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약점 공략 (3)
……투콰하하학-!
만년필의 펜촉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약 섭씨 5,500℃. 태양 표면의 온도에 버금가는 열기의 잉크를 분출했다. 격렬하게. 폭발적으로.
콰학-!
국지적 열폭풍이 일어났다. 달구어진 비수처럼 목표를 헤집었다. 혈염의 짐승의 다섯 목줄기. 그 뿌리에 해당하는 가슴 부위가 순식간에 지져졌다. 아니, 녹아내렸다. 열기에 뻥 뚫리며 구멍이 생겨났다.
짐승의 가슴을 이루고 있던 박쥐 군체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잉크에 직접 닿기도 전에 쇄도한 복사열에 의해 증발됐다. 짐승의 가슴에 뚫린 구멍이 더욱 커졌다. 깊어졌다. 열기의 거침없는 전진. 돌파!
‘……어엇?’
짐승의 가슴속에 심장처럼 웅크리고 있던 아난샤는 기겁했다. 황태자의 가증스럽던 입놀림. 묘하게 왜곡된 억측과 비난. 그 때문에 아주 잠깐 주의가 흐트러진 사이, 황태자의 접근을 허용해 버렸다.
‘이건…… 위험하다.’
직감적으로 오싹 돋는 소름.
황태자가 쏘아낸 저 끔찍한 열기가 어디를 노리고 파고드는지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다. 자신을 아예 지져 버리려는 거다. 이대로면 당한다.
그걸 깨달은 순간, 아난샤는 곧바로 대응했다.
‘크읏!’
정신을 집중하였다. 자신이 활성화한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십분 활용했다. 짐승을 이루는 박쥐 군체에 대한 지배력을 끌어올렸다. 박쥐 군체를 가슴 부위로 밀집시켰다. 그 자체가 수백 겹의 방패가 되도록. 저 열기를 막아내도록.
츠즈즈즈즛!
박쥐 군체가 즉각 반응하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가슴 부위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열기에 녹아내렸다. 녹아내린 자리를 새로운 박쥐 떼가 메꾸었다. 또 증발하고, 녹고, 불탔다. 그러한 일이 0.1초 사이에 수차례나 반복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열기가 식었다.
……푸슈슥!
폭발적으로 피어나는 연기.
생살이 타며 뿜어낸 노린내.
그 속에서 혈염의 짐승이 독약을 먹은 조각상처럼 스르르 무릎을 꿇었다. 날뛰던 다섯 갈래의 머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쿠우웅-!
지축을 울리는 굉음에 모두의 정신이 번득 들었다. 대광장의 사람들은 고개를 들었다. 급성 빈혈에 시달리는 어지러움 속에서도, 방금의 끔찍한 폭발이 만들어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라키엘도 마찬가지였다.
‘……우읍!’
라키엘은 만년필을 분사한 자세 그대로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왼손에는 냉기의 방패, 만년설이 전개되어 있었다. 아니, 거의 녹아서 사라질 뻔했다. 만년필이 분사한 끔찍한 열기, 그 복사열을 코앞에서 방어해낸 까닭이었다.
‘나까지 후라이드 될 뻔했네.’
만년설의 냉기로 최대한의 방어를 했음에도 온몸이 화끈화끈했다.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한 직후에 롱패딩을 껴입고서 최고 난이도 사우나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열기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냈다.
제대로 타격을 먹였다.
그토록 날뛰던 핏빛 짐승이 얌전히 주저앉아 있는 것이 증거였다.
‘안쪽의 놈은 어떻게 됐지?’
그는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직경 1미터 가량의 터널, 아니,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방금 만년필로 분사한 열기가 뚫어낸 구멍이었다.
구멍 안쪽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수천 마리의 박쥐 떼가 생으로 증발하고 녹아내리며 생겨난 연기가 너무나 자욱했다. 심지어 엄청나게 매캐해서 눈이 따가웠다.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건 무슨 화생방도 아니고.’
실눈을 간신히 떴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지만 그는 불굴의 한국인이었다. 훈련소 시절 경험했던 화생방의 추억(?)을 떠올리며 꿋꿋하게 눈을 떴다.
