혈염의 짐승으로 화한 상태였다. 그 어떤 괴수보다도 무시무시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얻긴 했는데, 정작 말을 할 수는 없게 됐다. 그렇다고 자신을 보호하는 박쥐 군체를 스스로 해체하며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난……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하염없이 속으로만 애타게 외쳤다.
수천 쌍의 눈동자로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수많은 시민들. 대광장에 갇힌 사람들. 그들의 눈빛에 서린 두려움 한구석에, 약간의 연민(?)이 생겨나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
하지만 황태자의 비열한 언론 플레이는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잔인함의 수위를 더욱 높여갔다.
“그래! 고작 그 정도가 네 인생의 목표겠지! 여자 한 번 만나보는 거! 그러니까 뱀파이어 변이증을 퍼뜨리려던 계획이 실패한 후로 오늘의 테러를 꾸몄겠지! 황태자의 납치를 사주하고! 네가 짜잔 나타나며 납치범을 격퇴하고! 공로를 세워서 인기를 얻고! 여자 한 번 만나보려고! 이런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친 거겠지! 고작! 여자! 손! 한 번! 잡아보겠다고!”
“……!”
아니라고!
그런 이상한 결론 내리지 말라고!
아난샤는 울고 싶어졌다.
황태자의 추측이 중간까지는 다 들어맞아서, 그런데 결론으로 가는 과정이 뜬금없는 급커브를 틀어서, 그렇게 자신을 여자 손 잡아보는 일에 집착하는 놈으로 만들어서, 그게 제일 억울했다.
덕분에 그는 다급해졌고,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분산시키게 되었다. 아주 잠깐. 0.5초 정도.
그 정도의 빈틈과 시간이면 충분했다. 라키엘이 그의 약점을 타격할 지점에 접근하기에는.
……처척!
‘도착!’
라키엘이 혈염의 짐승의 몸통에 내려앉았다. 다섯 줄기의 목이 뻗어나오는 뿌리 지점이었다. 그가 발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짐승의 가슴을 향해서, 어느새 꺼내든 만년필을 겨누었다.
‘준비하고…… 쏘세요!’
투콰하학-!
만년필에서 분사된 열기가 짐승의 약점 부위를 폭발적으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