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영웅 탄생 (1)
“……아직, 천 발 남았다.”
나직하게 읊조렸다.
절대 방벽? 아무리 쏘고, 태우고, 녹여도 박쥐 군체의 숫자가 압도적이라고? 계속해서 메우고 복구할 수 있다고? 그러니 이쪽의 분투는 그저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라고?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러니 그런 식으로 자신만만하게 웃은 거겠지. 그런데 말이다…….
‘네가 계산하지 못한 부분이 있거든, 사실은.’
스윽.
라키엘은 만년필을 느슨하게 쥐었다. 문득, 처음 만년필을 시험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땐 몰랐다. 만년필을 강하게 쏘려면 반대로 약한 마나를 넣어야 한다는 걸. 아마 저 흑마법사도 마찬가지겠지. 이쪽이 전력의 마나를 쏟아부은 걸로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니, 여유로운 거겠지.
……처척.
만년필을 조준했다.
아까 쏘았던 부위에 그대로. 여전히 가장 나약한 힘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만년설의 냉기 방벽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며.
투확-!
만년필이 화염을 뿜었다. 마치 화산폭발과도 같은 기세였다. 혈염의 짐승을 이루던 박쥐 군체 일부가 여지없이 증발하고, 녹아내렸다. 수 미터 깊이의 구멍이 뻥 뚫렸다. 아까와 거의 똑같은 규모의 깊이였다.
덕분에 혈염의 짐승 내부에 심장처럼 도사리고 있던 아난샤는 황당함을 느꼈다.
“허?”
삽시간에 쇄도해 오는 열기!
물론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까도 막아낸 타격이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앞서처럼 박쥐 군체를 조종했다. 짐승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수십만 마리의 박쥐. 그중의 일부를 내부에서 이동시켰고, 자신의 주위로 밀집시켰다.
그 직후, 만년필에서 발사된 초고온의 잉크가 간접적인 충격을 전달했다.
……콰앙-!
“큿!”
주위의 박쥐들이 산 채로 익어서 죽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왔다. 하지만 아난샤는 웃었다. 자신은 멀쩡하니까. 또 막아냈으니까. 짐승의 몸통에 구멍이 뚫렸을지언정, 아까와 똑같이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으니까.
“황태자, 미련에 집착하는 타입인가? 아니면 쉽게 수긍을 못 하는 성격인 것인지?”
아난샤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짐승의 몸통에 뚫린 구멍.
그걸 통해 저 위쪽의 황태자가 보였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황태자의 표정이 굳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두 번째 화염을 발사하기 위해 더욱 애를 썼을 텐데. 이렇게나 위력적인 화염이라면 소비되는 마나가 엄청날 텐데.
그런데 그걸 두 번이나 실패했으니 얼마나 낭패감을 느끼고 있을까, 황태자는.
“후후, 후후후! 아깝겠군.”
황태자를 올려다보며 웃어 주었다. 보란 듯이 아까처럼 박쥐 군체를 조종했고, 손상된 구멍을 메꾸었다. 복구 또한 금방이었다.
‘아무리 그런 식으로 애를 써봤자, 나는 지금처럼 손상된 부위만 복구하면 그만이야. 박쥐 군체가 소모되는 숫자? 많아 봤자 몇천 수준이고.’
그러니 이런 타격, 수십 번은 능히 버텨낼 수 있다. 복구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계속 같은 방식으로 덤빈다는 것은 바가지로 호숫물을 퍼내겠노라 덤비는 것과 같은 행위다. 즉, 어리석은 만용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투확-!
또다시, 폭발음과 함께 외부에서 엄청난 열기와 진동이 쇄도해 왔다.
‘어?’
또?
아난샤는 의아함을 느꼈다.
진짜로 바가지를 들고서 호숫물을 퍼내겠노라 덤비는 걸까. 설마 싶었다. 황태자가 그렇게 멍청할까 싶었다. 그런데 진짜였다. 몰려오는 열기도, 충격도 모두.
‘허! 이런 머저리 같은 놈!’
그는 비웃으며 박쥐 군체를 조종했다. 똑같은 공격을 세 번이나 당하게 되니,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덕분에 조금의 당황도 없이 박쥐 군체를 밀집시키고, 공격을 막아냈다.
아까와 비슷한 크기의 구멍이 뚫렸음도, 그걸 통해 황태자의 얼굴을 다시금 볼 수 있게 되었음도 물론이었다.
“자꾸 얼굴을 보려니 정이 들 것 같군. 설마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건가?”
“…….”
황태자는 대답이 없었다.
엄청난 화염을 쏘아낸 후폭풍, 남은 복사열 속에서 헐떡이며 냉기 방패를 붙잡고 있을 뿐.
그 모습을 보니 더더욱 비웃음이 치솟았다.
“그래. 힘내 보도록.”