‘경혈 스캐닝!’
딩동!
[경혈 스캐닝을 발동합니다.]
[스캐닝의 범위(반경 150m) 이내에 헤모글로빈 기반의 혈액을 지닌 대상이 다수 포착되었습니다.]
[범위 내의 헤모글로빈을 지닌 모든 대상이 자동으로 스캔됩니다.]
든든한 알림음과 함께 시야가 변했다. 매캐한 연기 너머로 구멍 안쪽의 상황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어?”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웅크린 자세. 이쪽을 올려다보는 고개의 각도. 그리고…… 살아 있다?
“……크큿! 크! 쿨룩! 콜록!”
안쪽에서 웃음 섞인 기침 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아깝겠군, 황태자. 이렇게 회심의 일격이 실패를 해서 어쩌나?”
“…….”
경혈 스캐닝으로 또렷하게 보이는 윤곽. 흑마법사. 놈의 턱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놈의 전신을 따라 흐르는 기혈의 흐름도, 주위의 박쥐 군체와 나누는 마나의 교류도 모두…… 정상이었다.
“방금은 위험했어. 죽는 줄 알았지. 그런데 설마, 그 일격이 한 끗 차이로 내게 닿지 못할 줄을 누가 알았을까. 어?”
“…….”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 김에 말해두는 건데, 나는 많은 여성과 교제를 나누어 본 몸이다. 오히려 소문에 따르면 황태자, 그쪽이 아직껏 이성과 인연이 없었던 듯하던데.”
츠츠츠츳!
놈이 말하는 사이, 수천 마리의 박쥐 떼가 짐승의 내부에서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만년필이 뚫어낸 구멍을 순식간에 메우기 시작했다. 어찌 손을 쓸 틈도 없이 너무나 신속하게.
‘이런.’
당장 만년필을 다시 쏠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만년설의 냉기 방패가 아직 복구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무턱대고 대비 없이 만년필을 쏘면 끔찍한 복사열에 이쪽도 전신화상을 입겠지.
흑마법사 놈도 그 사실을 간파한 모양이었다.
“방금 일격, 분명 최대의 기량을 발휘한 것이었겠지. 그렇지 않은가, 황태자여?”
“…….”
“하지만 나는 막아냈다. 거의 죽을 뻔했지만, 그럼에도 막아냈다. 그리고 이렇게 복구할 수 있게 됐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황태자, 네가 아무리 애를 쓰며 화염을 쏘아내도, 나는 똑같이 버텨내고, 다시 일어나게 될 테지. 내겐 수십만 마리의 박쥐가 남아 있으니까.”
“…….”
“그런데 또 쏘아볼 텐가?”
츠츠…… 츳……!
구멍이 거의 다 메워졌다. 반면, 만년설의 냉기 방패 복구는 아직이었다. 구멍이 완전히 막히기 직전, 그 틈새로 흑마법사 놈과 언뜻 눈이 마주쳤다. 놈은 자신을 둘러싼 박쥐 군체를 가리키며 웃고 있었다.
“이거, 절대 방벽이야.”
비웃음이다, 저거.
보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반응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분통을 터뜨리지도, 똑같은 웃음으로 대응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침묵했다. 무표정한 눈빛으로 메꾸어지는 구멍과 그 속의 흑마법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사이, 마침내 구멍이 완전히 메꾸어졌다. 언제 타격을 입었느냐는 듯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핏빛 짐승의 움직임도 재개되었다.
“전하!”
다시 날뛰기 시작한 다섯 갈래의 머리.
근위대장 로베르토 경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필이면 다섯 머리가 뻗어나오는 중심에 황태자가 서 있으니까. 저곳이 제일 위험한 곳이니까. 그런데 황태자가 아무런 움직임조차 없이 우두커니 있으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보다 못한 데미안이 나섰다. 뒤이어 쟈빌론도 땅을 박찼다. 자신이 맡고 있던 머리를 버려두고서, 등을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며 황태자를 구하고자 달려갔다. 이대로 조금만 지체하다간 황태자가 죽을 것 같아서였다.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 황태자. 혼신의 힘으로 쏟아낸 일격이 실패한 충격을 받은 것일까. 망연자실한 절망에 빠져 체념한 걸까. 정녕 그렇게…… 자포자기를 해 버린 걸까.
상황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데미안을 비롯한 모두가, 광장에 쓰러진 무수한 사람들이, 다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꾸욱 쥐고서, 울분을 삼키며, 응원하는 마음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형님……!’
2황자 테오도르가 눈시울을 적셨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배다른 형제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모두 지켜본 2황자였다. 대광장에 불현듯 나타난 기괴한 짐승. 쓰러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지키고자 떨쳐 일어난 자신의 형제, 황태자.
한때는 병약하기가 그지없어 미래가 없노라 취급받았던 형님. 모두에게 무시받았던 형님. 심지어 과거엔 자신마저도 은연중에 없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렇듯 가벼이 여겼는데.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 저런 분이셨어?’
시민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황태자가 무엇을 위해 떨쳐 일어났는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된 시민들이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생각하였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얼마나 황태자를 저평가하고 있었던 것인지를.
‘그저…… 특이한 의술을 펼치는 분이신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도 여전히 유약하고 병약한 분이신 줄 알았는데…….’
‘크라노스에서 흑마법사를 토벌했다는 이야기가…… 그저 공적을 치장하기 위한 게 아니었어?’
‘그럼 그때도, 저렇게…… 직접 온몸을 던지셨단 말인가.’
‘황태자씩이나 되는 분이, 저렇게?’
……우리를 위해서다.
황족의 신분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듯 싸웠고, 혼신의 일격을 가하였으며, 그 끝에 좌절감에 휩싸여 계신 것이다.
“전하!”
데미안이 더욱 다급하게 뛰었다.
안타깝게도 아직 황태자에게 닿기엔 거리가 멀었다. 짐승의 공격이 황태자에게 먼저 닿을 것 같았다.
분명, 그럴 것만 같았다.
황태자가 다시금 만년필을 겨냥하기 전까지는. 나직하지만 힘 있는 읊조림을 머금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그래, 알았다. 네놈의 방어 방식.”
스윽.
시종일관 우두커니 있던 라키엘이 마침내 움직였다.
만년필을 겨냥하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동작.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철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계산을 모두 끝마친 자의 눈빛이었다.
‘지금 모인 박쥐 군체의 규모는 수십만. 한 번의 만년필 타격으로 태워 없앨 수 있는 박쥐의 숫자는 수천. 그때마다 입는 타격으로 생기는 구멍을 메꿔서 복구하는 데에도 비슷한 숫자의 박쥐가 필요해지겠지.’
……그리고 그만큼, 다른 부위의 박쥐가 소모될 것이고.
‘계속 메꾸면 된다고? 정말로?’
흑마법사의 호언장담이 떠올랐다. 이쪽을 비웃던 눈초리가 떠올랐다. 그래서 더 흐뭇해졌다.
과연, 복구에 소모될 박쥐가 무제한일까. 아니면, 만년필의 발동 횟수가 무제한일까.
‘흑마법사, 네가 모르고 있겠지만…….’
……화르륵!
‘이 만년필이라는 물건이 말이야. 희한하게도 최대 출력으로 쏘려면, 아스라한 심법으로 밀어넣는 마나를 최소한으로 조절해야 하는 역설적인 물건이거든. 그래서 의외로 효율이 아주 끝내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결론은 하나다.
방어? 박쥐 군체의 숫자를 이용한? 아무리 때려도 계속 메꿀 수 있는 방식의?
‘네놈이 절대 방벽을 지녔다고? 방탄유리 같은?’
그럼 이쪽은…….
키이이이잉!
다시금 짐승의 약점에 딱 갖다댄 만년필. 자동차 방탄유리에 권총을 갖다 대듯. 아스라한 심법으로 최소 규모의 마나를 투입했다. 만년필이 최대 출력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라키엘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배어났다.
“……아직, 천 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