덤빌 수 있을 때까지 덤벼 보거라. 그리고 무력감을 절감하며 쓰러지거라. 제국의 심장부에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그리고 어리석게.’
아난샤는 다시금 구멍을 복구했다. 솔직히 이제는 끝이겠거니 싶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입으로는 황태자를 비웃었지만 내심 감탄이 들기도 했다. 혈염의 짐승의 몸통에 세 번이나 구멍을 뚫다니. 대단했다. 어떻게 저런 수를 숨기고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진짜로 끝일 터.’
그럴 수밖에 없다.
이만한 위력의 마법을 세 번이나 연달아 사용한다? 자신에게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 하물며 황태자는 오죽할까. 이미 한계를 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내 차례다, 황태자여.’
아난샤는 눈을 감았다.
그동안 화염을 막아내고, 타격을 복구하느라 계속 움직이지를 못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복구가 끝났고, 황태자의 공격이 더 이어지진 못할 테니, 이제는 자신이 주위를 휩쓸어 버릴 때가 왔다.
쿠구구구구……!
한동안 잠잠하게 수그리고 있던 혈염의 짐승이 다섯 개의 머리를 치켜들었다. 아니, 치켜들려던 순간이었다.
투확-!
또다시 화염을 내뿜는 만년필!
“……!”
무슨!
아난샤는 경악하며 황급히 방어에 집중하였다. 또 박쥐 군체를 밀집시키고, 열기를 막아내고, 똑같은 크기의 구멍을 통해 황태자와 대면하게 되었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
황태자, 아까와 비슷하다.
여전히 열기의 후폭풍에 헐떡이며 냉기 방패를 유지하느라 애를 쓰고 있지만, 엄청나게 지친 모습이지만, 그런데…… 딱히 아까보다 더 많이 지친 것 같지가 않다.
‘황태자…… 보기보다 독한 놈이었군.’
그는 내심 혀를 내두르며 구멍을 메꾸었다. ‘설마’ 여기서 또 화염을 발사할까 싶었다. 하지만 그는 명심해야 했다. 반드시 일어날 일을 묘사하고 싶을 때는 ‘설마’라는 말을 붙이면 된다는 출처 불명의 격언을.
투콰아학-!
또 분사되는 화염!
“……그읏!”
또 막아냈다. 또 생겨난 구멍. 또 보이는 황태자의 모습. 그런데 똑같았다. 아까보다 딱히 더 지쳐 보이거나 하지가 않았다.
아니,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처음 화염을 쐈던 때부터 그냥, 계속 저 정도 상태였던 거 같은데?’
그랬다.
돌이켜보니 정말로 그랬다.
비로소 아난샤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저거, 황태자 저놈, 저렇게 헐떡이는 이유가…… 화염을 발사해서, 마나를 소모해서 지친 게 아니라…… 그냥 기본적으로 약골이라서?’
깨달음과 함께 띠잉, 하고 저릿해지려는 뒷골. 한편으로 그는 소름 돋는 추측을 떠올렸다. 어쩌면, 황태자가 내뿜는 저 화염, 저거, 생각보다 마나 투입량이 적을지도 모른다고. 아마도 그런 것 같다고.
‘그러니까 저렇게 계속 쏠 수 있는 거겠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어떻게?
무슨 비결로?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사실이 하나는 있었다. 지금 당장 구멍을 메꾸지 않으면 당하리라는 것!
‘으읏!’
이제 아난샤의 입가에서 비웃음은 사라졌다. 여유롭던 마음도 사라졌다. 황태자를 향해 내심 품고 있던 감탄? 서서히 경악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구멍을 메꾸기 위해 모여드는 박쥐 군체의 몸짓도 바빠졌다.
그리고 어김없이 라키엘의 만년필이 다시금…….
투확-!
“……!”
진짜다.
설마 했던 짐작이 정말인 것 같다.
아난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황태자……! 결국, 네가 원하는 게…… 이거였나!’
비로소 완연히 깨달았다.
치킨 게임. 끝없는 소모전. 때리는 쪽과 막아내는 쪽. 어느 쪽이 먼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결코 끝나지 않을 무한의 충돌.
그 무식한 싸움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황태자가!
‘이런 미친!’
아난샤는 치를 떨었다.
외통수에 걸렸다.
막아내고 복구하면 또 때리고, 막으면 또 때리고, 그 사이에 다른 행동을 취할 여유가 없었다. 황태자가 화염을 발사하는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했기 때문이었다. 도망? 역습? 그런 걸 하려다간 몸통에 난 구멍을 메꾸는 것이 늦어질 것 같았다.
한데 그렇게 늦어진 상태에서 황태자가 화염을 분사한다면…….
‘그땐, 못 막겠지.’
확실하다.
다른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막고 복구하는 데에만 전력을 다 쏟아야 비로소 방어가 되는 위력의 화염이었다. 그래서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다. 강제로 방어와 회복만 강요당하는 상황에 묶였기 때문이었다.
‘크으읏!’
아난샤는 이를 갈며 방어에만 집중했다. 라키엘은 헐떡이며 공격에만 치중했다.
투확-!
물론 라키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흐읍!’
한 번 만년필을 사용할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온몸이 부서질 듯이 아팠다. 만년설의 냉기방패가 있어도 발사의 충격과 열기를 다 막아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호흡?
간신히 가능했다.
너무나 달구어진 공기 때문에 기관지가 익을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호흡기 화상의 조짐이 서서히 느껴졌다.
정신?
이미 반쯤 혼수상태였다.
너무나 뜨거워서. 그 속에서 악을 쓰며 버티느라. 거기에 아까부터 연달아 사용했던 8282 모드의 혹사가 안겨주는 후폭풍 때문에. 몰려오는 피로감과 체력의 고갈이 발목을 잡았다. 솔직히 당장 쓰러지고 싶었다. 편안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모두가…… 보고 있어.’
흐려지는 눈길을 들었다.
마법진으로 봉쇄된 대광장.
이곳에 갇힌 수많은 사람들.
빈혈에 시달리며 쓰러져 간절한 눈길을 보내는 무수한 이들. 황제. 2황자. 교황과 대주교. 근위대. 특근대원들. 귀족과 시민들. 이름도 모를 많은 이들이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다. 내 모습을. 내 싸움을.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응원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쓰러지고 싶어도 못 쓰러지겠다.
‘나는…….’
투확!
또 분사했다.
이게 몇 번째일까.
이미 숫자를 세는 것도 잊었다.
다만, 흑마법사의 방어와 복구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놈의 박쥐 군체 숫자가 줄어든 탓일까. 아니면, 데미안과 로베르토 경들이 이쪽의 의도를 깨닫고는 함께 총공세에 나서준 덕분일까.
아마 둘 다겠지.
‘데미안…….’
녀석이 흑발을 휘날리며 검풍을 일으키고 있다. 핏빛 짐승의 전신을 그야말로 난도질하고 있다. 쟈빌론도 마찬가지다. 데미안과 경쟁하듯 기를 쓰며 공세에 나서고 있다. 로베르토 경도, 우루스와 나머지도 모두 그랬다.
저렇게 모두가 분투하는 만큼 흑마법사 놈은 복구에 더 많은 힘을 쏟겠지. 놈이 거느리는 박쥐 군체의 숫자가 더 빠르게 줄어들겠지.
그래. 다들 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도.
투콰학-!
또 쏘았다.
숨이 턱 막혔다.
의식 일부가 날아갔다.
아니, 의식은 아까부터 거의 날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천 발 어쩌고 하고는 두 번쯤 더 쏘았던 때부터? 그냥, 멍하고. 어지럽고.
하지만 계속해야 한다.
어째서?
모두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솔직히 그건 좀 아닌 거 같고. 그런 숭고하고 거창한 이유는 잘 모르겠고.
그냥 좀.
‘저 면상이 짜증이 나서.’
눈길을 내렸다.
또 뚫어낸 구멍.
그 아래로 보이는 얼굴.
흑마법사가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놈의 얼굴에선 이제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당황감과 당혹감, 최후를 예감한 낭패감만이 가득할 뿐. 그렇게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허둥거리고 있을 뿐.
그 모습을 보자 잠깐 연민이…… 들진 않았다.
‘나는 사람 살리는 일을 하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저놈은?
병균이다.
수많은 이들을 병들게 하고, 고통에 몰아넣고, 그걸 이용해서 이득을 얻으려 했다. 아니, 굳이 이런 이유들을 갖다 붙일 필요도 없이…….
“아까, 날 보면서 비웃었어?”
“그, 그읏……!”
“해명은 됐고. 황태자이자 별궁 한의원의 원장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이름으로 진료를 권하노니, 소독.”
……투확!
마지막 힘을 쥐어짠 화염이 분사되었다.
혼절 직전까지 고갈된 기력. 하여 평소보다 더욱 적게 투입된 마나. 그렇기에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열폭풍이 몰아쳤다.
더는 그 앞을 막아서는 박쥐 군체가 없었다. 계속된 타격에 너무나 많은 수가 소모되어서, 이제는 구멍을 메꾸는 속도가 늦어지게 되어서, 삽시간에 방어가 뚫렸다. 아난샤의 부릅뜬 눈앞이 환해졌다.
“……!”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최후를 직감하는 것과 동시에 수천 도를 상회하는 압도적 열폭풍이 아난샤를 휩쓸었다. 전신이 일격에 증발되었다. 원자 단위로 해체되고, 기화되었다. 일부 원자가 초고온 상태로 가열되며 전자와 양전하 이온으로 분리된 플라즈마로 분해되었다.
완벽한 소각.
혹은, 사회적 소독이었다.